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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선비 임마누엘 칸트에게 개인이란 무엇인가? 그가 추구하는 개인에는 도발적인 면모가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개성을 과시하는 사람만이 개인은 아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옳다.", "이건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무슨 근거로 이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외치고 또 믿을 수 있을까? 칸트의 윤리학은 이 질문의 답을 찾는 여정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인간 윤리의 마지막 보루라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은 윤리의 빛나는 첨탑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욕망을 사랑할 자유와 이기적일 권리를 부여했다. 칸트는 흔들리지 말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격려한다. '도덕적 확신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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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기독교는 오랫동안 윤리의 근간이었다. 작동 방식은 간단하다. 천국은 만기적금형이다. 선행을 쌓으면 천국으로 보상받는다. 반대편에는 공포 마케팅이 있다. 악행이 지나치면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받는다. 주일날 교회에 가는 일은 은행 방문과 같다. 예배로 적금을 넣는다. 원죄는 부채 원금이고 회개로 부채 이자를 납부한다.

 

칸트는 기독교 윤리를 우회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도박사 논증'이라는 약식 게임을 제안한다.

 

- 신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신앙 역시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네 가지 경우의 수가 나온다.

 

1) 신이 존재하고 내게 신앙이 있다면 천국에 갈 것이다.

 

2) 신이 부재하고 내게 신앙이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3) 신이 부재하고 내게 신앙이 없다면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4) 신이 존재하고 내게 신앙이 없다면 지옥에 갈 것이다.

 

1)은 몹시 좋고 4)는 극단적으로 나쁘다. 2)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고 회개 기도를 하는 것은 분명한 손해지만, 영원이라는 시간 앞에서는 미미한 불편이다.

 

신앙이 없는 쪽은 리스크가 너무 큰 반면 있는 쪽의 손해는 적고 보상은 막대하다. 이 조건이 주식시장이라면 어떨까. 상식적인 투자자라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신앙을 유지하는 편이 안정적인 투자 포트폴리오라고 확신할 것이다.

 

도박사 논증은 천박하다. 기독교 신앙은 숭고해 보일 뿐, 거품을 걷으면 장사일 뿐이라는 비정한 시각이다. 얼핏 보면 칸트가 신을 믿으라고 추천하는 것 같지만 그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무너뜨리고 있다.

 

칸트는 <신의 존재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요청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신의 존재를 바랄 수 있을 뿐 증명할 수는 없거니와 거래는 신앙이 될 수 없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 이어 칸트 역시 기독교의 명치에 묵직한 한 방을 찔러 넣었다. 이때부터 서양에서 유일신은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칸트에게 도덕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예로부터 윤리학의 문제는 보상의 문제였다. 물질적인 보상을 이야기하면 너무 천박해지고 도덕처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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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도덕을 멋으로 해석하는 시도가 있었다. 공자나 고대 그리스가 그랬다. 공자는 계속해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한다. 군자는 본질적으로 '멋진' 사람이다. 명예는 비물질적이지만 이 역시 기분을 좋게 해주는 보상이다. 공자의 군자와 소인배의 비교 속에서 우리는 군자 소리를 듣기 위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역시 적금 상품이다.

 

이 다음에 나오는 개념이 정신적 행복이다. 명예조차 없을지라도 자신을 긍정하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악행 대신 선행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철학 이전까지 있었던 가장 세련된 도덕론이다. 헌데 자기 행복도 따지고 보면 거래임은 마찬가지다. 도덕으로 행복을 구매하는 게 아닌가? 칸트는 말한다.

 

“자기 행복의 원리는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다.”

 

“계산을 잘 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흄은 도덕의 기초를 동정심이라고 했다. 좋은 감정이지만 다시 말해 감정에 불과하다. 동정심을 충족하는 일이나 죄책감을 피하려는 것이나 거래이긴 마찬가지다.

 

“동정심에서 나온 행위는 ... 참된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명예에 대한 바람이나 같은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임마누엘 칸트여, 대체 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Der gute wille 데르 구테 빌레>다. 보통 '선의지'로 번역된다. 그저 선 자체를 향해있음을 의미한다.

 

“이 세계 안에서 아니, 더 넓게 말해 이 세계 밖에서라도 우리가 제한 없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땅히,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이 선의지다. 칸트는 보상을 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기 때문에 선의지를 “이성에 의한 진정한 자유의 상태”라고 규정한다. 칸트에게 자선의지란 곧 자유의지다. 자유로운 인간은 스스로에게 하나의 명령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정언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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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도덕적 명령에는 가언명령과 정언명령이 있다고 했다. 가언명령은 조건부 명령, 즉 거래다. 정언명령은 무조건적 명령이다. 거래 없는 도덕 그 자체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 하라.”

 

칸트 철학에서 준칙(Maxime 막시머)은 주관적 규칙이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인생 신조와 같다. 법칙(Gesetz 게제츠)은 도덕률이다. 어디서나 통하는 보편타당한 원칙이다.

 

멋지고 감동적이다. 그런데 생각하며 할수록 듣기에는 참 좋은데, 어쩐지 말 뿐인 것만 같다. 조건 없이 착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상태는 영 추상적이다. 생생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내용이 없다. 누군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찌할까.

