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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업급여를 받아보지 못한 감히 인생을 논하지 말라!

 

박근혜가 당선된 후 집에 돌아와 며칠을 잤다. 뜨면 울었고, 울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잤다. 대학원 수업도 종강했다. 골방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사라지고 싶었다. 민망하고, 없이 창피하고,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대선 다음 집회에서 만난 동생을 만나 길에서 대성통곡하고, 쌀국수를 먹고 헤어진 전부였다. 동생은 박근혜 당선으로 세상이 망한 듯해서 울었으나, 나는 거기에 더해 다시 백수가  처지가 서글퍼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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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나라 망한 누워있던 나를 보고 라면을 끓여 드시 어머니가 가볍게 물었다.

 

이제 국회 나가니?”

 

어머니는 박정희, 박근혜 빠였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며칠 퇴직한 어머니가 수술을 받았다. 어머니는 오른쪽 어깨의 인대가 끊어져, 손으로 젓가락도 제대로 잡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는데, 정년퇴임까지 참고 공장 일을 했다. 그리고 퇴직하자마자 수술을 하게 됐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의 얼굴을 때마다 가슴이 틀어쥐듯 아팠다. 며칠 밤 수술한 어머니를 간호하고, 고용노동청을 찾아갔다.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재직 증명서를 받기 위해 일했던 곳의 사장님에게 연락을 했더니 곧바로 서류 처리를 해줬다. 재직 기간을 보니 월급 받은 게 8개월밖에 안 됐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면 교육을 받고 가야 한다고 했다. 의자만 주르륵 놓인 운동장 같은 강의실에서 교육을 기다렸다. 사회의 낙오자 같았다. 거기 와 있던 많은 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많은 이들 50 이상이었지만, 나 같은 젊은이들도 많았다서로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  자리에서의 예의인  같았다내내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고, 눈물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이 수치스러웠다. 집에 가는 길에 대형 사고라도 나서 순간에 비명횡사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매월 상반기에 , 하반기 . 달에 건의 취업 활동을 했다는 증명서를 담당자 메일로 제출해야 했다. 이력서를 제출했다는 증거, 면접을 봤으면 명함이라도 제출해야 본인 월급의 60% 정도가 실업급여로 입금되었다. 나는 진짜 일자리가 급한 사람이었으므로, 실업급여 수급 요건을 충족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애석하게도 구직활동을 하는 6개월 동안 군데에서도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2. 돈이 효도하고, 돈이 사람 구실 한다!

 

회사를 그만뒀다는 사실을 집엔 알릴  없어서, 매일  가방과 노트북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나와 대학원 독서실에 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학교에 도착하면 오전 7 정도가 됐다. 오전 9시까지는 뉴스 체크를 하고, 시사 라디오를 들었다. 출근할 때의 습관을 그대로 유지했다. 매일 구직 사이트를 둘러보고, 대학원 공부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 전업 학생보다도 열심히 공부한 시기였다. 전공 공부를 다시 , 마치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같았다. 새록새록 좋은 기분이 아니라인생이 발전이 없지? 돌고 돌아 자리인 거지?’ 라는 갑갑함이었고, 안에는 자괴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달리  일이 없었고, 격무에 시달리던 과거와 달리, 하루는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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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되면 생활이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로 빠지게 된다. 단순히 수익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현상 유지가 어려워진다. 생활비는 그대로고 학자금 대출 같은 게 있다면 대출이자든 대출금이든 디폴트로 깔고 간다.

 

나이가 들면 '사람 구실'이라고 불리는 걸 해야 하는데, 지인이 상을 당했으면 부조금을 들고 조문을 가고, 결혼식이 있으면 축의금을 내는 등 경조사를 챙기는 것과 어버이날, 부모님 생신, 명절 등을 말한다. 그 사람 구실도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사람 구실하고, 돈이 효도를 한다.

