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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피히테, 셸링의 선배인 임마누엘 칸트가 남긴 난제란 무엇인가? 바로 인식과 물자체이다. 우리가 감각으로써 받아들이는 사물의 모습 즉 우리의 인식과, 물자체의 본질은 같을 수 없다. 칸트는 인식과 물자체를 분리했다.

 

인간, 개, 파리가 보는 책상은 다르다. 어느 것이 진실인가? 매끄러운 책상의 표면도 벼룩에게는 거칠거칠한 나뭇결로 이루어진 암반지대다. 그렇다면 책상은 매끄러운가, 아니면 거친가? 그것은 인간과 벼룩의 신체 사이즈,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차이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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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책상이라는 ‘물자체’에 인간은 실체적으로 다가갈 수 없다. 책상은 이런 것 같다는 우리의 인식만 존재한다. 칸트는 인간이 인식하고 판단할 수 없는 대상에 명확히 선을 그었다. 물자체, 신(神), 이상이다.

 

진리란 어디에 있는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알 수 없으며, 몰라도 된다. 사물, 세계, 우주, 역사의 참된 실체는 인간이 알 수 없다. 신의 영역이다. 신이 알아서 할 일이므로, 인간에게는 '논외'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칸트의 답은 물론 정언명령이다. 인간이 인간의 길을 걷다가 죽으면, 그 다음엔 저승의 법도가 알아서 할 일이다. 신이 보증해 주지 않는 인간의 길을 다지기 위해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썼다.

 

이후의 철학자들은 외로워졌다. 별처럼 빛나는 도덕률을 눈 감고 명상한들, 이래서야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본질을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불완전하고 뿌연 감각의 감옥 안에 혼자 내버려진 존재다.

 

세계는 세계대로, 신은 신대로 알아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고 올바른 사람으로 도덕률을 지키며 사는 일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하필이면 독일은 후진국이었다. 후진국에서 후진적으로 살다가 봉건영주가 매를 들면 칸트의 도덕법칙을 지키며 맞으면 그만인가? 이웃이 영주의 착취에 못 이겨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면 어찌하는가. 그가 좋은 사람이었음을 반추하며 추모하면 된단 말인가.

 

칸트의 정언명령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해, 그는 무고하니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외치는 방법도 있다. 아마 영주는 둘 다 때려죽일 것이다. 세상은 그대로 계속될 것이다. 이것을 선의지의 실천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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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남긴 ‘개인과 세계의 근원적 분열’은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더욱 심각해졌다. 옆 나라는 백성이 근대의 주체적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획득했다. 칸트에 감명받은 독일인이 정언명령을 가슴에 품고 ‘나는 봉건제후의 핍박받는 백성이지만 그래도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읊조린들, 당시 독일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는 블랙코미디일 뿐이었다.

 

피히테와 셸링이라는 철학자는 ‘근원적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피히테는 오늘날 칸트에서 헤겔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로 평가받는다. 그의 철학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해야 한다면 다음과 같다.

 

<자아는 확장한다>

 

가능한 한 짧고 쉽게 정리해보겠다. 나 자신이 있다. 자아(自我) 혹은 아(我)라고 한다. 자아 바깥의 세계와 사물, 타인인 비아(非我)도 있다. 페친 여러분은 나에게 비아이고, 나 역시 여러분에게는 비아이다.

 

아와 비아는 당연히 분리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칸트와 같다. 분리를 '대립'이라 한다면 어떨까. 대립이란 무언가 해결해야 하는 상태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예시다. 어느 나라의 엄혹한 시대에 '홍길동'이 민주화 투쟁을 한다고 치자. 세상사에 관심 없는 '장길산'과 길동은 서로가 서로에게 비아이다.

 

길동이 길산을 설득시켜 최루탄이 용트림하는 거리로 나서게 했다고 해 보자. 길동은 길산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길동의 자아는 길산의 자아를 끌어들였고 민주화의 대의에서만큼은 두 자아가 합치되었다. 길동의 적극성은 그의 자아를 팽창시켰다. 길산의 입장에서도 길동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일은 주체적인 선택이다. 길산의 자아도 확장되었다.

