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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어떤 사람일까? 철학도들이 그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그대로, 시종일관 진지하고 근엄한 인물이었다. 학창 시절 그는 매일같이 학구적인 일기를 썼다. 그중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남자들은 쓸데없이 여자들과 산책 따위나 하며 스스로를 망치고 터무니없이 시간을 낭비한다."

 

물론 헤겔도 혈기왕성한 남자였던 만큼 연주회에 다녀온 날에는 다른 내용의 일기를 썼다.

 

"아름다운 여자들을 보는 일은 참 즐겁다."

 

성공한 후 사교계의 귀부인들 앞에서는 즐거워했다고 하니 미녀 앞에서는 조금씩 흐트러진 모양이지만, 평소에는 무거운 공기를 내뿜었다. 튀빙겐 대학 시절 셸링과 횔덜린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노인'이었다.

 

뉘른베르크 김나지움 교장으로 있을 때는 자라나는 학생들을 앉혀놓고 게르만 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를 낭독하곤 했다. 그것도 흥이 나면 즉석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하며 읽었다. 교장 앞에서 잠을 잘 수도 없었을 학생들에게는 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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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대학 강의는 대령급 군인과 정부 고위 관료가 청강할 만큼 인기였지만 분위기는 엄숙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한 학생의 증언이다.

 

"그는 기운 없이 다소 언짢은 듯 머리를 낮게 숙인 채 몸을 움츠리고 앉아서, 커다란 노트를 앞뒤로 넘기고 위아래로 훑으면서 계속 말을 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찾았다. 끊임없는 헛기침과 기침에 말의 흐름이 자꾸만 끊겼다."

 

헤겔은 금속질의 목소리로, 느리게 돌아가는 기계처럼 모든 낱말과 음절을 조각조각 끊어서 발음했다고 한다. 과연 인기만큼이나 이해가 잘 되는 강의였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꾸지람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헤겔이 한 번 화를 내면 적당한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 혼나는 사람은 사지를 바들바들 떨 정도였다고 한다.

 

헤겔은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슐라이어마허와 서로 싫어했다. 두 사람의 안 좋은 관계는 자극적인 소문을 만들어 냈다. 논문에 관해 논쟁하다가 말이 안 통하자 급기야 칼싸움을 했다는 이야기다. 두 철학자는 소문을 끝내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미끄럼틀에서 사이좋게 내려오는 간지러운 광경을 연출해야만 했다. 헤겔의 성격에 곤욕이었을 게 분명하다.

 

헤겔은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철학이 어땠기에 독일인들은 그의 주변에 벌과 나비처럼 몰려들었던가.

 

인간의 근원적 분열,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모두들 반칙을 하고 미사여구로 봉합하느냐는 것이 헤겔의 비판이었다. 인간은 당연히 물자체를 알 수 없다. 자아를 팽창시켜 모두 삼켜 버리면 된다느니, 직감으로 알면 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철학이 아니다. 헤겔에게 철학은 엄밀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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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묻는다. 물자체를 알 수 없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인간은 인간의 방식대로, 파리는 파리의 방식대로 물자체를 파악하면 된다. 내가 본질을 알든 모르든 물자체는 거기에 존재한다.

 

헤겔은 근원적 분열을 간단히, 그러나 명석하게 해결한다. 물자체든 본질이든 우주의 존재 원리이든, 참된 진리 즉 실체를 인간이 파악할 수 있으면 된다. 헤겔에게 실체는 물질 자체가 아니라 ‘운동’으로 존재한다. 인간과 세계는 운동한다. 인간은 스스로와 대상을 의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다.

 

우리는 숨을 쉰다. 숨 쉬는 공기는 있다. 술을 마신다. 마셔지는 술은 있다. 여기서 술은 또한 중력이라는 운동 원리에 의해 술잔 안에 담겨 있다. 술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에 열심히 반항하는 중이다. 중력이 사라지는 순간 우주정거장 안처럼 공중을 떠돌게 된다.

 

물의 실체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물의 존재는 확신할 수 있다. 물은 끝없이 위에서 아래로 흐름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있는데 물이 어떻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 거꾸로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을 방법도 없다.

 

인간은 책상이 매끄럽다고 느끼고 벼룩은 책상을 거칠거칠하다고 느낀다. 우리는 손으로 책상을 훑고 벼룩은 책상 위를 걸어서 느낀 인식이다. 그러므로 나의 만짐과 벼룩의 걸음이라는 운동은 실재한다. 책상의 존재는 확실하다. 책상의 실체는 ‘운동을 통해 거기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다음에 매끄럽든지 거칠거칠하든지는 감각에 맡기면 될 일이다.

 

우주 전체는 운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실체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두 있다. 이제 걱정하지 말고 인간은 인간의 일을 하면 된다. 인간은 어떻게 살면 되는가? 헤겔은 얼핏 들으면 허무한 말을 한다.

 

“교양인이 되시오.”