 

직업 없이 쉬는 동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2013 삼월에 향년 96세로 생을 마감하셨다. 집에서 3 거리에 있는 요양원에서 보름 넘게 곡기를 드시다가 잠자듯 가셨다. 외할머니 임종을 어깨 수술을  회복하지 못한 어머니가 지켰다. 외할머니는 시집온 후 60년 넘게 집성촌에 계시다 돌아가시기 3 전에 우리 집으로 오셨다. 혼자 생활하시다 심장 기능이 급격히 약해져 어머니께서 데려온 거였다. 그때 나는 기업 컨텐츠를 만들어주던 회사에서 프리랜서를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할머니 끼니를 차려드릴 수 있었다. 백일 정도는 할머니 하루 세 끼 식사를 챙겨드리고 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NGO에 취직하며 할머니 끼니 챙길 사람이 없어 집 옆 요양원으로 모신 거였다.

 

장례기간 내내 좋은 직장에서, 오랫동안 성실히 직장생활을 동생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동생 회사에서 외할머니 상까지 장례지원이 됐기 때문이다. 동생 직장동료들도 조문을 많이 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 지 모르는 부모님께서는 "외할머니상은 휴가 안 주는 회사도 많은데, 너무 걱정 말고 일해야 하면 편하게 일하러 가라"고 말해주셨는데, 그 말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사람이 살아온 세월은 죽을 있다는 말의 뜻을 있었다. 확실히 사람은 나이를 그냥 먹는 아니었다. 이런저런 인생을 경험해야만 깨달을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지혜라면 지혜랄까, 혜안이라면 혜안이랄까 구력이라는 있었다. 일테면 똑같은 아픔을 경험해도 아픔을 느끼고, 똑같이 기쁜 일이 생겨도, 조금 있는 덤덤함, 무던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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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끝이 있겠지…’

 

이상 장수가 복이 아닌 100 시대에재수 없어 오래 살았다호상이었다'는 평가를 들었던 외할머니의 96년 인생의 구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막내 이모의 남편이 자살하던 해였다. 그 사실을 연로하신 외할머니에겐 알리지 않고 어머니가 막내 이모와 사촌 동생들과 장례식을 치렀다. 막내 이모 부부는 잘나가는 은행원이었으나, 1997 IMF 터지면서, 은행이 구조조정에 들어가자, 당시로써는 많은 퇴직금을 받고 명예퇴직을 했다. 퇴직을 했지만 아직 젊었던 이모부는 새로운 일을 해보기 위해 의욕만 펼치다가 처음엔 다단계 사업으로 재산을 일부 까먹었다. 이후에는 주식에 손을 뎄다가 왕창 까먹었고, 마지막으로는 빚보증을 섰다가, 집까지 날려 먹었다.

 

이모는 은행원 경력으로 제법 보험회사에 다시 취직했지만, 다단계-주식-빚보증 단계 공격을 함께 맞아 결국은 신용불량자가 되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둘 밖에 없었다. 그리곤 김밥집에 취직해 김밥 싸는 아주머니가 되었다. 가산을 탕진했던 이모부는 나중엔 병까지 걸려, 집에서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년을 집에서 형살이 같은 삶을 살면서 육체의 고통, 정신의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모부는 출근하는 이모에게 아침밥을 아주 맛있게 그릇이나 얻어먹고 이모가 출근한 사이 목을 맸다.

 

이모는 아직도 그릇 라는 말이 제일 무섭고, 슬픈 말이라고 한다. ‘ 먹을래?’라는 소리도 언젠가부터 못하게 되었단다.

 

외할머니는 외삼촌과 외숙모의 말실수로 사실을 알고 이틀을 앓았다. 그랬던 외할머니는 막상 막내 이모가 찾아와 서럽게 눈물을 흘리자, 곰삭은 눈으로 덤덤히 바라보다 한마디 했다.

 

나는 서방 줄도 몰랐다. 애들 생각해서라도 자꾸 울지 말고, 마음 강하게 먹고 살아라. 끝이 있겠지.”

