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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축구에는 크게 두 가지로 후려칠 수 있는 흐름이 있다. 첫째는 볼 점유를 중시하고, 짧은 패스를 이어가며, 완벽하고 아름다운 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크루이프이즘(Cruyffsm)이다. 두 번째는 강하게 압박하고, 선이 굵은 축구를 하며, 아름다운 골보다 효율적인 골을 시도하는 사키이즘(Sacchism)이 있다. 08-09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싸가 퍼거슨의 유나이티드를 찍어 누르는 경기력으로 크루이프이즘의 세계적 트렌드를 이끌었으며, 바로 그 다음 해 무리뉴의 인테르는 전형적인 사카이즘 축구로 이에 대항했다. 전 세계의 난다 긴다 하는 감독들은 모두 각자의 성향대로 두 가지의 철학을 버무린 축구를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 축구에는 절대적인 이념이 있다. 2002년, 히딩크 사단이 보여줬던 축구가 그것이다. 하지만 한국 축구는 언제나 세계적인 트렌드에서 뒤쳐졌었다. 아드보카트의 타겟형 스트라이커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식 축구, 허정무의 매우 고전적인 4-4-2 축구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으나 축구 선진국과의 여실한 차이를 드러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2010년 허정무의 뒤를 이어 조광래를 꺼내 든다. 이른바, 크루이프이즘의 구현을 목표로 한 '만화 축구'의 개시였다. 유의미한 시도였고 꽤 그럴싸했으나, 이청용의 장기 부상으로 인해 만화 축구는 완성되지 못한 채 무너졌다. 하기 싫다는 최강희를 억지로 대려온 잠깐의 기간을 제외하고 한국 축구는 조광래 - 홍명보 - 슈틸리케로 이어지는, 스페인식 패스축구의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스페인과의 치룬 여러 차례의 평가전, 스페인에서 모셔온 역전의 용사들. 지난 8년간 시도했던 감독 교체의 역사는 선진 축구 모델을 세우기 위한 한국 축구 노력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2017년 6월, 슈틸리케의 후임으로 신태용이 선임됐다. 월드컵을 1년 남짓 남겨놓은 때였으며, 그 과정에서 히딩크 선임 논란이 붉어졌다. 나는 아직도 히딩크 선임 논란의 자세한 진상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신태용은 첫 경기를 하기도 전에 ‘축협의 따까리’ 소리를 들어야 했다. 감독으로서의 권위는 그렇게 땅에 떨어졌고, 월드컵은 간신히 ‘진출 당했다.’ 이미 절반 이상의 국민이 등을 돌린 그에게 콜롬비아 평가전의 달콤한 승리의 과실조차 돌아가지 않았다. 그 몫은 황금의 땅 엘도라도, 스페인에서 모셔온 코치님들에게 돌아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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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호의 월드컵 준비 과정은 놀랍도록 홍명보호와 닮았다. 감독 선임 과정의 혼란, 연전연패의 평가전, 엉망의 경기력, 매일 같이 도마 위에 오르는 감독의 인터뷰 등. 그러나 신태용호가 홍명보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선수 선발에 임하는 자세였다. 홍명보는 이미 머릿속에 검증된 베스트 일레븐이 있었으니, 런던 올림픽에서 증명된 ‘명보의 아이들’이었다. 이들은 홍명보와 연령별 대표팀에서부터 함께 해 오며 발을 맞췄고, 그래서 그 핵심 자원인 박주영이 몇 년의 시즌을 날려버렸음에도 의리로 발탁할 수밖에 없었다. 기성용, 구자철, 이청용 등의 선수 역시도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음에도 매 경기 선발로 써야만 했다. 물론 홍명보도 국내파로만 평가전을 치른 적 있으나, 해외파를 뽑기 위한 추진력을 얻는 경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신태용은 달랐다. 케이리그, 연령별 대표팀, 성인대표팀 임시감독 등, ‘난 놈’이란 캐릭터만큼이나 다사다난했던 그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워진 홍명보와는 달리, 한국의 선수풀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임기응변 전략이 있었다. 신태용이 진지하게 테스트한 선수들 가운데에는 송주훈, 김동준, 김민혁, 김태환, 윤일록, 이승기, 김성준, 진성욱, 이창민, 이명주, 손준호, 김승대, 이찬동 등 케이리그 팬이 아니라면 그 이름이 낯선 선수들도 있었다. 그래서 권창훈, 김진수, 김민재, 염기훈, 이근호, 이청용 등 국대의 붙박이였거나 기대되는 유망주가 차례로 나가리됐음에도 그에 맞춰 수정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베스트일레븐만 줄기차게 돌리던 조광래, 홍명보, 슈틸리케호에 쏟아진 비판에 대한 대답이었다.

