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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사건을 두고도 누구는 재채기 한 번으로 끝낼 일을 누구는 감기처럼 앓고, 누군가는 열병으로 며칠간 앓아 눕는다. 모두 개인의 면역력 차이다. 해서 '삼풍사고'에 대해서도 나는 왜 다른 사람에 비해 열병을 앓았나 생각했다. 당시 내가 불행에 대한 면역력이 최대치로 낮아졌을 때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오늘은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지만, 불행의 연장선 '그 시작'에 있었던 일을 말해 볼까 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연재를 할 때에 어지간하면 가족 얘기를 쓰지 않으려 했다. 헌데 내 생을 관통한 불행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얘기를 빼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내키지 않지만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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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우리 엄마다. 바로 우리 가족이 엄마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6.25 전쟁 중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러다 24살 봄, 먼 친척의 소개로 엄마는 청주의 한 다방에서 아버지와 선을 보고, 그 후로 두 달 뒤 우리 집으로 시집왔다. 훗날 이 일을 두고 내가 엄마한테 "그때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물으니 엄마는 내게 "그냥 한 여름에도 모직 치마를 입는 게 너무 싫었어" 라고 심플하게 답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잣집으로 시집만 오면 단박에 팔자가 필 줄 알았던 엄마의 생각은 대단히 큰 착각이었다. 엄마는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부엌으로 가 잠을 잘 때에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충북의 소도시에서 한약재 농사도 짓고, 도매상을 했기 때문에 집에서 밥을 해 먹여야 하는 일꾼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평소에도 누가 그냥 노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엄마라고 예외가 될 수 있나. 덕분에 엄마는 밥도 부엌에 서서 되는대로 먹어야 했다고 한다.

 

식을 올린 후 얼마 안 가 임신을 했는데, 하필 그때 아버지가 군대에 갔고, 그나마 아군이었던 아버지마저 사라지자, 엄마는 시댁 식구들로부터 대놓고 모욕적 언사를 들어야 했다. "과부가 키워 그런가, 애가 본이 없구나, 하긴 없는 집에서 네가 뭘 보고 컸겠니" 같은 말들 말이다.

 

그렇게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며 아빠도 없이 큰 아들을 낳은 엄마는 몸도 마음도 많이 상해 산후통으로 오래 자리보전을 했기에 자연스레 할머니가 큰 오빠를 돌봤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가 제대를 했고,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며 엄마는 아빠를 부추겨 서울로 분가를 감행한다. 

 

물론 할아버지는 예상대로 아들 내외의 분가를 완강하게 반대했는데 뜻밖에도 할머니가 조건을 하나 내걸어, 아들 내외의 분가를 허락한다. 그것은 서울에 가더라도 아기는 두고 가는 조건이었다. (사실 우리 할머니는 아버지의 의붓어머니고, 할머니 배로 낳은 자식이 없다. 태어나 처음 아기를 안아 봤으니 예쁘기도 했겠지)

 

당시 엄마는 일단 자기가 너무 죽겠으니까, 아들은 몇 달 뒤에 찾으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일단 서울로 왔다. 그 후로 엄마는 자신의 큰 아들이 6학년이 될 때까지 집으로 데려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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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이사를 온 엄마 아빠는 신수가 편해지자 그 후, 삼 년 터울로 작은 오빠와 나를 낳아 길렀다. 엄마는 늘 이 시절이 자신의 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막내인 나는 본인이 몸도 마음도 편할 때 가진 자식이라 그런지 낳고 기르는 과정도 굉장히 수월했다고 한다.

 

낯도 안 가리고 순해서 아무 한테나 잘 가 안기고 얼굴에 열꽃이 피어도 울지 않아서, 거저 크는 것만 같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아주 오래 업고 다녔고 덕분에 내게는 햇살 좋은 날, 엄마의 따뜻한 등에 얼굴을 비비며 잠들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이후, 엄마는 큰 오빠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큰 아들을 서울 집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때도 반대를 했지만, 다른 건 몰라도 학교는 서울에서 보내야 한다는 아버지의 명분에 어쩔 수 없이 손주를 내어 주셨다. 그렇게 큰 오빠는 어느 날 커다란 짐 보따리와 함께 우리 집에 나타났다. 사실 나도 전에 큰 오빠를 보긴 봤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어쩌다 한 번 시골 가면 보는 사람이 오빠라는데 알게 뭔가, 딱히 와닿지 않았다(참고로 우리는 학년으로 7학년, 나이로는 6살 차이가 난다).

 

아무튼, 아이를 낳고 길러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족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찾아와서 "안녕, 나 사실 너의 가족이야 우리 이제부터 잘 지내볼래?" 한다고 그 순간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퍼지며, 서로가 뜨겁게 가족임을 확인하는 게 아니다. 가족이란 살을 맞대고 살며, 생의 서사를 함께 만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큰 오빠랑 나는 어느 날 신림동에 있는 왕갈비 집에서 함께 돼지갈비를 구워 먹으며 느닷없이 가족이 되어 버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일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다. 일단, 막 사춘기가 시작된 시점의 큰 오빠는 서울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가족으로부터 이질감을 느꼈으며,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그리워했고 시골로 다시 돌려보내지 않는 부모님을 원망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또 그분들 나름대로 손주를 내어주고 그리움에 가슴 아파했다. 모두에게 몹쓸 짓이었다.

