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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스코틀랜드를 영국에 속한 작은 민족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만, 16세기의 종교개혁 때만 하더라도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였다. 당시 프랑스의 왕세자였던 ‘프란시스’(Crown Prince Francis)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Mary, Queen of Scots)와 결혼하여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유럽에서 가장 막강했던 프랑스와 연을 맺은 스코틀랜드가 상대적으로 높은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한편 스코틀랜드와 사이는 좋지 않으나 국경을 맞대고 있던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zabeth I)의 통치 아래, 구교(로마천주교)에서 신교(개신교)로 전환되는 시기를 맞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신교를 국교로 선택하면서 잉글랜드 국교회(지금의 성공회)도 종교개혁의 급 물살을 타게 된다.

 

헨리 8세가 ‘수장령’(首長令, The Act of Supremacy)을 공표하고 구교와의 분리를 선언했을 땐, 자신의 이혼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지만, 엘리자베스의 신교는 성격이 달랐다. 신앙을 기반으로 영국 국교를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1558년 빈민구휼법을 제정하여 억울하게 토지를 잃은 농민들을 구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스코틀랜드도 ‘존 녹스’(John Knox)라는 걸출한 개혁가를 필두로 해 종교개혁에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국제적인 영향력이 있지만 종교적 입장이 달랐던 프랑스 사이가 좋지 않지만 같은 종교개혁적 입장을 취한 잉글랜드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던 것(프랑스는 전통적인 로마천주교 국가).

 

스코틀랜드 의회는 종교개혁에 손을 들어 주는 의외(?)의 결정을 한다. 세속적인 영향력을 추구하기 보다는, 올바른 신앙적 가치에 무게를 두었던 것이다. 이 점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잉글랜드를 비롯한 다른 유럽국가들의 종교개혁과 어떻게, 또 무엇이 다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의회의 결정으로 1603년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연합왕국의 왕이 되었고, 제임스 1세에 등극했다. 연합왕국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1707년에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의회까지 지금의 연합왕국(United Kingdom)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이들은 300년이 넘게 공동 운명체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의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양보’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코틀랜드는 국제적인 영향력을 등에 업고 독립된 국가로서 발전할 수 있었지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먼저라고 생각해 실리보다는 이념을 강조했다. 스코틀랜드 의회의 선택은 유럽대륙의 주류 종교와 다른 길을 걷게 된 잉글랜드에게 매우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영국이 지금까지 국교를 유지하며 기독교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스코틀랜드의 선택 때문이었다. 두 국가의 연합은 어느 한쪽의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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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영국의 발명품이라고 알려진 대부분의 산업혁명의 결과물 중에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온 것들이 많다. 아담 스미스(국부론), 윌리엄 패티슨(은행), 윌리엄 플레이페어(통계), 존 네이페이(소수점), 제임스 와트(증기엔진), 존 로지 베어드(TV), 알렉산더 벨(전화), 윌리엄 사이밍턴(동력보트), 커크패트릭 맥밀란(자전거), 앤드류 메이클(탈곡기)까지, 대다수의 발명품이 스코틀랜드로부터 시작되었음에도, 영국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다.

 

그럼에도 스코틀랜드는 업적을 과시하지 않는다. 종교개혁도 마찬가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도가 많은 장로교의 기원은 스코틀랜드 교회-잉글랜드의 국교(Church of England)는 ‘성공회’(Anglican)지만  스코틀랜드의 국교(Church of Scotland)는 ‘장로교’(Presbyterian)임-지만, 장로교회의 종교개혁을 말할 때, ‘우리가 원조다’ 라는 식의 주장을 하지 않는다.

 

보통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루터의 ‘종교개혁’(Reformation)을 말하지만, '개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Scottish Reformation)일 지 모른다. ‘개신교’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이익과 주권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지향적 종교개혁의 기틀을 마련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이 주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바로 ‘평등’과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했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 속한 이들(성별의 구분 없이)에 대한 교육'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모두에게 글을 읽고 해석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을 했다. 이렇듯 ‘평등’에 입각한 교육제도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지적인 능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이후에 있을 스코틀랜드의 계몽운동과 문학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개혁정신에는 새로운 자각이 있었다. 특히 무계층적(non-hierarchical), 다시 말해 계층을 상하로 나누지 않는 점이 평등주의에 대한 이념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뿌리깊은 인간의 본능을 자극시켰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후 가장 먼저 시작된 불평등은 여성에 대한 인권탄압이었고, 그 근거로 성경을 삼았던 중세교회를 생각해 보면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에서부터 시작된 평등사상과 민주주의 이념은 이후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독립전쟁의 기본 이념이 되는 사상으로 전개되기에 충분히 혁신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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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민주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나라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는 나라들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대사회에 속한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은 어쩌면 가장 성경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전면적인 정치참여로 대한민국은 변화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 차례다.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평등의 원칙을 고수했던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질문하고 소통하는, 성경을 연구하고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교인들의 태도는 교회를 변화시킬 것이다. 종교개혁 501주년, 중세로 되돌아간 한국교회의 희망은, 변화를 꿈꾸는 우리들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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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