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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사과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지난 회 댓글로 오류를 지적해 주셨는데, 이건 200% 제 잘못입니다. 마츠다이라는 도쿠가와가 개성(改姓)하기 전의 성입니다(도쿠가와 가문의 분가로 살아간 이야기는 차치하고).

 

천성의 게으름으로 원고를 한꺼번에 몰아서 보내고, 보낸 뒤 편집 된 건 살펴보지도 않는데, 소소하게 그러나 결정적인 ‘오타’들이 나옵니다. 2~3일에 몰아서 한 번에 원고를 몰아주고, 퇴고를 안 하는 성격 덕분에(편집장을 너무 믿기에) 이런 문제가 계속 터집니다.

 

다른 원고라면 문맥만 맞으면 상관없지만, 이렇게 역사적인 접근을 하는 기사에서는 오타 하나가 치명적이란 걸 새삼 깨닫습니다(쇼군을 덴노로 쓰는 멍청한 짓도 했습니다).

 

급하게 몰아써서 보내고, 다른 원고에 치이다 보니 이런 불상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되도록 여유를 가지고 원고를 쓰고, 다시 한 번 원고를 검토하겠습니다. 거듭된 실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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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과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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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의 장남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 일찌감치 신겐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신겐의 뒤를 따랐다. 나름 능력을 보여줬는데, 카와나카지마 전투 때 신겐을 도와 우에스기 겐신 부대에 꽤 큰 피해를 입혔다. 이때, 요시노부는 우에스기 부대를 추격해 끝을 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신겐은 아군의 피해가 심대하단 걸 확인하고는 거부한다. 이 전투로 자신의 동생이자 카게무샤였던 다케다 노부시게가 죽었고, 작전을 제안했던 ‘전설의 참모’ 야마모토 간스케도 전사했다.

 

하긴, 전체 병력의 8할 넘게 손해를 본 상황이니 추격은 어려웠을 거다.

 

“머리가 어설프게 좋아 억지를 쓴다.”

 

라며 아들을 타박했다. 이후의 문제는 좀 심각해지는데, 4남인 다케다 가쓰요리에게 타카토요 성(高遠城)을 맡겼다. 후계구도가 꼬인 거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건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죽음이다. 요시모토의 딸과 결혼한 요시노부는 아버지 신겐이 이마가와 가를 배신하는 걸 말린다.

 

신겐은 당연히 이에 분노하고, 요시노부는 반란을 준비한다.

 

당시 상황을 보면, 다케다 가문 내에서도 이마가와에 대한 입장 정리가 완전히 된 것 같지는 않다. 친 이마가와파와 반 이마가와파가 나뉘어 대립한 것 같다. 요시노부의 스승인 오부 토라마사(飯富虎昌)가 반란에 참여했었다가 할복을 했고, 요시노부도 얼마 뒤 죽는다.

 

신겐의 후계자 자리는 4남인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에게 넘어간다.

 

아들을 죽인 것을(병사였든) 보고 신겐의 냉혹함을 말하지만, 전근대 국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권력다툼을 벌이고, 아들을 죽이는 건 흔하디 흔한 ‘일상’이다. 신겐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쫓아내고 권력을 쟁취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신겐의 이마가와 침공은 다케다 가문 안에서도 말들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이 분란을 신겐이 직접 정리했다는 대목이다. 어쨌든 신겐의 카리스마는 여전히 건재했고, 이제 그의 야망을 세상에 펼쳐 보일 시간이 찾아왔다.

 

 

 

처음이자 마지막

 

(상략) 달빛이 더욱 밝아졌다. 산도 골짜기도  나무도 성도 오늘 밤뿐인 그 기묘한 가락에 넋을 잃고 있는 듯했다. 아마 호큐 자신도 두 눈에 이슬을 머금은 채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겐의 뇌리에 열세 살 때 처음 출전한 이래 쉰두 살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겪은 인생에 대한 허무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구름이 달을 가렸다. 어쩌면 피리소리가 구름을 부른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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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이었다.

 

"탕!"

 

(중략)

 

일어서는 순간 신겐은 버럭 화가 치밀었다. 요지부동하기가 산과도 같은... 비록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진다 해도 놀라지 않는 마음. 그런 마음을 단련하려 했고 또 스스로 단련해온 줄로 알았던 신겐이었다.

 

카와나카지마의 본진에 켄신이 쳐들어왔을 때조차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밤은 총포를 쏠 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미리 대비하고 있었는데도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다.

 

'이 얼마나 덜 떨어진 짓인가!'

 

스스로 자신을 꾸짖고 다시 걸상에 앉으려 했으나 거구가 앞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중략)

 

시동이 칼을 내던지고 큰 소리를 지르며 신겐에게 달려왔다.