 

자아는 인간에 대해서만 확장되지 않는다. 여러분이 잡초밭을 가꾸어 장미를 기른다고 치자. 잡초밭은 여러분의 의지에 의해 정원으로 변화했으므로, 자아는 같은 의미로 확장된다. 이런 식으로 자아는 계속해서 확장될 수 있는데, 결국 인류 전체의 자아로까지 나아간다. 인류의 자아는 전인류가 추구하고자 하는 진보적 이상이다. 이를테면 세계 평화와 같은 것이다.

 

피히테는 자아에는 무제약적인 가능성이 있으며, 이 사실을 깨달으면 인류 역사를 발전시키는 주체가 된다고 한다. 외로움의 문제는 해결했다. 그러나 자아의 팽창은 '믿으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희망 섞인 신비주의를 벗어나기 힘들다. 피히테는 열렬한 애국자였는데, 그의 애국심은 철학적인 면에서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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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군대가 프러시아군을 격파하며 독일을 점령하자 피히테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연설을 했고,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 모음집이 출간되었다. 근대문명의 수호자를 자처한 나폴레옹은 존경받는 철학자를 해코지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다. 대신 출판사 사장이 끌려 나와 총살당했다.

 

나폴레옹은 미묘한 인물이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민중이 떨치고 일어나 맺힌 꿀물을 차지한 권력자다. 거꾸로 프랑스 바깥에서는 비록 군대를 동원했을지언정 시민혁명의 가치를 전파한 인물이다. 인류 전체의 진보를 생각한다면 독일 대표인 프러시아가 패배해도 된다. 외려 나폴레옹의 승리가 진보이고 프러시아는 반동이다. 피히테가 말한 확장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다. 자아가 인류 전체에까지 확장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와 민족이라는 단위를 거쳐야 한다.

 

피히테의 애국은 그의 철학에 들어맞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다. 나폴레옹과 시민혁명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을 통해 독일이라는 비아를 포섭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적 철학이 가진 허술함이다. 결국은 '마음 가는 대로'다.

 

셸링의 철학은 피히테보다 더 간단하게 정리된다.

 

- 인간과 세계는 근원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인간과 세계는 사실 하나다. 인간과 타인, 사물, 동식물, 모든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 어떻게 깨닫는가? '직감'을 통해서다. 원래부터 절대적인 것은 이성적 추론이 아니라 직감으로 깨닫는 법이다. 이렇게 깨우친 자아를 피히테는 '절대자아'라고 한다.

 

셸링은 웅장해 보이지만 내실은 공허하다. 그가 주문하는 것은 깨달음이라기보다는 '깨달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셸링의 철학은 피히테의 그것보다 훨씬 노골적인 신비주의다. 현실의 문제는 깨달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피히테가 좌절한 독일인들의 마음에 붕대의 역할을 했다면 셸링은 반창고였다. 둘 다 미봉책이었지만 철학의 역사에서 피히테와 셸링은 나름의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헤겔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아와 비아의 대립은 정반합의 되었고 절대자아는 절대정신의 모티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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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서른이 될 때까지 셸링에게 철학을 배우다시피 했다. 셸링에게 헤겔은 어떤 존재였을까? 어수룩하지만 성실한, 자신이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될 동네형 같은 사람이었다. 20대에 존경받는 철학자가 된 셸링과 늦은 나이까지 아버지가 정한 진로에 억눌려 원하던 철학을 하지 못하고 끙끙 앓던 헤겔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헤겔은 서른이 될 때까지 7년 간이나 가난한 가정교사 생활을 전전하며 몰래 철학 논문을 집필했다. 무명 중의 무명인 그의 원고를 출간해 줄 출판업자도 없었고 감히 아버지 눈앞에서 철학으로 전향할 수도 없었다. 헤겔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 놓고 철학의 길을 걷기로 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였다.

 

근대의 피라미드를 쌓은 대철학자 헤겔. 서른이 넘은 헤겔은 정규직 일자리를 간절히 원하는 무일푼의 철학도였다. 간단히 말해 반백수였다. 그를 끌어줄 사람은 다섯 살 어린 셸링 밖에 없었다.

 

셸링은 명문 예나대학의 정교수이자 주인공이었다. 헤겔에게 힘을 실어줄 테니 자기만 믿고 예나대학에 이력서를 넣어보라고 권했다. 1804년, 헤겔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절절한 이력서를 한 땀 한 땀 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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