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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박훈정

주연: 김다미, 고민시, 조민수, 박희순, 최우식, 최정우, 오미희, 다은, 김병옥, 이주원, 김하나

음악: 모그

촬영: 이태오

15세 관람가 / Color / 123분

영제: The Witch Part 1 : The Subversion

 

 

*스포일러 주의

 

박훈정 감독은 전작 <브이아이피>로 인해 '여혐 논란' 에 크게 휘말렸다.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논란에 휩싸여서가 아니라, 논란으로 인해 <브이아이피>가 여성에 대한 잔인한 묘사 빼면 별 문제 없는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명예로운 죽음' 을 맞이할 것처럼 보여서였다. 장르와 등급을 고려하면 나는 그런 잔혹한 살인 장면은 어차피 연출된 상황이니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보다 문제는 전체적인 완성도에 있었고, 감독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는 작품이 <브이아이피>였다. 그래서 박훈정 감독작 중에서 처음으로 여성 캐릭터가 전면에 나선다는 <마녀>가 별로 기대되지 않았다. 지난번 논란을 의식해서 여성을 희생자로 만드는 빈도만 줄였을 뿐, 완성도는 지속적으로 실망만 줬던 박훈정 감독의 기존작들과 차이가 없지 않겠나 싶어서다.

 

<마녀>는 울창한 숲에서 도망쳐 온 자윤(김다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건축가 구 선생 부부(최정우, 오미희) 집 앞에서 쓰러지고, 거기서 수양딸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효도와 공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고교생으로 성장한 자윤. 친구 명희(고민시)의 도움을 받아 농가에 닥친 불황과 어머니의 병세로 기울기 시작하는 집안을 살리려 상금 노리고 출연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렇게 전국구로 알려진 자윤을 발견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과거에 그녀를 쫓았던 미스터 최(박희순)와 닥터 백(조민수). 유치한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자윤을 붙잡으려고 더 유치한 이름을 지닌 능력자인 귀공자(최우식)를 보낸다. 배역 이름이 저 모양이라 본편에서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은 것인가 싶을 정도인데, 어쨌든 이들로 인해 자윤의 일상이 크게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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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대로 <마녀>는 슈퍼히어로 풍 연작으로 기획됐다. 도입부에서 'Part 1 : The Subversion' 이라는 부제를 영어로 표기해 놓고 있기도 하다. 예전 같았으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전편만한 속편 없다'는 말은 요즘 들어서는 많이 무의미해진 감이 있다. 속편이 전편만하거나, 아니면 전편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아져서다. 실제로 잘 만든 작품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요즘은 기획 단계부터 속편 제작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아서일까. 일부러 첫 편을 다소 설렁설렁 모자란 결과물로 완성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전편에서 느꼈던 갈증을 약간만 보완하는 식으로 더 나은 속편의 자리를 수월하게 가져가는 것만 같다.

 

과거 영화계였다면 어땠을까. 예컨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레이더스> 제작 당시 온갖 아이디어를 다 짜내다 석탄차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까지 구상했다. 하지만 이미 작품에 온갖 재밌는 아이디어가 꽉 들어찼으니 탄광차 추격전 아이디어는 다음 편에 써먹어야 겠다며 끝내 제외됐다. 이는 3년 후 제작된 속편인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에서 쓰인다. 한 편을 만들 때 아이디어를 다 쏟아 부어야 하는거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마녀>는 불만족스러울 작품이다. 언론을 통해 한국판 <공각기동대>, 초능력을 이용한 액션물 등으로 홍보됐지만 전체 상영시간에서 자윤의 평소 생활을 비롯해 본색을 드러내기 전의 이야기를 거의 1시간 넘게 하고 있어서다. 이 드라마적인 부분이 그렇게 잘 만들어지지 않은 탓에 관객들로부터 꽤 많이 지적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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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작품에서 1시간 정도 되는 긴 전반부 이야기가 없어지면 그거대로 아쉬운 구석이 있다. 낙엽만 굴러가도 이년아 저년아 하면서 꺄르르 깔깔깔 거릴 여고생들의 우정.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숨겨진 가창력과 깜짝 놀랄 능력을 드러내는 주인공의 모습들은(작품은 정확히는 그 능력이 무엇인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사실 내가 중간에 깜빡 조는 바람에 못 봤을 수도 있다.) 은근히 순정만화 톤의 청춘물을 보는 감흥을 준다. 나쁘지 않은 감성이다. 이 전반부가 있어서 중후반부에 마주하게 되는 충격과 놀라움이 배가 되기도 하고.