 

"여러분, 성주님이 총포에... 총포에 맞았습니다."

 

"이 멍청아,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 총포에 맞은 것은 내가 아니야. 누군가 경호하는 자다. 가서 보고 오너라."

 

신겐은 이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가 딱딱 마주칠 뿐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마비되어 침이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겐은 왼손을 땅에 짚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오른쪽 반신이 땅에 뿌리를 내린 듯 무겁기만 했다. 초조감을 느끼게 되자 가슴이 못 견디게 메스꺼웠다.

 

울컥 무언가를 토해냈다 음식인 것 같기도 하고 검은 펏덩어리 같기도 한 비릿한 감촉이 아직 감각이 남아 있는 왼쪽 뺨에 느껴졌다.

 

'결국...'

 

신겐은 생각했다. 이미 스스로도 자신의 상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상경작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실패를 거울삼아 서두르지 않고 초조해하지도 않으면서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여 승승장구하는 장대한 웅도가 지금 눈앞에서 크게 흔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 『대망』 中 발췌

 

소설 『대망』에서 다케다 신겐이 저격을 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신겐의 최후를 ‘저격’으로 단정 짓고 이야기를 만들지만(나라도 그랬을 거지만), 신겐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암이란 설부터 시작해). 중요한 건 그의 사인보다 죽음이 가져오는 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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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3년 동안 죽음을 비밀에 부치라고 한 것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그러나 그 유언마저도 장수들의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아버지 신겐의 죽음을 비밀로 해두는 3년 동안 가신의 거취를 확인하고 천하의 동향을 주시하라는 의미라고, 카츠요리 자신은 그 뜻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일족의 장수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겐의 죽음을 알면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켄신과 동맹하여 침입할 것이므로 섣불리 발표해서는 안 된다... 는 식으로 몹시 소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략)

 

- 『대망』 中 발췌

 

그 유명한 ‘신겐의 유언’이다. 자신의 죽음을 3년간 비밀에 부치고, 안으로 내실을 다지라는 거였다. 다케다 신겐이 당시 어떤 영향력을 가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신겐이 있는 다케다 가문과 신겐이 없는 다케다 가문은 천양지차였다.

 

신겐의 유언 자체가 당시 다케다 가문이 어떻게 움직였고, 어떤 형태로 유지됐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케다 가문은 신겐의 카리스마 하나로 통합되고 유지됐던 거다. 그런데 이 구심점이 사라졌다. 애초부터 느슨한 호족 연합체와 같은 성격이었던 다케다 가문은 내부부터 동요했다. 부하들이 하나 둘 씩 다케다 가문을 이탈하기 시작했다(오쿠다이라 사다마사가 도쿠가와 쪽으로 넘어갔다. 이게 훗날 다케다 가문의 패망 원인이 되는 나가시노 전투의 발단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외부의 시선이다. 신겐이 없는 다케다는 팥 없는 단팥빵이었다.

 

공포의 대마왕이라 불렸던 오다 노부나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 바로 신겐이었다. 그는 평소에 신겐에게 선물을 보내며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했다. 이도 모자라 자신의 양녀(유키히메)를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에게 보낼 정도로 저자세를 취했다. 천하를 쟁취한 뒤의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판도는 ‘지배자’의 모습이지만, 그 이전의 오다 노부나가는 다른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작은 영주였을 뿐이다. 그런 오다에게 다케다는 거대한 ‘벽’이었을 거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신겐의 마지막 출정은 일본 전국시대에서 ‘전근대(前近代)’가 그 맹위를 떨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이제 전투의 양상은,

 

“양이 질을 압도하는 시대”

 

로 변한 거였다. 사람들은 오다 노부나가가 대량의 ‘철포’를 확보해 철포로 전쟁을 이겼다고 생각하지만(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철포란 것도 따지고 보면 ‘돈’이다(말보다 몇배나 비쌌다). 그리고 이 철포보다 더 중요한 게 병력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양’으로 전장을 압도했다. 신겐이 추구했던, ‘싸우기 전에 이긴다’의 신념에 가장 부합되는 전략이라고 해야 할까? 신겐이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3만 내외였다면, 신겐이 죽은 1573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11만 6천명에 달했다(석고 계산으로 봤을 때 이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460만석이었다).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

 

이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사방이 적들로 둘러 싸여 어느 한 지점에 11만의 병력을 동시에 출병시킬 순 없지만, 최소한 밀리지 않을 방어력은 확보했다. 그럼에도 위태위태한 건 사실이다. 온 사방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는데, 어디 한 군데 둑이 무너지면 한꺼번에 휩쓸려 나갈 수도 있는 상황. 이런 형국에서 3만의 정예강병을 가진 신겐이 치고 들어온다면? 오다가 신겐을 두려워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제 전장은 ‘근대의 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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