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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동안 이런 경기를 보고 싶었다. 피파 세계랭킹 1위를 잡았다. 자격 있는 승리다. 몰락은 아름다운 몰락일 때 기억 속에 미래로 남을 수 있다. 16강은 좌절되었지만 앞으로 한국 축구팬들에게 독일과의 마지막 결전은 오래도록 회자될 것이다. 

 

멕시코는 작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독일에 1:4로 능욕당한 후 독일에 대한 복수를 천명해왔다. 복수는 성공했다. 아시다시피 멕시코는 F조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독일을 상대로 1:0의 위대한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멕시코는 독일전만을 위해 준비된 팀이었다. 물론 이는 이해할 수 있다. 멕시코의 입장에서는, 독일을 잡으면 복수 뿐 아니라 16강 진출의 꿈도 이루는 그림이었기 때문에. 

 

축구에 공짜는 없다. 우리에게는 얄미운 무기력한 3차전은 멕시코의 권리다. 16강 진출을 사실상 확정해놓고 치른 무책임한 3차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멕시코는 승점 6점을 스스로 쟁취했다. 자기가 전리품으로 얻은 승점을 어떻게 쓸지는 전사의 맘이다. 물론 멕시코는 결과적으로 한국이 독일을 완파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지만. 

 

멕시코가 독일을 잡으면서 F조의 난리통은 시작되었다. 이 조의 실상은 뜨거움을 넘어 참혹할 정도다. 결코 농담이 아닌, 아니 사실 그대로인 SNS 조크를 가져와 보겠다. 

 

지옥의 축구리그 F조 라인업

1위 : 세계 1위를 이긴 두 팀을 이긴 팀

2위 : 세계 1위를 이긴 팀

3위 : 세계 1위를 이긴 팀

4위 : 세계 1위

 

대한민국은 어떻게 세계 1위를 이긴 팀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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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웨덴전이 기록적인 졸전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 1위를 차지한 스웨덴은 1차전에서 형편없었다. 한국과 스웨덴은 필드 위에서 형편없음을 경쟁했다. 중요한 건 이유다. PK는 장면 자체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시합 흐름상 억울한 판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이 시합에서 잘한 게 되지는 않는다. 

 

스웨덴전은 최근 수년간 A매치에서 한국 대표팀의 문제점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드러난 경기였다. 수비, 공격, 그리고 중원이다. 만약 사진을 수십 장 찍어서, 사진만을 가지고 경기를 평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PK에 억울해해야 한다. 스틸 컷으로 이미지화된 각각의 장면에서 우리 선수들의 위치는 훌륭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장면만으로 따지면, 공격은 훌륭하다. 배후에서 공을 차면 손흥민이 달려간다. 

수비도 좋다. 수비수들이 최적의 자리를 지키고 상대를 지우기 위해 기다린다.

중원도 마찬가지다. 볼을 안정적으로 소유한다. 다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공을 돌리며 위험을 감수하는 빌드 업을 회피하는 게 문제지만, 이런 건 고정된 사진으로 감지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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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왜 우리는 이 시합을 보며 넌더리를 냈는가. 현대축구는 연속된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기사에 썼지만 현대축구에서 90분의 대부분은 공격과 수비의 좌절을 견디는 순간들로 채워진다. 왜 좌절하는가? 상대가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상대는 반드시 내가 가장 괴로운 방식으로 기동한다. 

 

축구란 기본적으로 상대를 철전지 원수로 설정하고, 적에게 고통을 선사하기 위해 뛰는 스포츠다. 고통을 강요하는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은 고통을 자처하는 것이다. 현대축구는 활동량과 적극성을 통해 상대 팀 선수들도 그만큼 움직이고, 그만큼 지칠 것을 강요하는 스포츠로 발달했다. 움직임으로 움직임을 강요하면 두 가지 이점이 생긴다. 첫째, 주도권을 쥔다. 둘째, 그러므로 약팀이 강팀을 잡을 수 있다. 