 

"난 자유롭게 살기 싫은데? 욕망에 좀 굴복하면서 살면 안 돼? 나는 자유롭게 부자유의 상태를 선택하고 싶은걸.”

 

어쩔텐가? 칸트의 윤리학은 실체가 희미해 반박할 재료를 끌어오기 힘들다. 증명도 없다. 그는 진정한 도덕이 무엇인지를 증명하지 않았다. 진짜 도덕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였으면 싶은 바람에 불과하다. 칸트의 주장은 엄밀하고 보편타당해 보이지만 진정한 도덕이 못 되는 것들을 가지치기했을 뿐이다. 가지치기하고 남은 게 몸통이 아니라 그냥 폐허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신의 존재는 증명이 아니라 요청되어야 하는 거라면, 같은 식으로 정언명령도 요청된다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냥 도덕적 행위를 하는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도덕적 행위가 인간의 선험적 이성에 포함되어 있다는 증거를 엿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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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신오쿠보역 사망 사건의 이수현 씨는 일본 사회에 충격적인 감동을 주었다. 유학생인 그는 술에 취해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선의지다.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구하려던 취객도 못 살리고 그냥 이수현 씨를 포함해 세 명이 애꿎게 사망한 사건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의 행위가 ‘옳다’고 동의한다.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 이성의 힘이다.

 

이승선 씨는 의정부 화재 사건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는 일하러 가던 도중 화재 현장을 목격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작업 시 생명줄로 사용하는 밧줄을 매고 옆 건물 옥상을 통해 화재 건물로 진입했다. 이승선 씨는 팔 힘만으로 밧줄을 지탱하면서 여러 명의 시민을 안전하게 구조했다. 그는 명예에 대한 욕심도 없이 담담히 일터로 떠났다.

 

나중에 취재의 대상이 된 이승선 씨는 곤란해했다. 자신은 그저 현장을 지나갔고,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이런 의인들의 특징이 이렇다. 그들은 하나같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서 그랬다’고 대답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 앞에서 칸트의 도덕이 허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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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의지는 역사를 발전시키기도 한다. 1992년, 노태우 정권에서 벌어진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이 그렇다.

 

국군 장병들에게 기호 1번을 찍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전달되었다. 이때 ROTC 출신의 소대장인 스물네 살 이지문 중위는 부정투표는 옳지 않다는 이유 하나로 부대 밖을 나와 진상을 폭로했다.

 

이지문 중위는 고려대학생이었다. 학교에서는 데모도 안 하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지만 정의를 선택했다. 아닌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불이익을 받았다. 현병에 연행되고 갇혔다. 불명예 이등병 전역을 당했으며 원래 정해져 있었던 삼성그룹 입사가 취소되었다. 정의 앞에서 후회는 없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한 단계 또 발전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사람들을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칸트 철학 비판은 가능해도 부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스피노자의 근대시민윤리 세련됐다. 그의 논리는 기하학적으로 완벽하지만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스피노자가 꿈꾼 민주주의 사회는 완전무결하게 형성되지 않는다. 이기적 개인들은 독재와 부조리를 이길 수 없다. 정의 자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칸트의 개인 없이는 스피노자의 개인이 마음 놓고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부여한 마음의 기둥이 있어야 한다.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어도 필요한 순간 '그렇다!',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할 수 없다면 온전한 개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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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79세에 쓰러졌다. 현재는 뇌출혈로 추정된다. 의사는 시름시름 앓는 칸트에게 곧 완쾌될 거라며 매일 안심시켰다. 하루는 맥박이 더 좋아졌다고 하고 하루는 배변 상태가 나아졌다, 또 하루는 땀 흘리는 게 달라졌다고 했다. 칸트의 친구가 병문안을 와서 병세가 어떠냐고 묻자 그는 그제야 의사를 비판했다.

 

“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죽어가고 있네.”

 

칸트가 사망하기 4일 전이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의사가 방 안에 들어서자 칸트는 병상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그는 인사를 나누고도 여전히 서 있었다. 당연히 의사는 제발 앉으라며 권했다. 칸트는 당황해서 불안해하며 머뭇거렸다. 의사는 기력이 다한 철학자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칸트를 돌보던 친구는 의사에게 먼저 앉으라고 했다.

 

"손님이 먼저 자리에 앉아야 따라 앉을 것입니다."

 

의사는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몰라 안절부절했다. 마침내 칸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부디 저로 하여금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게 해주십시오.”

 

의사는 감격과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손님 앞에서 보여야 할 예의는 사소할지 몰라도 그만큼 칸트는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였다.

 

칸트의 마지막 순간은 음미하면 할수록 입안에 단 맛이 퍼지는 감동을 준다. 인간이 물러서지 않고자 그은 선을 밟고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나의 삶이 좋은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이도 결국엔 나 자신뿐이다. 칸트의 유언은 짧고 유쾌하다.

 

"좋군(Es ist g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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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끝으로 1804년 2월 12일 새벽, 임마누엘 칸트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의 무덤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조성되었다. 칸트의 묘비에는 판단력 비판의 유명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철학사상 가장 유명한 묘비명일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를 놀라움과 경건함으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요,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을 지키고 선 도덕법칙이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양심과 존엄. 그것은 칸트에게 'Es ist gut', 좋은 것이었다.

 

(임마누엘 칸트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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