 

긴 워밍업은 분명 <마녀>를 만들 때부터 의도했던 부분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전반부가 좋은 소리를 못 듣는 이유는 전체적으로 그렇게까지 길게 흐름을 유지할 의도를 끝내 납득시키지 못했거나, 모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두드러지지도 않는 클리셰로 보여서 덜 인상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윤이 외상으로 구매한 비료를 실은 트럭을 몰고 집으로 돌아갈 때, 현철의 '사랑의 이름표' 를 배경음악 삼아 평화로운 시골의 정경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그렇다. 현철이나 태진아, 송대관 말고 다른 트로트 가수 취향이거나. 차라리 요한 일렉트릭 바흐의 '사랑의 이영표'가 삽입곡으로 나오길 기대했다면 내 지나친 욕심일까. 이런 아쉬움은 어차피 "그럼 니가 영화 만들어"라는 답을 들을 가능성이 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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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반부가 마냥 밝지는 않다. 진행해야할 이야기가 있으니 중간중간 닥터 백과 미스터 최, 그 중에서도 주로 귀공자와 긴머리(정다은)가 등장해서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연기 내공으로 따지면 결코 모자라지 않을 이들인데, 전반부에서는 그렇게 신통치가 못하다. 이는 작품이 보여주는 대사 쓰기 문제가 크다. 자윤과 명희 간의 일상적인 대사들은 괜찮지만 긴장감을 조성하는 악역 집단이, 안 그래도 외형이 중2병스러운데 이들로부터 거론되는 초인과 관련된 설정들을 비롯한 전체적인 대사빨도 그 수준이라서다. 몰입에 애로사항이 꽃핀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영어 대사의 오글거림도 모자라서 어느 시점부터는 의미없이 위악적이기만한 '씨발' 이 자꾸 말마다 붙는 바람에 듣기 피곤해질 정도다.

 

이 부분은 박훈정 감독이 각본가로 명성을 먼저 얻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해서 실망의 정도가 더 커진다. <부당거래>야 류승완 감독이 팟캐스트 방송에서 '전체적인 대사는 다 내가 쓴 것' 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으니 제외하고. 분명 박훈정 감독은 <신세계> 정도의 대사 감각은 갖고 있었다. 그런데 <마녀>를 보고 있으면 <신세계> 마저도 다양한 욕설 덕에 대사 감각이 좋았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대사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이며, 박훈정 감독은 전작들처럼 연기와 분위기보다 잔혹한 폭력 연출에 주로 기대어 악역의 위험성을 부각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무난하기만한 연출. 그리고 이전작들에서 보여준 연출 방식의 반복. 이것이 <마녀>의 전반부인데 심지어 길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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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녀>는 실패작인가?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작품은 전반부 아쉬움을 중후반부에서 휘몰아치듯 등장하는 액션 장면들로 상당부분 만회한다. 전반부에서 중2병 집단처럼 보였던 악역들은 후반부에서 피칠갑 액션을 펼칠 때 멋이 넘쳐 흐른다. 후반 액션을 위해 전반부 드라마를 오롯이 갖다 바친 형태가 됐지만, 의외로 그런 무리수가 잘 통했다고 봐야겠다. <마녀> 제작 소식이 들렸을 때, 처음에는 '초능력을 쓰는 소녀' 이야기라길래 <캐리>나 <초능력 소녀의 분노>같은 작품 속 장면들이 구현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작품은 의외로 <맨 오브 스틸>같은 액션 스타일을 보여준다. 초인들이 폐쇄 공간에서 날아다니거나 벽을 타고 뛰어다니는 식으로 싸워서인지 <블레이드> 연작이 연상되기도 한다.

 

