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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멕시코가 독일을 잡았다. 국제대회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잡힐 때에는 공통적인 조건이 있다. 강팀이 골 찬스를 번번이 놓친다던가, 스타플레이어가 큰 부상을 당한다던가 하는 불운의 요소다. 그러나 이변은 결국 두 갈래로 나뉜다. 강팀과 약팀 중 어느 쪽이 주인공인지다. 즉 경기의 테마가 강팀의 졸전인지, 약팀의 선전인지 말이다.

 

멕시코-독일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우리는 안다. 멕시코는 위대한 경기를 펼쳤다. 그에 반해 스웨덴전에서 한국은 기록적인 졸전으로 수치를 당했다. 스웨덴 대표팀 역시 ‘한국 같은 팀을 상대로, 그것도 VAR로 1점 밖에 거두지 못했다’는 이유로 패배자이긴 마찬가지라는 평을 들었다. 야후 USA는 양 팀은 물론, 경기를 본 사람 모두가 패배자라는 조롱을 날렸다.

 

멕시코 대표팀은 언제나 선수 실력의 총량보다 뛰어난 경기를 펼친다는 점에서 매우 모범적인 국가대표팀이다. 멕시코는 어떻게 국제대회의 A급 강자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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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축구팬에게 멕시코 대표팀은 호불호가 갈리는 팀이다. 화려하거나 치명적이지 않고 성실하게 치고 달리는 팀이다. 불개미 같은 그들은 타국 팬에게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특정한 장면이나 경기의 확실한 주인공을 각인시키는 일이 드물다. 어디까지나 느낌의 이야기이지만, 멕시코 대표팀 잔상은 화려한 색감으로 남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신 에너지의 질감으로 남는다.

 

‘한 국가의 대표팀’으로서 멕시코를 바라보면 어떨까. 멕시코는 과거의 한국과 공통점이 많은 팀이다. 빠르고 공격적이다. 윙어의 질주에 이은 센터링은 90년대 한국 대표팀과 데자부를 이루는 멕시코의 전통적인 팀 칼라다. 상대 문전이 완전히 정돈되지 않았을 때 주로 헤더를 통해 혹은 난전상황에서 골대 안으로 일격을 날리는 모습은 멕시코 대표팀의 전형적인 이미지였다. 한국의 이런 움직임에 일본이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던가? (한국과 멕시코의 공통점을 따지자면 절대 져서는 안 되는 팀이 있는 것도 비슷하다. 우리는 일본, 멕시코에게는 미국이다.)

 

 

멕시코 대표팀은 에너지를 한데 끌어 모아 공을 상대 문전에 배달해 폭발 직전의 상황을 만드는 데는 능하다. 그러나 언제나 골 결정력은 에너지에 미치지 못했다. 이는 강팀을 상대로 선수들의 객관적 전력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많은 팀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신체의 물리적인 힘이 떨어지면 슛의 정확도도 떨어진다. 정밀함의 토대는 힘이다. 한국 선수들은 과거 유럽과 남미 팀의 골대 위로 소위 ‘홈런볼’로 불리는 뜬공을 날렸다. 기술이 아니라 힘의 차이에 기인한 장면이다.

 

골 결정력이 부족하다면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야 하므로,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멕시코 대표팀 선수들은 빠르게 뛰고, 많이 뛴다. 이런 팀은 필연적으로 상대 선수들과 자주 충돌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멕시코가 ‘암살’을 노리는 유럽과 남미 2강 1중(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우루과이) 선수들은 신체조건이 좋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더더욱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것밖에 없다.

 

물론 마음만으로 피지컬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다. 월드컵에서 멕시코 선수들은 1대 1 몸싸움에서 대체로 패배한다. 멕시코의 방식은 역시 멕시코답다. 패배를 끝없이 반복하며 기회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달려드는 것이다. 공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므로, 다른 선수가 팀 동료의 좌절을 만회하기 위해 즉시 수습해주어야 한다. 이것을 현대축구의 기본 토대인 유기적 움직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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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는 1970년 자국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며 강호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기적인 차원에서일 뿐이고, 홈 어드밴티지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역사적 맥락에서 멕시코는 현대축구의 기본틀인 토털풋볼이 보편화되고 나서 월드컵의 강호가 되었다. 이 팀은 1994년부터 2014년까지 여섯 번 연속 월드컵 16강에 올랐다.

