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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승부차기 끝에 8강에 진출했다. 패스는 기가 막힌데 슛을 잘 못하는 것 같은 스페인의 티키타카 무적함대를 격침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옛 소련의 골키퍼, 골키퍼의 전설 레프 야신을 떠올렸다.

 

축구팀 11명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포지션은 없지만 역할을 대신할 수 없는 포지션은 하나다. 골키퍼다. 센터포워드도 급하면 수비수 노릇을 해야 하고 수비수도 공격에 나설 수도 있지만 골키퍼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첫 월드컵인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멕시코와 프랑스의 대결에서 프랑스 골키퍼가 멕시코 선수의 공격을 막다가 강한 킥을 턱에 얻어맞고는 실려 나갔고 당시 골키퍼는 1인 밖에 없었던 바 수비수가 대신 골문을 지킨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

 

그러나 예외는 예외. 골키퍼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포지션임에 분명하다. 골게터만큼이나 중요한 자리이면서도 영광은 골게터의 절반, 부담은 두 배를 가져가는 자리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한국 대표팀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골키퍼가 어느 정도의 위상을 지니는지 절감했을 것이다.

 

고인이 된 분께 누가 되는 것은 미안하지만 그때 오연교 골키퍼가 조금만 더 막아 주었더라도 우리는 1승의 목마름을 2002년까지 가져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골키퍼는 한 번 신뢰를 얻으면 몇 년이고 거의 변동 없이 주전으로 몇 년을 가는, 보수적인(?) 자리이기도 하다. 이운재가 몇 년 동안 골문을 지켰는지 생각해 보시라.

 

한국에는 이운재, 조병득, 변호영, 이세연 등 걸출한 골키퍼들이 많았다. 독일의 올리버 칸, 이탈리아의 디노 조프, 멕시코의 호르헤 캄포스, 콜롬비아의 이기타, 나이지리아의 은코노 등 월드컵 대회마다 화제를 낳는 골키퍼들이 있었다. 골키퍼들의 세계에서 단연 지존으로 꼽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검은 거미 소련의 영웅 레프 야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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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상 검은 유니폼을 입고 출장했고 거미손같이 공을 잡아내 검은 거미라는 별명이 붙었다.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는않고 하나만 들어보자면, 생전에 약 300번의 페널티킥 중에서 약 150번을 막아냈다고 전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성공률 기본 80퍼센트 이상, 인체공학적으로 보면 실축이 아니면 막을 수 없다는 페널티킥을 두 개 중 하나는 거뜬히 잡아냈다는 얘기다.

 

이 전설적인 골키퍼도 출발은 극히 미약했다. 원래 아이스하키 골키퍼였던 그가 축구로 전환한 뒤 출전한 첫 경기에서 날아오는 공만 쳐다보고 돌진하다가 역시 공만 보고 뛰어든 동료 수비수와 충돌한다. 나동그라진 둘 위로 공은 계속 날아가 네트에 꽂히고 말았다. 야신은 그때 동료 수비수가 “어디서 이런 골키퍼를 구해 왔대?”하면서 헛웃음을 날리던 것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고 한다. 두 번째 경기에서도 그는 또 몸을 날리다가 동료 수비수와 부딪쳐 데굴데굴 구른다. 하릴없이 굴러간 공은 상대방의 발에 맞고 역시 데굴데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는 좀 심각했던 모양이다. 당시 야신의 소속 팀은 디나모 모스크바. 이 팀은 KGB가 운영하던 클럽이었다(한국 중앙정보부도 양지라는 축구팀을 운영한 바 있다). 경기 후 한 내무성 장성이 라커룸으로 달려들어왔다.

 

“이 멍청한 놈을 당장 쫓아내!”

 

피에 굶주린 베리야가 숙청된 뒤였기에 망정이지. 아마 베리야 시절이었으면 레프 야신은 어디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평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데뷔 전부터 골을 먹고 구단의 상층부에서 멍청한 놈 소리 들었으니 주눅들만도 하지만 야신은 오히려 그 실패를 딛는 과정에서부터 빛을 발했다. 더욱 자신을 단련시켰고 “내 뒤로 가는 공이 없도록” 타고난 반사 신경의 폭을 더욱 넓혔다. 소련 국내 대회에서 신경전 끝에 이성을 잃고 상대방의 얼굴에 강펀치를 작렬하여 퇴장되기도 했던 그의 한성질이, 한참 후 영국 월드컵에서는 “그는 자신의 머리를 박살 낼 뻔한 선수의 발에서 공을 빼내는 선방을 한 후 그대로 일어나 자신의 머리를 걷어찬 선수의 안위를 걱정하는(영국 골키퍼 고든뱅크스)" 스포츠맨의 모범으로 거듭난 것은 그 한 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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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대표팀으로 그가 보인 활약은 눈부실 정도다. 그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소련에게 금메달을 안겼고 1960년 우리가 지금 ‘유로’라고 부르는 유럽네이션스컵 대회에서 소련을 우승시킨다.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어서 칠레 월드컵에서는 18분 만에 세 골을 먹는 졸전으로 팀 고전의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다(앞서 언급했던 86년 멕시코 월드컵의 오연교 골키퍼보다도 더 욕을 먹었으리라).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66년 월드컵, 나아가 70년 월드컵(여긴 후보였지만)에까지 출전하는 집념을 보인다. 1971년 5월 27일 그는 오랜 축구 인생에 종막을 고하는 은퇴 경기를 맞는다.

 

철의 장막이 열렸고 수만의 서방 팬들이 디나모 모스크바와 유럽 올스타팀의 경기를 보러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을 메운다.

 

보비 찰튼, 게르트 뮬러, 에우제비오 등 걸출한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검은 유니폼을 입은 야신은 무실점으로 선방하다가 경기 얼마 전 교체된다. 퇴장하는 그에게 10만 관중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A매치 78경기에서 70골밖에 허용하지 않았고 전체 출장 경기 800여 경기 가운데 400여 회를 무실점으로 막았던 명 골키퍼의 퇴장에 더하여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한 스포츠맨이자 인간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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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괴로움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어떤 골키퍼가 득점을 허용하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괴롭다! 만약 차분하다면 그건 그야말로 끝이다. 그가 예전에 어떤 활약을 했던지간에 그에게 미래는 없다."

 

그에게 괴로움은 약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쁨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페널티킥을 막는 기쁨은 유리 가가린이 우주를 나는 정도에나 비교할만한 것이다.”

 

얼핏 들으면 에이 무슨...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기쁠 수 있었기에 그는 절반 가까운 페널티킥을 막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그 기쁨을 위해 괴로움을 극복했기에 “골키퍼에게 사각지대는 있다. 그러나 나는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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