 

그땐 몰랐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당시 큰 오빠 심정도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아니 그렇지 않은가, 여태 자기를 업어키운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였고 진짜 부모라는 사람들은 서울에 따로 살고 있고, 자기 말고도 애가 둘이나 있고 그들 끼리는 이미 너무 친하고... 그래서 그랬는지, 어째서 그랬는지, 이 무렵 큰 오빠는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고, 이 때문에 아버지에게 매일같이 야단을 맞았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별 것도 아닌 걸로 애를 잡는다고 뭐라고 하다 기어이 둘이 싸우고, 더러는 밥상도 엎어지고 화분도 깨지고 그런 일이 생기며, 일 순간에 집안의 분위기가 180도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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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큰 오빠는 부모님이 안 계시는 날이면 나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때린다는 게, 그냥 아이들 장난으로 툭툭 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온몸에 피멍이 들고 입안에 핏물이 고이게 때렸다. 아마 내 생각에는 자기가 증오하는 대상인 부모가 가장 아끼는 나를 때리는 게 자기가 겪는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라면 그저 기분이 안 좋을 때, 내가 눈앞에 알짱 거렸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큰 오빠에게 거의 매일 같이 얻어터졌다.

 

어린애가 그렇게 맞을 때까지 부모라는 사람들은 뭘 했냐고? 당시에 엄마 아빠는 돈을 버느라 바빴고, 무엇보다 큰 오빠가 나랑 작은 오빠한테 자기가 우릴 괴롭히는 걸, 엄마 아빠한테 이르면 죽여버릴 거라고 해서, 나는 어쩌다 멍이든 걸 엄마한테 걸려도 거짓말을 했다. 

 

이게 어디 끝까지 지켜질 비밀인가, 결국 이 사실을 아빠가 알게 됐고, 아빠는 그날 큰 오빠를 정말로 사정없이 팼다. 그야말로, '팼다.'

 

그러자 그는 이제 내 몸에 멍이 안 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괴롭혔다. 더 이상은 설명하지 않겠다. 한 마디로 지옥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노상 우리 관계를 예의주시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내 몸에 든 멍 자국을 보고 나랑 큰 오빠를 앉혀두고 대질 심문을 시작했다.

 

"너 사실대로 말해, 얘 때렸지"

 

"아니요"

 

"그럼 네가 대답해, 오빠가 때렸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 큰 오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요"

 

그러자 아버지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내게 시선을 거두어 큰 오빠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얘가 아니라고 하니까 이번엔 그냥 넘어가, 하지만 앞으로 다시 한 번 얘 건드렸다가는 그때 넌 진짜 내 손에 죽어"

 

그리고 그때 나는 큰 오빠의 눈이 겁에 질리는 걸 보았다. 그 후로는 참 이상도 하지? 나는 더 이상 큰 오빠가 무섭지 않았다.

 

이 일 때문이었는지, 세월이 흘러서인지 그 후로 나는 큰 오빠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이 일이 나나 작은 오빠에게는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작은 오빠는, 어느 날 나타난 힘센 형에게, 얻어터지는 자기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나는 또 나대로, 때리는 큰 오빠를 말리느라 공연히 얻어맞는 작은 오빠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그런 연유에서 작은 오빠랑 나랑은 보편적인 가정에서 자란 남매들과 좀 다른 우애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불행을 우리는 아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아니까, 너무나도 슬픈 얘기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얘기를 왜 하냐면, 큰 오빠가 나를 때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너는 나를 아프게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다치게 할 수는 없어'

 

그리고 이 말은 훗날 내게 이어진 모진 세월들을 버텨올 때, 나를 지켜주는 만트라가 되었다.

 

"아무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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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처음 했을 때 내 나이가 겨우 예닐곱 살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라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바로 사랑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족과 친지 이웃으로부터 받은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말이다. 엄마는 나를 낳은 후 몸이 많이 약해져서, 나는 오히려 외할머니 손에서 많이 컸는데, 엄마와 몸이 떨어져 있다 해도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한치의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할머니를 따라 친척 집을 떠돌 때도 나는 친척과 이웃들로부터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심지어 우리 둘째 외삼촌은 건설현장에서 날품을 파는 일을 했는데 가끔 우리 집 근처에서 공사를 했다. 내가 유치원에 다녀올 때 내 머리 위로 백 원짜리 동전을 하나 '툭' 하고 던졌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와 어떻게 외삼촌은 내가 지나가는 걸 이렇게 잘 알까' 라고 생각했다. 내가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그 일이 보통이 아닌 거라, 그 힘든 일을 하면서도 꼬맹이에게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던지기 위해 외삼촌이 그때 얼마나 애를 썼겠냐는 말이다.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저릿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일반적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깔려죽었을 여러 불행의 무게를 이고 지고 살았으면서도 '어찌 됐든' 나를 여태 지켜냈던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에 회사에서 곤란한 일을 겪었고, 그로 인해 가치관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마치 세상이 나를 향해 시험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직도 세상이 따뜻하다고 생각해?"

 

이 얘기는 다음에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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