 

 

3.

 

국대 감독 이전까지의 신태용은 매우 공격적인 축구로 명성이 높았다. 빠른 템포로 몰아치는 공격 축구는 사이다 같았지만, 결정짓지 못할 경우 바로 무너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u20, u23 연령별 대표팀에서 경기는 시원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가뜩이나 수비 불안을 달고 사는 성인 대표팀에 그는 맞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가 u23 올림픽 대표팀을 갑자기 수습하러 가기 전, 그러니까 홍명보가 짤리고 임시 감독을 맡았던 두 경기를 복기해보자. 베네수엘라 전에선 “내가 감독이었으면 알제리전에서 이렇게 했을 것”이라며 패기로운 인터뷰를 날리더니, 우루과이 전에선 그동안 한국축구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전술적으로 매우 수준 높은 축구를 보여주었다. 3-4-3 포메이션, 홍명보처럼 리베로 롤을 부여한 기성용, 좌우 윙백의 높은 수비 가담, 강한 압박, 선이 굵은 축구까지. 오랫동안 사라졌던, 그러나 절대적인 이념이었던 2002년 히딩크호의 모습이었다.

 

기회가 날 때마다 성인대표팀 감독 자리에 야망을 드러내던 그의 우루과이전은, 슈틸리케 경질 이후 히딩크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감독으로 앉히게 된 제1의 근거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것을 구현하려 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쓰리백은 실패했다. 한국의 풀백 자원은 현재, 씨가 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참 어린 연령별 대표팀도 사정은 똑같다. 결국 쓰리백은 실패하고 4-4-2의 콤팩트 축구를 선택했으나, 신태용의 4-4-2는 이전에 우리가 보던 무색무취 4-4-2와는 달랐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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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구상했던 4-4-2는 사실 멕시코전에서 완성됐다. 독일전과의 차이점은 황희찬이 단독 찬스에서 어처구니없는 백힐 패스를 날렸던 것에서 보듯, 결정력의 차이였다. 결정력의 차이는 곧 승패의 차이로 이어졌고, 안타깝게도 독일전에서야 빛을 보고야 말았다.

 

독일전을 잠시 디벼보겠다. 얼핏 보면 독일전에 임하는 신태용의 자세는 다음과 같다.

 

 “흥민아. 너만 믿는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이것은 폴란드가 이번 대회를 준비하는 전략이었다. “레반도프스키야. 오직 너만 믿는다.” 그리고 폴란드는 역습 과정에서 이렇다 할 특색을 보여주지 못한 채 시드 1위의 자존심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다. 한국의 센터백을 압도적인 차이로 찍어 눌렀던 레반도프스키의 뚝배기에 공은 오지 않았다.

 

신태용은 아예 전반을 버렸다. 전반전 내내 양 풀백은 하프라인을 잘 넘지 않았고, ‘손흥민을 윙어로 쓴다’는 비판이 무색하게 양쪽 윙어는 수비에 전념했다. 손흥민 밑에 구자철을 놓은 것은 그의 볼 키핑 능력과 침투 능력을 어느 정도 기대한 것이긴 했지만, 구자철은 전성기 때의 활동량과 스피드가 이미 사라졌다. 스웨덴전에서 해설자들이 지적했듯, 역습 과정에서 빠르게 손흥민을 따라가 줘야 할 중원 라인은 박스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마치 그들은 뒷 공간에 금송아지를 모셔놓은 사람처럼 수비 복귀에 전념을 다했다.

 

이런 경기에서 일반적인 독일이었다면, 무난히 가패삼기(가둬놓고 패다 보면 삼대영은 기본)각이 나왔을 것이다. 실제로 후반 초반, 노이어는 또 하프라인까지 올라오며 잠시동안 가패삼기각을 만들기도 했다. 신태용이 공격진에게 기대한 것은 독일의 최종 수비라인이 한국 진영을 포위하는 상황을 저지하기 위한 것에 그쳤고, 손흥민에게 끝없이 떨어지는 롱볼과 이재성-구자철이 2:1 패스로 노이어 앞까지 진출했던 것은 일정 부분 효과를 낳았다.