 

현대축구의 본질은 고통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팀을 위해 개인의 고통을 갈아 넣는 필드 위의 군국주의다. 이 표현을 쓴 이유는 뒷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내용을 다잡기 위해서다. 축구는 집단적 폭력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존재한다. 인류는 봉건적인 집단성을 졸업하지 못했다. 다만 적당한 곳에 배출하는 방법은 합의했다. 그 중 하나가 축구장이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라면, 빠따와 기합으로 얼룩진 군국주의적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배웠다. 완화하고 조정할 일이지, 모두 없애고 개인주의를 이식할 일은 아니다. 정신력과 희생정신을 강요하는 거냐고? 보수주의자냐고? 아니, 축구에 대해서는 축구주의자일 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사회이며 축구라는 스포츠 종목을 업으로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태극마크도 죄를 지어서 벌로 가슴에 다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축구를 선택한 자유시민은 다름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해 축구장에서만큼은 개인보다 집단을 중요시하는 고대의 야만인이 될 직업윤리를 지닌다. 국가대표라면,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에 동의한 순간 개인성을 버려야 하는 업을 진다. 

 

축구의 카르마는 자기 자신(혹은 부모와 선생이라는 개인적인 관계의 인간) 외에 그 누구도 대신 지어주지 않는다. 고유한 시민권에 의해 스스로 축구를 선택한 순간 그는 개인을 집단에 매몰하는 암묵적 룰에 사인한 것이다. 이것이 축구의 본질이다. 축구는 권리는 없고 책임만 있는 스포츠다. 그러기에 고통은 의무다. 한국 대표팀에는 한때 축구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한 감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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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표팀 감독 중 가장 선수들의 군기를 심하게 잡은 이는 누구일까? 거스 히딩크다. 

 

선후배끼리 훈련장에서 반말을 쓰게 해 필드 위에서는 누구도 상하고하가 없으며 팀을 위해 헌신하는 개미들뿐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킨 감독은? 히딩크다. 

 

네덜란드 현지에서도 스타플레이어와 유망주의 기를 꺾기로 유명한 사람은? 역시 히딩크다. 

 

안정환이 ‘혼자서 건방지게’ 긴 머리에 스포츠카를 몰고 등장했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찍어 누르는 걸로도 모자라 훈련장에서 고개도 똑바로 못 들게 한 사람은? 예상했겠지만 거스 히딩크다. 

 

히딩크는 노답 꼰대였단 말인가? 아니다. 그는 축구를 잘 이해한 인물이었다. 축구는 그런 스포츠다. 히딩크의 체력 증진 솔루션, 일명 ‘파워 프로그램’은 과정도 결과도 고통으로 점철되어있다. 첫째 훈련 과정이 고통스럽다. 둘째 훈려보다 더 악다구니를 부려야 하는 시합이 고통스럽다. 마지막으로 상대 선수들이 고통스럽다. 2002년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은 고통으로 고통을 강요해 성공한 결정적인 사례다. 안정환이 골든골을 향해 몸을 띄울 때, 지친 이탈리아 수비수는 함께 뜰 수 없었다. 

 

이게 싫으면 축구를 안 하면 된다.

 

축구를 선택한 이상 고통에 군소리를 할 자격은 없다.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선택을 두고 양 손에 떡을 쥘 수는 없다. 축구라는 떡을 쥐고 국가에 봉사하려면 그만큼의 피땀을 바쳐야 한다는 게 히딩크의 애티튜드다. 

 

 

3

 

그렇다면 고통은 어떻게 감수하는가. 

 

직업의 본질은 책임이다. 일 자체야 일용직 막노동이 그 어떤 일보다 힘들다. 보고서를 만드는 사람보다 서명란에 사인을 갈기는 사람이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 일정수준 이상의 임금은 책임을 지기에 발생한다. 

 

축구선수라면 적어도 90분 동안은 무한책임을 요구받는다. 현대축구는 골키퍼를 제외한 10명의 필드 플레이어를 하나의 유기체로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실점과 패배는 모두의 책임이 된다. 현대축구의 기본 틀인 토털풋볼은 그러잖아도 집단주의적인 축구를 숫제 파시즘 스포츠로 만들어버렸다. 다시 말하지만 이게 싫으면 축구를 안 하면 된다. 

 

회사생활은 자기 책임은 스스로 지고 아닌 것은 남에게 적당히 넘기는 정치가 되었다. 축구는 아니다. 축구에서 책임은 직업 스킬이 아니라 업 그 자체다. 그러하기에 가장 축구다운 축구는 고통이 눈에 보이는 경기다. 