 

멕시코 대표팀 선수들의 플레이는 헌신적이다. 이렇게 뛰다보면 선수 각자의 개인성은 희미해지고 팀은 일체화된다. 멕시코 대표팀의 칼라는 애국심과 투쟁심으로 수렴된다. 멕시코는 봉건적인 집단주의가 현대축구의 모토와 가장 매혹적으로 맞물린 팀이다.

 

 

2.

‘정통 멕시코’와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의 멕시코는 어떻게 다를까? 축구팬이라면 가장 먼저 부쩍 커진 선수들의 키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쟤네 언제 저렇게 자랐어?’ 그러나 ‘길이’는 늘어났을지언정 독일에는 절대적인 열세임이 금방 확인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멕시코적인 방식으로 지난 대회 챔피언의 수비를 붕괴시키고 공격을 봉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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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키타카의 예>

 

둘째, 축구의 유행을 외면하지도 그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빠르고 정밀한 패스로 중원을 장악하는 스페인산 ‘티키타카’는, 일부에서 유행의 끝물에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여전히 축구의 메인테마다. 장착하거나 대처해야 한다. 유행에 충실히 따라 ‘스시타카’를 익힌 일본이 대표적이다. 멕시코는 나름의 해법을 찾았음을 증명했다.

 

이전에 비해 윙사이드를 통한 공격의 중요도가 줄었다. 중원을 거치는 공격이 주를 이뤘다. 이는 치고 달리며 공을 배달하는 멕시코의 전통과 얼핏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멕시코는 낮고 짧은 티키타카식 패스를 계속해서 선보였다. 그러나 이런 플레이는 선수 개인 실력이 상대보다 우월하거나 최소한 대등한 경우에나 가능하다. 그래서 멕시코 선수들이 공격을 전개하며 보인 낮고 짧은 연속 패스는 한 번의 상황에서 2~3번이 전부였다. 그 이후에는 여지없이 치고 달렸다.

 

멕시코식 패싱 플레이를 ‘나초타카’라고 해 보자. 나초타카는 스시타카와 다르게 티키타카를 참고했을 뿐, 원전으로 삼고 따르지 않았다. 지난 독일전을 기준으로 보면 나초타카는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원을 통과하기 위해 존재했다. 모양새가 조금 바뀌었을 뿐, 멕시코는 공격적으로 치고 달려야만 승리를 추구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다. 나초타카는 독일의 타이밍을 번번이 빼앗았다. 멕시코는 독일선수들이 공을 따라가지 못해 허우적대는 추태까지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3. 

멕시코는 승리했을 경우 상대팀 선수와 팬들에게 ‘기세에 눌려’ 패배한 듯한 불쾌감을 선사한다. 일본 축구가 한국의 ‘에너지(일본이 쓰던 표현 그대로다.)’에 그토록 괴로워했던 과거를 연상시킨다.  

 

멕시코는 강팀에게 불의의 일격으로 굴욕을 선사하는 팀이지만 그 결과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강팀에게 보복 차원의 응징을 당하기도 한다(같은 차원에서 이탈리아는 2002년 이후 한국과 재회하기를 고대하는 중이다.). 그러나 멕시코만 대가를 치르는 건 아니다. 복수는 멕시코에게도 똑같이 중요하다. 멕시코는 2017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독일에 1 : 4 패배로 유린당했다. 애초에 멕시코의 오소리오 감독은 월드컵 조별예선 1차전 전부터 이때의 패배를 언급하며 독일과의 경기가 의식적인 복수전이 될 거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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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몸집이 작은 주먹꾼이 거인의 급소에 예고없는 ‘선빵’을 날리는 양상으로 시작되었다. 경기의 2/3는 멕시코가 한껏 날을 세운 비수로 독일의 급소를 정확히 찔러 들어가는 그림이었다. 비수란 물론 더없이 잘 준비된 역습을 말한다. 거인은 허우대에 걸맞지 않게 비틀거렸고 또한 분노했다. 후반 1/3은 멕시코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눈만은 치켜뜬 채 거구의 주먹을 악착같이 받아내는 형국이었다. 결국 버텨내는 데 성공하는 것으로 경기는 마무리되었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칼을 갈고 준비한 전술의 승리다. 하지만 전술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것은 선수들의 몫이다. 유기적이고 헌신적인 움직임은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넓은 경기장을 쓰는 단체구기종목인 축구에서 집중력은, 종목의 특성을 배신하지 않는 견고한 집단주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4.