 

신태용이 구상한 그림, 즉 ‘전반은 일단 무실점으로 막고, 후반에 뭔가를 만들자.’는 전략은 축구판에서 흔히 쓰이는 전략이다. 독일 상대로 전반의 무실점만 해도 엄청나게 어려운 성과였다. 이를 위해선 독일의 주요 패턴 전략을 파악하고 이에 대응한 수비 전술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이 유럽 예선을 치르며 보여준 공격 패턴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키미히를 비롯한 발 빠른 드리블 자원이 박스 안 깊숙한 곳이나 엔드라인까지 볼을 운반하고, 이를 박스 안팎의 선수에게 전달해 슈팅을 넣는다. ‘축구 교수님’ 토니 크로스가 독일에서 갖는 존재감은 그래서 막중했다. 두 번째는, 마리오 고메즈를 필두로 한 뚝배기 축구였다. 잘게 쪼개며 중원을 공략하는 세밀한 패턴이나 화려한 개인기로 수비를 벗겨내는 패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신태용의 두 줄 수비라인은 이 중에서 첫 번째 패턴, 즉 박스 안에 있는 선수에게 공이 전달되지 않도록 무던히 애썼다. 양 윙어가 공격을 포기하면서까지 풀백의 커버를 들어오는 모습에서, 이런 상황에 대한 훈련이 많이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문선민은 키미히를 지웠다. 공격수가 수비수를 전담 마크했다는 것이 한국과 독일의 전력차가 드러나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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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이 짜 온 트릭은 70분부터 주효했다. 독일은 공격수를 투입하며 밸런스를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신태용호의 미드필더 라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대형을 갖춰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웅크리고 있다가 한 방!'. 이 전술은 말처럼 구현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상황에서, 어떤 선수에게, 어떻게 패스하고 달릴 것인지 사전에 면밀히 계획되어 있지 않으면 순전히 개인 능력에 의지하다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전술이었다. 폴란드가 그랬다. 하지만 독일전에서의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전반전에선 의도적으로 오른쪽을 공략하던 손흥민은, 후반전이 되자 키미히의 뒷 공간인 왼쪽을 집중적으로 털었다. 문선민은 의도적으로 손흥민에게 패스하려고 했으며, 이재성과 주세종은 왼쪽 깊숙이 공을 때려 넣기 위해 노력했고, 장현수는 의외로 패스하지 않고 드리블을 쳤다. 이 과정에서 역습 속도의 첨병이 되어야 할 황희찬은 신태용의 몇 차례 지시에도 부족한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가차 없이 교체당했다.

 

한국이 보여준 몇 차례의 역습 장면에서 전개된 상황 모두가 신태용의 계략 안에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타이밍에, 필드 위에 있던 선수들에게, 어떤 스타일의 역습을 제시한 것은 분명히 신태용의 생각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면, 그것이 지난 과거 베네수엘라, 우루과이, 콜롬비아, 멕시코전 등, 역습이 잘 된 경기에서 나왔던 고정적인 패턴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신태용이 준비한 공격 패턴은 이런 형태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애초에 게임을 우리가 주도하는 상황 자체를 전제하지 않았다. 또한 권창훈의 부상으로 득점 패턴의 많은 것들이 상실됐다. 세트피스를 12개나 준비했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인 스쿼드에서 그나마 득점의 가능성을 뽑아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지금까지의 경기에서 보여준 신태용의 4-4-2 전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비를 기반으로 하되, 강하게 압박하고, 거칠게 도전하며, 한 순간에 스피드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역습 축구’

 

받아들일 수 없는 독자가 많겠지만, 이러한 형태의 축구가 바로 한국 축구의 절대적인 이념인 ‘히딩크식 축구‘로의 복귀라고 하겠다. 다른 한편으론 한국이 그토록 염원해왔던 스페인식 패스축구와 결별을 고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지난 2014년 홍명보호와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신태용의 한 수였으며, 이 땅에는 없었던 축구철학의 교과서로 쓰일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

 

 

5. 

 

신태용에겐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의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선수교체는 이미 케이리그 시절부터 호불호가 갈렸다. 멕시코전의 선수교체 운영은 실망스러운 점이 많았다. 교체카드 석 장을 모두 ‘이승우 일병 구하기’에 투입했지만, 오소리오 감독의 대응으로 승부처였던 이승우는 봉쇄당하고, 동시에 왼쪽 공격라인은 무너졌다. 독일전에서 황희찬이 교체 10분 만에 다시 교체되는 장면도 매우 일반적이진 않은 상황이지만, 신태용은 종종 그래왔다.

 

패기로운 인터뷰 스타일도 그렇다. “나는 난 놈이다.”, “케이리그 mvp는 j리그에 가지 않는다.” 등, 잘 나갈 땐 한없이 멋있지만, 안 풀릴 땐 졸렬해 보이는 어법도 이번 월드컵에서 숱한 문제를 낳았다. 축구계에는 ‘이긴 무리뉴’라는 기믹이 있다. 이겼을 때의 무리뉴는 대현자의 말만 남기지만, 졌을 때의 무리뉴는 졸렬 그 자체라는 의미다. 신태용 같이 패기로운 인터뷰 스킬을 가진 이는 언제나 그러한 장단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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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태용이 전술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그는 다양한 전술을 써서 비판받는 쪽이었으며, 세계 축구의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시도에서 케이리그 어느 감독들보다 앞서 있다. 그럴 확률은 매우 낮지만, 그가 아시안컵을 지휘한다면, 사키이즘의 베이스 위에 또 다른 전술적 모습을 그려갈 것이다.