 

졸전 중의 졸전이었던 스웨덴전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공격, 수비, 중원은 직장인의 인사이동과 같았다.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퇴근한다. 시도가 좌절되었을 때 보이는 건 수습과 재도전이 아니라 그냥 좌절이었다. 

 

대표팀의 고질병으로 불린 ‘자동문 수비’는 책임의 부재에 기인한다. 수비상황이 발생한 후 애초에 세팅된 자리를 찾아가 자신의 수비 포지션을 지키는 게 직장생활의 전부라면, 적 공격진은 한 번만 수비라인을 뚫으면 뒷 공간을 마음껏 유린하게 된다. 이미 자기 일은 다 했으니까. 누구도 직장이 아닌 업으로 접근하지 않았던 거다. 그들은 이미 퇴근했다. 결과는? 부도다. 대한민국은 실점한다. 

 

멕시코전은 이기면 좋고 져도 어쩔 수 없는 경기였다. 적어도 선수들에게 지워진 의무의 무게는 스웨덴전만하지 않았다. 그런데 독일을 잡은 멕시코를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책임이 존재하지만 전보다는 덜해진 경기에서 더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이 미스터리는 큰 책임을 안 지려는 부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 결과라는 답에 직선으로 향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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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수의 경우를 보자. 16강행에 대못을 박은 두 번의 어처구니없는 태클 플레이는 대체 무엇인가? 안정환이 해설을 하며 지적했듯 ‘책임 회피’다. 다시 말해 ‘나는 몸을 날린 태클씩이나 했으니 이후의 두려운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제해 달라’는 어필이다. 이영표는 세상에 저런 플레이는 없다며, 대표팀 아니 프로를 떠나 초등학교 축구부에서도 비상식적인 수비 동작이라고 했다. 

 

축구가 업이 아니고 직장생활이며, 90분이 운명이 아니라 출근과 퇴근 사이의 시간이라면 장현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일을 떠넘겼다. 다른 부서에. 나는 이 두 번의 사건이 장현수 개인의 인격이나 실력의 발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장현수가 아니라 다른 선수가 있었다면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만큼의, 어떤 심리적 문제를 대표팀 선수들이 공유했다고 믿는다. 장현수만 독보적으로 무책임한 인물일 리 없다고 믿는다. 애초에 한 사람을 폄하하는 것으로 분석을 끝낼 일이 아니다. 나는 스웨덴전에서 밥먹듯 고통과 책임을 회피한 대표팀의 심리, 멕시코전에서는 결정적인 장면에서만 도망가려는 단계로 나아졌다고 본다. 

 

 

4

 

세계랭킹 1위 독일을 맞아, 비로소 어떤 참혹한 결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대표팀의 저력은 전 세계 앞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냉정히 말해 신태용 감독의 세 번째 ‘트릭’은 별로였다. 손흥민과 구자철 투톱이라지만, 사실상 구자철에게는 필요할 때의 공 배달만 맡겼을 뿐 손흥민에게 모든 공격을 떠넘긴 형국이었다. 

 

‘흥민! 공이 네 근처로 가면 똑똑한 네가 알아서 해결해줘.’

 

이것은 작전도 이념도 아니다. 그냥 막연한 기대에 불과하며, 실제로 손흥민의 고독한 고군분투는 경기 중반까지 별다른 빛을 발하지 못했다. 사실상 4-3-2-1 혹은 4-5-1 포지션은 독일에게 중원을 내주겠다는 뜻인지 경합하겠다는 뜻인지 불분명했다. 역습을 노리겠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어떻게? 당구 시합으로 치면 이런 경우다. 알다마로 바로 칠까, 아니면 벽에 한 번 걸어 칠까? 잘 모르겠는데 각도 차이는 근소해 보인다. 이럴 때 둘 중에 하나는 걸리겠지 싶어서 중간 각도로 적당히 치면? 반드시 벽과 공 사이로 샌다. 

 

신태용 감독은 ‘점유율은 독일에 내 주겠지만...’이라고 얼버무렸다. 내 주는 게 작전이라는 건가, 아니면 애를 써도 실력 있는 독일이 중원을 장악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뜻인가? 손흥민 혼자 전방에 고립시키는 그림이 어색해 구자철을 투톱을 핑계로 처진 스트라이커 삼은 건 알겠다. 하지만 구자철이 사람이지, 무슨 만능열쇠란 말인가.