멕시코는 오래된 거울이다. 실력차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팀에게 패배는 몰라도 고통만큼은 반드시 선사해주겠다는 의지가 있다. 멕시코뿐 아니라 우리 대표팀의 팀칼라이기도 했다. 독일을 예로 들면,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독일에 2:3으로 패배한 경기를 소환할 수 있다. 그때 한국은 아득히 우월한 강자 독일을 좌절 직전까지 몰아붙이며 세계에 감탄을 선사했다.

 

이 경기는 해당 대회 최고의 명승부로 남았다. 승자 독일마저 존경을 바쳤고 독일 현지의 언론은 한국팀의 분전에 ‘숭고하다’라는 수사까지 동원했다. 독일인들이 숙연해졌던 이유를 찾기 위해 굳이 게르만 서사시 따위를 들출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한계를 초월하려 했지만 숙명을 거스르지 못한 주인공의 영웅적 패배는 로망스의 기본적 모티브다. 한국 축구팬이라면 당연히 우리 대표팀의 승리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1994년의 독일전과 같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왜 멕시코 이야기를 이리도 길게 하는가. 멕시코 대표님은 우리와 강력한 공통점을 여럿 지닌 팀이었다. 다가오는 멕시코전은 두 팀의 유전자가 여전히 비슷한지, 아니면 멀어졌는지-그렇다면 얼마나 멀리 떨어져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매치가 될 것이다.

 

 

5.

공격과 수비의 구분이 따로 없는 현대축구 특유의 유기적인 플레이는 히딩크가 선사해 주었지만, 그 전에 우리 대표팀에는 일체화된 집단성이라는 토대가 있었다. 이쯤 이야기하면 많은 독자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으리라. 그렇다. 집단주의와 정신력을 강조하는 행태는 철지난 군국주의나 민족주의, 더 멀리는 군사독재를 거쳐 일제의 잔재가 아닌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축구는 바로 그 어두운 집단성을 전쟁 대신 배출하는 것으로 존재의의를 갖는 스포츠다. 정신력이라는 말은 고루해졌다. 이 말을 입에 담는 일이 민망해지자 대신 어디서나 ‘멘탈’이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쓰인다. 용례에서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두 단어의 쓰임은 본질적으로 같은데 말이다.

 

유행과 상관없이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심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心)의 요소 없이 실현되는 활동은 거의 없다. 스포츠, 그 중에서 축구, 또 그 중에서도 월드컵 무대에서 심(心)은 특별히 진가를 발휘해왔다. 멕시코가 독일에게 거둔 위대한 승리도 정신적 요소 없이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만한 집중력은 고양된 감정 상태에서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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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감독의 유명한 말, ‘정신력은 체력에서 나온다’는 선언은 과학적이고 물질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사실 히딩크만큼 집단성을 중요시하는 감독도 드물다. 저 말은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정신력이 빛을 발한다는 말이지, 정신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현대축구는 전술적으로 팀에 대한 선수 개인의 헌신을 강요하고 이를 위해 쉴 새 없는 집중력을 요구한다. 축구에서 정신력은 과거보다 현대에 더 중요해졌다.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소리에 ‘꼰대’라는 말이 목까지 차오르는 젊은 층도 작금의 한국 축구대표팀의 플레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멘탈이 (너무 금방) 나간다.’ 단어와 발음만 다를 뿐 똑같은 말이다. 집중력이 갑자기 실종되고, 유기적인 플레이로 후속 동작이 이어지지 않아 생겨나는 ‘자동문 수비’, ‘로봇 공격’은 정신력과 현대축구의 상관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2년의 영광을 돌이켜보면,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쓰러트린 우리에게 멕시코는 작아보였다. 3,4위전에서 전성기 시절의 터키에게 진 것이 아쉬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히딩크가 지적했듯 선수 개인의 면면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뛰어나다. 경기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멕시코가 자비를 모르는 학살자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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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의 心은 사라진 걸까, 잠시 출타중인 걸까. 여전히 있기는 한가. 오래된 거울 멕시코와의 일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