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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은 예전에 비해 열기가 덜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월드컵은 재미있다. 국기를 휘두르는 국민들의 함성 속에 수백만, 수천만 달러 몸값의 스타들이 목마른 멧돼지처럼 필사적으로 그라운드를 헤치며 슛 하나, 골 하나에 한 나라가 뒤집히거나 하늘 위로 뛰어오른다.

 

여러 대회를 제패하고 트로피와 메달이 집에 넘치도록 많은 축구 천재들도 예외 없이 “월드컵만 가질 수 있다면...”에 목이 멘다. 국가주의니 뭐니 말은 많지만 국가 대항전으로 축구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종목도 없을 듯싶다. 그 나라의 대표팀은 곧 그 나라의 상징이요, 역사가 된다. ‘태극전사’나 ‘전차군단(독일)', ‘무적함대(스페인)'에 ‘사커루(캥거루와 축구의 합성어인 호주 대표팀의 별칭)'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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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단순한 운동 경기를 넘어 심각하고 진지한 사연들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1970년 월드컵 예선에서 격렬하게 축구 대결을 벌인 뒤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한 실제 전쟁을 치렀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축구전쟁’은 그 일각일 뿐이다. 1982년 월드컵에서 서독과 오스트리아는, 경기라고 할 수도 없는 경기를 펼치다 골 득실차로 당시 서독을 꺾어 돌풍을 일으킨 아프리카팀 알제리를 탈락시키는 ‘히혼의 치욕’을 연출했고 향후 예선 마지막 경기는 같은 시간대에 치러지는 룰을 탄생시켰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마지막 경기에서 브라질은 비기기만 해도 우승할 수 있었는데 우루과이에 2 대 1로 역전패한다. 20만 수용 가능한 말라카낭 경기장은 글자 그대로 ‘통곡의 도가니’로 변했고, 브라질 전역에서 수십 명이 권총으로 자살했다. 당시 골키퍼는 소속팀에서 퇴출되고 축구 협회에서 제명을 당해 선수 생활이 끝장난 것은 기본, 그 후 죽을 때까지 50년 동안 온갖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브라질 최고 징역형이 43년인데 난 50년 동안 괴로워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자살골을 넣었다가 마약 카르텔에 암살당한 콜롬비아의 에스코바르의 명복도 빌어두자.

 

이렇게 사연 많고 탈 많았던 월드컵 가운데 최악의 월드컵이라면 역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들 수밖에 없다. 당시 아르헨티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호르헤 비델라.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그는 그 이후 지속된 ‘더러운 전쟁’ 즉, 반대파들에 대한 잔인한 숙청과 고문, 학살의 총지휘자였다. 물론 비델라의 목적은 10년 뒤 열릴 올림픽을 유치한 나라의 대머리 대통령의 그것과 같았다. 축구(스포츠)를 통한 국민의 정치적 관심 소멸.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임무는 단 한 가지였다. “어떻게든 우승”이었다. 정부의 입김과 검은 돈이 그를 위한 레드 카펫을 깔기 시작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토너먼트 전이 아니라 1차 예선 후 2차 리그를 펼쳐 각 조별 1위 팀끼리 결승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서독, 네덜란드, 이탈리아가 한 조에 몰린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폴란드, 페루와 한 조였다. 브라질과는 악전고투 끝에 0 대 0으로 비겼고 폴란드는 물리쳤다. 결국 조 1위는 브라질과 폴란드 전, 아르헨티나와 페루 전의 승패와 골 득실 여부에서 결정 나게 됐다. 브라질은 최선을 다해서 3 대 1로 페루를 이겼다. 아르헨티나가 결승에 가려면 네 골 차 이상을 이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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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월드컵 사상 최악의 거래가 일어난다. 정확히 말하면 거래가 일어났다고 의심된다. 페루팀 골키퍼로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 퀘로가가 전격 기용되는가 하면, 페루의 공격수들은 유난히 헛발질을 벌이고 최종 수비수가 공격진에 가세하는 희한한 포메이션을 보이게 된다. 결과는 6 대 0이었다. 아르헨티나로부터 페루에 긴급 ‘원조’가 공수되고 선수들에게도 ‘포상금’이 지급됐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경기 때문에 결승 진출이 좌절된 브라질 감독은 “축구의 권위를 떨어뜨렸다”며 격노했다(브라질도 페루팀을 매수하려 들었던 사실도 밝혀져 피장파장이 됐지만). 반면 페루 선수단이 머무는 호텔 앞에서는 수천 명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운집하여 ‘감사합니다’를 부르짖었다. 페루는 최악의 대회가 남긴 흑역사의 조연으로 기록됐다.