 

신태용의 라인업은 ‘어떻게든 되겠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공격을 손흥민 개인의 재능에 떠넘기는 노골적인 라인업은 선수들이 시합에 임하는 전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문선민은 전반에 한 번, 후반에 두 번 총 세 번의 좋은 기회를 맞았지만 바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손흥민에게 떠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장현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게 대표팀을 덮어씌운 직장인 마인드라고 생각하지, 그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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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의 어설픔을 해결한 건 필드 위의 선수들이었다. 져도 어쩔 수 없다는 자유로움과 마지막 게임이라는 결기, 16강을 향한 실낱같은 가능성이 주는 절박함이 어우러져 드디어 6년 간 실종되었던 ‘고통의 연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공과 사람(적 선수)이 올 만한 곳을 예측해 서 있는 것, 한 번의 동작 시퀀스를 선보이는 것은 직장생활이다.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달려들고 또 달려드는 것이 축구의 업이다. 선수 배치와 포지션 점유 이상의 움직임이다. 현대축구는 ‘이상의 움직임’에서 완성된다. (현대축구 이전의 기준에서) 필요 이상의 움직임이 발생해 서로 연계하면 유기적 움직임이이 되고, 이것이 계속되면 팀은 하나의 유기체로 집합한다. 

 

지난 기사에 썼지만 유기체는 시합 중에 스스로 진화한다. 

 

독일은 20분만에 한국의 전술과 욕망을 파악했다. 수비 뒷 공간을 노리는 침투와 횡 패스는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후반전이 되자 우리 선수들은 독일의 진화한 공격을 진화한 수비로 봉쇄했다. 조현우의 선방은 물론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수비가 독일에 맞서 진화를 거듭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후반전 독일의 시도를 번번이 좌절시키고 끝내 절망을 안긴 한국 팀의 모습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대표팀이었다. 사람은 물고 늘어지고 공에 대한 집중력은 갈수록 높아졌다. 책임을 공유함으로서 성공해가는 경기에 비로소 애정을 느끼지 않고는 불가능한 장면이다. 

 

집중력은 수비에서부터 벼려졌다. 경기 중후반부터 이영표가 감탄을 쏟아내며 감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수비수 출신이다. 반면 안정환은 공격수 출신이기 때문에 좀 더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격은 경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손흥민 개인에게만 의존하는 무책임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드컵 세 경기 째, 그것도 전반을 보내고 나서야 수비다운 수비의 색을 찾은 한국팀에서 결국 첫 골을 넣은 이는 수비수 김영권이었다.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아직 0:0이 한창일 때 찾아왔다. 60분이 넘어가자 약속이나 한 듯 우리 선수들의 몸동작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몸값 총액 1조 1천억원 이상, 세계랭킹 1위 독일 선수들의 움직임도 슬로우 모션의 저주에 걸렸다. 이게 축구다. 우리의 고통은 상대의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지옥은 함께 가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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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번 월드컵은 계시적이다. 

 

최저점의 구렁텅이와 반짝이는 희망을 함께 보여주었다. 16강 좌절은 다른 경기장의 결과와 만난 결과다. 우리 대표팀은 위대한 경기를 펼쳤다. 우리는 우리의 시합만 이야기하면 된다. 필드 안에서 벌어진 일은 필드 안의 잔딧잎에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홍명보호의 저주에서 시작된 한국 대표팀의 전락은 스웨덴전에서 끝없는 미궁의 어둠을 보여주고는, 불과 두 경기 만에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경기를 마지막으로 다음의 영광을 예고했다. 아쉽고 분하지만 이렇게 끝난 것도 기회다. 

 

축구는 감정적인 스포츠다. 팬들은 마지막 경기에 감동을 받았고, 16강 탈락이 주는 아픔의 책임은 멕시코와 나눠갖게 되었다. 이제 선수들에 대한 비난은 누그러질 것이다. 축구는 태생적으로 ‘즐겁게 뛰었으면 됐다’는 덕담이 통하지 않는 스포츠다.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바닥에서 치고 올라온 승부근성은 선수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낙인처럼 새겼을 것이다. 독일전에 대한 칭찬은, 바로 자신들이 몸으로 쟁취한 전리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시합을 원했다. 

이제 한국 대표팀은 다시 시작하면 된다. 

 

처음부터 이렇게 잘했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위대한 시합은 그 시합만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경기는 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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