 

난데없이 교양이라니. 그러나 허튼소리는 아니다. 독일어로 교양은 빌둥(bildung)이다. 빌둥은 영어에서 건물을 뜻하는 빌딩이다. 교양이라는 의미에 해당하는 영단어는 따로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cultural background(문화적 배경)' 정도로, 단어들을 찾아 조합해야 한다. 독일어 빌둥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건축물처럼 쌓아올린 것이다. 헤겔의 교양이란 누적된 정신적, 지적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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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고조선의 팔조법은 한국 역사에 최초로 등장한 법이다. 이 법령은 사유재산을 인정한다. 물건을 훔치다 걸린 사람은 피해자의 노비가 되어야 했다. 고조선 시대에는 ‘사회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 상식이 될 정도에 도달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타인의 생명과 재산은 나의 것만큼 소중하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 교양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 시대보다 발전된 현대에 남이 실수를 했다고 꼬투리를 잡아 노비처럼 부리고 학대하면 불법이거니와 교양이 없는 인간이다. 교양은 역사가 진보해 온 결과를 개인이 받아들이고 소화한 상태를 뜻한다.

 

헤겔의 관점에 따르면 사형제 부활을 외치는 사람들은 교양이 없다. 인류 문명은 명백하게 권력자가 명령하는 사형에서 법리적 절차를 거친 사형으로, 공개 처형에서 은밀한 처형으로, 잔인한 처형에서 인도적인 처형으로, 그리고 현재에는 사형제 폐지 유행으로 발전되어 왔다. 명백하게 폭력성이 줄어들고 있다.

 

한국이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으로 등록될 정도로 발전한 시점에서 '나쁜 놈들 싹 다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완전한 사람이다. 독일어 ‘빌둥’을 영어 '빌딩'이라고 놓고 보면 그는 완공이 덜 됐거나 부실 공사에 의해 어딘가에 철근이 빠진 상태다.

 

교양이란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노동이다. 인간의 개인사도 각각 하나의 역사다. 개인은 자신만의 역사, 개인사의 발전을 이뤄내야 한다. 개인이 모여 인류가 되고 개인사가 모여 인류사가 된다. 이것이 역사다.

 

첩첩산중이나 해안 마을에서 나고 자란 지인들에게 고향에서 있었던 폭력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데이트 폭력이나 뉴스에 나오는 섬노예까지는 아니지만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노동착취 등의 이야기다. 당시에는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고들 한다. 지금에 와서는 아직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큰일이라고 한다.

 

이럴 때 항상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하는 말이 딸려온다. 헤겔 철학을 모르는 사람도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시대발전에 부합해야 한다는 당위를 가지고 산다. 여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옛날은 그럴 만한 시대였다는 스스로에 대한 변명이다. 그러나 둘째로, 과거에는 몰랐지만 그것이 옳지는 않았다는 반성도 포함되어 있다. 거꾸로 도시인들은 자신이 자란 시골의 현실을 모른다면서 섬노예가 횡행하는 현실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헤겔 철학은 이들을 교양이 없는 인간으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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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마찬가지다. 군 생활 시절 군대의 부조리와 폭력을 방조하고 동의했으며 더 나아가 옹호하기까지 했다. 이에 벗어나는 데는 제대 후 수년간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일상의 실수나 악행 역시 과거의 자신을 질책해 반성과 발전을 이끌어 내야 한다. 헤겔의 개인은 스스로 쌓아올리는 존재다.

 

헤겔은 재미없지만 노력하는 인간형이다. 과거의 상태를 졸업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으로 살아왔는가? 그때 나는 왜 연인에게 상처를 주었는가? 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나는 어떤 인간이었는가? 번득이는 깨달음이나 명언은 가치있지만 그걸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우리 대부분은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보통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이야기한다. 희망 사항은 본모습이 아니다. 내가 해 왔던 행동, 내가 보여온 태도가 나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더 나은 행동과 태도를 반복해야 한다. 시간과 노력이 걸리는 일이다.

 

인간이 국가라면 이성은 국왕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국가가 발전하지 않는다. 건설도 개혁도 비용을 감수해야만 완수된다. 공짜는 없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지금보다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할 이는 어디에도 없다.

 

개인은 각자의 삶을 살아내지만 역사에 영향을 끼치고 거꾸로 영향을 받는다. 역사는 점점 더 발전된 단계로 인류를 데려다 놓는다. 모든 것은 운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개인은 의식하지도 못하고 의도하지도 않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과거보다 미래가 더 낫기를 바란다.

 

모든 예술가는 과거의 예술보다 더 좋은 예술을 하고 싶어 한다. 모든 과학자는 더 나은 것을 발명하고 싶어 한다. 이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자연의 본능이기도 하며, 개인들의 자아가 모인 역사의 본능이다. 모두가 하나다. 이것이 핵심이다.

 

참된 것, 실체는 하나다. 수학에서 완전수는 하나다. 신, 인류의 의지, 역사 발전, 자연은 한 몸통이다. 우주 전체는 하나의 원리로 묶여 있다. 그 하나를 인식하려는 노력이 철학이다. 인간은 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의지가 모이면 결국 역사는 ‘역사 발전’이라고 하는 거대한 물줄기를 향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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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발전한다. 어떻게? 그 구조를 밝힌 작업이 헤겔의 역사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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