 

끝이 있겠지라는 외할머니 말씀이 울림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위로가 되었다. 괴로운 일도, 기쁜 일도,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 누구보다 기구한 생애를 살아온 외할머니의 생애를 관통하는 깨달음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자꾸 인생이 여러 고꾸라지면서, 내게도 그런 인생의 구력이 생겼는데, 아무리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지인이 아픈 일을 당하면, 손이라도 하나 보태는 , 절대 외면하지 않는 , 장례식은 장소가 어디든, 빚을 내서라도 찾아가서 조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가림을 하고, 가족들을 책임지는 , 그러기 위해 월급쟁이로서 수많은 애환을 참아 내야 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 아니면 되는 사람이나만으로 그치는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누구도 비껴갈 없는 인생이었다. 조현민 같은 것들이 욕설을 하고 난장을 피워도 매달 직원 월급을 줘야 하는 사업체를 꾸린 사장이라면, 온갖 더러운 꼴을 당해도 다음날 출근 시간에 맞춰 넥타이를 매고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삶의 무게를 무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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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업그레이드했고, 매일 매일 서류에서 광탈해도 열심히 구직사이트를 둘러보고, 찾아서 지원했다.

 

결국 대학원 수업이 종강할 즈음 가까스로 언론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3 양옥을 개조한 사옥이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젊은이들의 메인스트림이 홍대 부근에 자리한 세금 전문지였다. 업력이 25년이나 되었고, 재정상태도 탄탄한 매체였다.

 

번의 백수 생활을 통해 깨달은 , 계획 없이 마냥 퍼져 있으면 된다는 사실이다.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하는 중요하고, 어디 나갈 곳이 없어도, 아침이면 일어나 씻고, 차려입고, 정좌하고 있어야 하며, 자기 업무 분야를 매일 챙기고 있어야, 오랜 공백 끝에 업무에 복귀해도, 가까스로 업무능력이 퇴보하는 막을 있다. 고꾸라지더라도 자리에서 짱돌이라도 하나 들고 일어서려는 마음가짐 없이는 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온전히 지키고 살아갈 없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마음에 굳은살이 쌓여갔다.

 

입사하고 나중에 사실이지만, 사장이 필자의 자기소개서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프린트까지 총무팀 직원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단다. 이런 경험을 사람들을 뽑아야 한다고. 돌아보면 구질구질하기만 자기소개서였다. 뉴스타파 1 공채 채용 최종 면접 면전에서 이근행 피디가뭔가 모르게 슬픈 같다 말했던, 자기소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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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OOO입니다.

 

제 소개를 하자면, 솔직히 말해 돌아보면 조악하고, 초라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MF와 신자유주의 시대로 내달리는 해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스펙과 학벌이 한 사람을 규정하는 시대의 눈이 정답인 줄 알았던 저는 시대의 눈에 부합하고자 노력하며 10대를 보냈습니다. 서울 4대문 안에 있는 대학에 가야 ‘대학생다운 대학생’이라는 주입을 받으며 재수 끝에 A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변변치 않은 가정에서 성공한 삶 또는 폼 나 보이는 인생은 법조인일 것 같아서 법대에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에세이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 때 본 책들이 고승덕 자서전, 오세훈 자서전, 에리카김 자서전, 배금자 변호사 자서전 이었으니, 상당 부분 이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겠죠. 심지어는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자서전,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도 시립도서관에서 빌려 본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이들의 실체를 옆에서 지켜보고 그때 이들의 자서전을 얼마 안 되는 고등학생 용돈 털어 샀던 게 후회 될 지경입니다. 심지어 이들의 책에 줄까지 쳐가면서 봤는데, 그때 책에 밑 줄 치던 제 자신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불 속에서 하이킥을 날리곤 합니다.