애초부터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또 적당히 베끼겠거니 생각하긴 했다. 신인 배우 김다미가 보여주는 압도적 존재감이나 단숨에 분위기를 뒤바꿔 버린 자윤에게 부여된 압도적 강함, 폐쇄공간이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벽을 뚫는다거나 뭔가를 파괴함으로써 초능력보다는 힘이 부각된다는 점. 이 세 가지가 <마녀> 속 새디스틱한 연출과 만나 굉장한 기운을 분출한다. 박훈정 감독은 다른 건 몰라도 가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 솜씨가 있어 보인다. <마녀>의 액션 장면은 보는 사람의 궁금증과 기대감이 절정에 달했을 때 등장한다. 히어로가 악역 수준으로 진짜 악역들을 잔혹하게 농락하며 시원스럽게 학살한 후 길게 끌지 않는 적절한 타이밍에 퇴장한다. 불량식품 마냥 자극적인데, 그래서 감질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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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드라마적인 부분을 통해 부각될 줄 알았던 주제의식도 액션을 통해 잘 전달된다. <마녀>의 주인공 자윤은 악역들을 잔인하게 갖고 놀다 죽이는 안티히어로적 속성을 가진 '히어로' 다. 악역 집단을 초토화시킨 후 <마녀>는 여지껏 만들어진 박훈정 감독의 작품들 중 가장 맑고 고운 주제를 전달한다. 이게 결국에는 마음을 곱게 쓰라는 얘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후반부에서 마침내 정체가 드러나는 자윤의 진짜 모습은 비범한 여고생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만들어졌고 악역들이 아무리 발악해봐야 이길 수 없는 초인병기다. 도입부에 그녀가 도착한 농가도 우연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간 것임이 밝혀지며, 그녀가 세상 모든 것들에게 일부러 맞춰주고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마녀>는 인간적인 초인이 아니라 인간인척 해주는 초인의 모습을 그리며, 그녀는 괴물을 잡으려다 자기 자신이 괴물이 되진 않을까 따위 고뇌는 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괴물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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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머리꼭대기에 있는 자를 매혹시키려면 마음을 얻어야 하거늘, 작품 속 악역들은 자기들 마음 속에 깔린 탐욕과 분노를 보이면서 그녀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결과는 처참하게 전멸당하는 것 뿐이다. <마녀> 는 자윤이 그들에게 무쌍 찍는 순간은 거의 '악마를 보았다' 톤으로 보여주고, 돌아온 그녀가 병실에서 아버지와 대화할 때는 정서적으로 울림이 큰 순간을 보여준다. 키워질 곳을 선택한 사람은 자윤일지라도, 그녀가 지금 같은 모습으로 자라난 데에는 스스로가 맞춰준 부분 외에 어머니와 친구 명희가 끼친 영향이 분명 있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머리꼭대기에 있는 자윤은 그 사실을 깨닫자 오랫동안 가만히 침묵한다. 그녀의 침묵은 마치 암묵적인 인정같아서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자윤이 이들에게 만큼은 마녀가 아니라 히어로로 남아야 겠다고 마음 먹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마녀>는 분명 곱고 맑은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초인의 비인간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군상들이 지닌 바람직한 면모와 그에 대비되는 타락의 초상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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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고 나니 당혹스러웠다. ​박훈정 감독작 중 그나마 <대호>만 볼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기대도 하지 않은 작품을 호의적으로 봤으니. 분명 다음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마녀>의 야바위질은 성공한 셈이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야바위질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못돼먹은 표현일까. 김다미라는 배우를 발견한 업적도 있고, 기시감 느껴지는 액션 연출을 나름 고유하게 변주한 측면도 보인다. 근데 보고 나니 도대체 속편을 어떻게 만들려고 그러나 상상이 안 된다.

 

작품이 인상적일 수 있었던 데에는 액션 덕이 크지만 동시에 액션의 분량, 액션이 등장할 때까지 끊임없이 바람잡았던 효과가 컸다. 속편부터는 세계관이 더 드러날텐데, 이는 주인공의 매력만으로 메울 수 있는 지점이 아니다. 어떤 세계관을 납득시키려면 드라마적 부분이 뛰어나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작품의 무난하기만한 전반부를 생각하면 보완해야 할 지점도 많아 보인다. 활극적인 부분에서도 본격적으로 변하면 등급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테고.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서 <마녀>의 속편은 다른 작품들의 속편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속편에서는 욕 쓸거라면 씨발만 남발할게 아니라 사람들이 온라인 댓글로 인용할 수준으로다가 찰진 욕설들이 개발됐으면 싶고, 대사가 덜 중2병스러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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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VOD 가격이 15000원을 넘어가는 건 인간적으로 심했다. 극장에서 봤으니 망정이지.

 

2) 조민수 배우의 연기가 여러모로 당혹스럽다. 그녀는 김기덕쿵더러럭 감독의 <피에타> 에서 "그놈도 불쌍해. 강도 불쌍해" 따위 대사마저도 몸으로 체화해 명연기로 승화시킨 배우다. 그런 그녀가 <마녀> 에서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역을 맡았는데, 외형은 더할 나위 없으나 입을 여니 뭔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아내인 이명희의 순한 버전을 보는 느낌이다. 더 놀라운 점은 그런 괴이한 연기가 감독 의도였다는 거다. 의도가 뭔지는 알겠는데, 여튼 당혹스러웠다.

 

3) <마녀>와 이해영 감독의 <독전>을 보면서 느낀 의문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두 작품은 15세인데 도대체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왜 청불 등급을 받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상류층을 담금질하면 청불을 받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