 

또 하나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신태용이 축협의 적폐‘라는 주장이나, 이번 국대에서 연세대 라인 등으로 다시 인맥축구가 가동됐다는 주장이다. 먼저, 신태용은 축협의 마당쇠처럼 굴려졌지, 무리 안의 일부가 될 수 없었다. 백혈병을 얻어 고 이광종 감독이 갑자기 지휘봉을 내려놔야 했을 때, 월드컵이 1년 남짓 남은 상황에서 누구나 홍명보호의 반복을 떠올렸을 때, 지휘봉을 잡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적폐였다면, 더 좋은 타이밍에, 더 그럴싸하게, 더 안전하게 그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신태용은 언제나 험지에 투입됐고, 방패처럼 굴려졌다.

 

선수선발의 공정성을 지적하는 주장도 일견 이해는 간다. 일찍이 윤성효 감독은 수원 삼성에서 자신의 전 직장이었던 숭실대 출신 선수들을 입단할 실력이 아닌데도 대거 대려왔던 전력이 있다. 또한 조광래호가 한참 하락세를 걸을 때, 이를 명분으로 기술위가 선수 선발에 개입하자 언론에 대차게 폭로한 전례도 있다. 그러나 만약 선수선발의 공정함을 문제시 삼는다면 그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자신의 제자였던 윤영선, 홍철을 발탁한 것이나, 시즌 초반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전북의 수비라인을 그대로 들고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는 아무도 불공정하다고 욕하지 않았고, 장현수나 김민우가 연세대라서 대려왔다고 한다. 심지어 김민우는 연세대에서 쫓겨났고, 신태용은 영남대인데!

 

장현수에 대해 실망하는 것도 이해한다. 윤영선을 앞선 경기에 투입하면 더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점도 동의한다. 하지만 유력한 넘버 원 김승규 대신 조현우를 기용하고, 인천 팬들도 의아하게 여겼던 문선민을 발탁한 것도 신태용이다. 그 밖의 세트피스를 12개나 준비한 엉성함, 크고 작은 실수들은 그 역시 성장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6.

 

월드컵은 증명하는 곳이라는 얘기엔 동의한다. 신태용은 완벽히 증명해내진 못했다. 신태용 개인의 문제도 있고, 선수들의 준비나 부상 문제도 있었으며, 수차례의 감독 교체로 계속 0에서 시작해 0으로 돌아온, 즉 성장하지 못했던 한국 축구의 문제점도 있다. 증명하려 해도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부족했다. 쌓인 게 있어야 증명할 게 있지 않겠나. 현실과는 맞지 않는 철학을 학원에서 주입식으로 배워온 8년의 시간은 런던 세대의 군 면제만을 얻고 무위에 그쳐오지 않았나.

 

신태용이 진정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저 먼 스페인에서 찾아 헤맸으나 우리와는 맞지 않았던 크루이프이즘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히딩크식 축구가 접목된 사키이즘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는 것에 있다. 이란 대표팀이 두 번의 월드컵에서 선명한 족적을 남긴 까닭은 2011년부터 케이로스가 주구장창 ‘이멤버리멤버’로 같은 전술을 시도해 왔기 때문이다. 일본 대표팀이 한 달 전에 감독을 교체했음에도 선전하는 까닭은 수십 년 간 일본이 쌓아온 크루이프이즘을 잘 구현해 내던 선수들을 복귀시켜 재시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광야에서 헤메는 동안 그들은 차곡차곡 증명을 위한 풀이를 해 왔다. 우리는 이제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는 시점에 서 있다. 히딩크는 한국에 맞는 철학을 선명히 제시했다. 그러나 2002년의 기적은 단 한 번뿐, 2018년의 우리는 이제야 다시 싹트는 히딩크식 축구의 분투를 보았다.

 

명확한 축구철학과, 수천 명에 이르는 선수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월드컵까지 경험한 감독. 나는 한국 축협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 중에서 이 정도의 스펙을 가진 감독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또한 구해온다 하여도, 다음 월드컵에서 독일을 잡아내거나 16강 진출을 이루기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한국은 또다시 세대교체의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신태용의 단점도 많지만, 이 정도 감독이면 축구의 변방 한국에서 매우 좋은 옵션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개소리를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한 줄 요약하겠다.

 

신태용은

재계약이

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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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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