 

그래도 인생의 모든 일에는 다 의미가 있다고 지나고 보면 그래도 ‘우상이 허상’인 줄 깨닫고 난 후 저는 남루한 차림에, 사회적 기준에서 성공과 멀어진 사람이라도 저마다 사람 안에는 사람이기에 아름다운 ‘무엇’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누구의 말이라도 귀담아 듣는 그런 마음의 귀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고시의 메카라는 신림동을 오가며 사법시험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는 실패했고, 그 후로 취업준비생을 빙자한 백수로 3~4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대중문학부터 시작해 조정래, 박경리, 최명희 등 대문호의 작품들을 모조리 섭렵했고, 김형경, 은희경, 신경숙 외 무협지, 판타지, 로맨스 소설 등 문학과 함께 20대 중반을 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맨스 소설도 집필해서 e-book으로 출간한 경력도 있습니다. 글 잘 쓰는 법에 대해 나름 치열하게 고민했고, 보이지 않는 사회의 이면을 보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덧 정신 차려 보니 20대도 끝자락. 제 자신을 보니 긍정적이고 사랑스러운 감정은커녕 밝은 빛조차 찾아 볼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 나이 20대 중반에 저희 아버지가 환갑이셨는데, 별 볼 일 없는 비정규직 학원 선생님으로 아버지 환갑잔치도 챙겨드리지 못하는 제 자신에 환멸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포감이 물 밀 듯 밀려들었습니다. 먹고 사는 데 대한 공포, 벌어 놓은 돈 없이, 결혼도 못한 채 별 볼 일 없는 40대 노처녀가 되는 공포, 추레하게 늙어가는 것에 대한 공포. 이 모든 근원은 열패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더 적나라하게 모든 해결책은 돈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 때 사지 멀쩡해서 자기 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변명을 할 자격이 없다는 아픈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찾아 나선 길이 월급쟁이였습니다. 월급쟁이…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고, 매 순간 순간 위협을 받는 길이 바로 월급쟁이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알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누구나 가야 하는 길이며, 그 길을 가기 위해 인간은 때때로 비천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월급쟁이로서 첫 출발이 바로 기자였습니다. 한 인터넷 종합일간지의 국회 출입기자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곳에서 월급을 받던 6개월 여섯 번의 월급을 받는 동안 때때로 고민했고, 슬펐고,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월급으로 이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비천함이 만회가 되더군요. 월급으로도 그 비천함을 겪어 내기 어려웠을 땐 그곳에서 월급쟁이를 그만뒀고 또 다른 신문사로 옮겼습니다.

 

그곳에서는 월급쟁이의 길이 위협당해 그만두고 다른 곳의 계약직 월급쟁이로 길을 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쳐 온 곳이 OOOO, OO뉴스, OO문화사 웹매거진 ㈜OOOOO의 월급쟁이였고, 공식 명함의 직책은 기자였습니다.

 

OOOO와 OO뉴스에서는 국회 출입 기자로 살며 월급을 받았고, OOOOO에서는 W기업의 웹홍보물과 사보 제작을 하는 기자로 1년 넘게 월급을 받았습니다.

 

이후 계약기간이 끝나고 월급을 더 받을 수 없게 되자 안정적인 월급쟁이가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NGO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서울시 프로젝트를 맡았고, 월간지 소비자리포트를 발행하며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제 본분은 NGO활동가였지만 저는 단 한 번도 NGO활동가라는 마음가짐을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 그냥 월급쟁이였습니다. 월급이 있었기에 숨 막히는 세월을 견뎠고, 부당함, 오해, 불통의 시간을 인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몇 곳에서 내 시간과 노동력을 제공하며 그 대가로 월급을 받았지만 그래도 덜 비천하고, 행복하게 비참함을 견딜 수 있었던 일이 현장 기자였다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때 정당에서 일하던 학교 선배의 추천으로 지역인터넷뉴스 협회에서 창간한 지역인터넷 뉴스의 중앙 뉴스 공급을 담당하는 포털사이트 ‘R’로 자리를 옮겨 월급쟁이의 길을 이어갔습니다. 2012년의 시작과 함께 모두 8번의 월급을 받았으나, 이곳은 여느 인터넷 매체의 공통적인 문제점 자생력에 불가 판정을 받으면서 제 월급을 줄 수 없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사이트 문을 닫는다는 사주의 통보 아래 저는 또 다시 구직 시장에 내몰리게 됐습니다.

 

바로 조세전문지인 OO신문에 입사 지원합니다. 좋은 인연으로 찾아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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