 

그에 대한 인과응보일까. 페루팀은 그다음 월드컵인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남미 대표로 출전한 이후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단 한 번도 월드컵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한국팀이 1954년 월드컵 이후 1986년 진출까지 “32년의 한”을 곱씹었는데 그 이상의 좌절을 경험한 셈이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예선 탈락의 비운을 겪긴 했으되 2017년 11월 페루가 대륙 간 플레이오프에서 뉴질랜드를 꺾고 러시아행을 확정했을 때 페루는 송두리째 뒤집혔다. 지진과 화산이 많은 나라인 페루는 지진 경보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데 페루팀이 한 골을 넣을 때마다 지진 경보가 요란하게 울렸다. 지진이 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자축용으로 울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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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월드컵 예선에서 멕시코가 독일에 결승골을 넣은 순간 멕시코인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는 통에 인공 지진이 감지됐다는 보도도 있었던 걸 보면, 승리의 순간 페루의 ‘지진 경보’도 근거가 있는 자축 축포였으리라. 페루 축구팀과 지진이라는 단어는 그리 가벼운 인연만은 아니다. 1970년대는 페루 축구팀의 전성기였다. 1930년 남미 우루과이에서 열린 첫 월드컵에 참가했던 이래 40년 동안을 침묵하던 페루는 ‘프리킥의 달인’ 테오필로 쿠비아스 등의 활약으로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한다. 당연히 페루 사람들은 인공 지진을 일으킬 만큼 환호했을 것이다.

 

멕시코 월드컵 개막 당일 가공할 만한 대지진이 페루를 덮친다. 진도 7.7. 인구 10만의 항구 도시 침보테의 경우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됐고, 15개 도시가 괴멸적 피해를 입은 가운데 무려 7만여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대재앙이었다.

 

페루팀은 팔에 검은 상장을 두르고 경기에 나섰다. 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선수들도 수두룩했다. 경기가 가능할까 생각되는 상황에서 첫 경기 상대는 동구의 강호 불가리아. 바로 2년 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강호였다. 어수선한 팀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페루팀은 첫 골을 내주며 끌려간다.

 

당시 페루 감독은 두 번이나 월드컵을 거머쥔 브라질의 전설적 미드필더 출신 디디. 그는 후반 한 골을 더 먹고 한 점을 따라붙은 2 대 1 상황에서 과감하게 전면 공격의 시동을 걸었다. 노란 손수건을 흔들면서 전원 공격 사인이 내려지자 페루 선수들은 그야말로 벌떼같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똘똘 뭉쳐 있었다.”

 

이 경기에서는 신예였지만 페루 불세출의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남기는 테오필로 쿠비야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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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으로 슬픔에 잠긴 페루를 위하여, 페루 사람들을 위하여.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불가리아는 당황하고 있고 페루 선수들은 98년 월드컵 벨기에 전, 이번 독일 월드컵의 손흥민처럼 뛰어다녔다. 단 7분을 남겨 두고 페루는 연거푸 두 골을 성공시켜 대역전극을 거둔다. 결승골은 쿠비야스의 몫이었다.

 

페루 국민들 가운데 월드컵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던 사람은 드물었다. 온 나라가 지진에 휘청거렸고 파묻힌 사람들을 구하고 무너진 와륵들을 치우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월드컵의 승리 소식은 바람보다도 빠르게 페루 국내에 번졌다. 단순한 공놀이의 승리만은 아니었다. 페루 사람들은 지진이 난 뒤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고 힘을 낼 수 있었다. 8강 성적을 이루고 페루 국가대표팀이 귀환했을 때 사상 최대의 인파가 몰려들어 환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페루는 예선 탈락했다. 36년 만에 진출한 월드컵 치고는 맥없는 성과. 페루 경기를 보면서 나는 월드컵, 나아가 스포츠가 드러낼 수 있는 최악과 최고의 모습을 보여 준 페루팀의 전력을 더듬으며 묘한 감회에 젖었다.

 

아무것도 아닌 공놀이에 나라가 움직이고 거기에 목숨을 거는 것이 유치하고 때로는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손흥민의 독일전 골에 아파트가 떠나가라 함성을 질러 주무시는 장모님이 불난 줄 알고 깨어나게 만들었던 나. 내가 월드컵을 사랑하고 즐겨 보는 이유는 그렇게 우여곡절 구절양장의 사연들이 서려 왔고, 엮이고 있으며, 만들어져 갈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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