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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전태일을 영화로 먼저 접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개봉했을 때 중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한 거다. 아마 전교조 소속이었던 사회 선생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은데, 90년대 보수적인 제주 교육계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꽤나 튀는 일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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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생전 처음 듣는 거 같기도 한 '전태일'이라는 이름. 스크린에 드리워진 흑백의 무거운 분위기. 홍경인이 전태일 역을 맡아 마지막 분신 장면을 대역 없이 소화했다던 연예 프로를 봤던 기억도 있고. 당시 영화를 봤던 내 소회는 대체로 이러했다. 아니, 소회랄 것도 없겠다. 서울 구경도 제대로 안 해 본 촌놈이라 청계천이 어딘지 알 길이 없고, 현대사를 배워본 적이 없으니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의미를, 산업화 시절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힘든 시절이 있었고 힘든 사람들이 있었고 제 몸을 희생해가며 선봉에 선 사람들이 있었다는 정도의 이해가 전부였다.


대학에 와서 어느 선배에게 <전태일 평전>을 선물 받았다. 당시 과반에는(학부제 세대라 '과'가 아니라 '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학부제 적용을 받지 않는 '과' 세대들도 학부생으로 남아 있었기에 저렇게 불렀다) PD 계열의 운동권 선배들이 소수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었을 거다. 삼수하겠다고 상경하기 전에 수개월 동안 공사장 실내 인테리어 작업, 골프장 조경, 주유소 주유원 등의 일을 하며 소위 '육체노동'이란 걸 경험해 본 내게 그 선배들은 한편으로 신기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웃기는 사람들이었다. 노동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랄까. 그러면서도 오가는 술잔 속에 몇몇과는 친해져 이런저런 책을 선물 받았는데 <전태일 평전>이 그중 하나였다. 


하룻밤 꼬박 새워 읽었다.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책이었다. 중학교 때 봤던 영화의 장면들이 하나하나 포개지면서 그땐 이해할 수 없었던 장면들이 가슴 절절하게 글줄로 다가왔다. 노동운동가들의 바이블이라는 이 책은 결코 노동운동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고 싶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였다. 이런 감동과 깨달음을 놓칠까 두려워 입대한 후에도 이 책을 가지고 들어갔고, 전역한 뒤에는 블로그에 글을 남겨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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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복학생 벤치'라 불리는 의자에 앉아 담배만 뻑뻑 피워대던 복학생 시절, 옆 방에 귀가 심하게 어두운 할머니가 홀로 살고 계셨는데 이 양반이 외로움을 덜고자 트로트만 주구장창 나오는 채널의 볼륨을 만땅으로 키운 채 주무셨더랬다. 덕분에 불면증에 걸린 난 예전에 즐겨보던 역사 다큐멘터리와 영화들을 잔뜩 다운받아 소주 몇 병을 곁들이며 보았는데(이때 알코올중독 초기 증상을 보였다는 건 비밀), 그 중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도 있었다. 영화에서 책을 거쳐 다시 영화로 온 셈이었다. 십수 년 만에 다시 보니 모든 장면이 온전하게 이해되었다. 이해가 되니 감정이 뒤따랐다. 특히 어느 여공이 기침을 심하게 하다 각혈을 하자 걱정돼 따라 나온 동료에게 씻을 데가 없다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는 분노 섞인 울음이 다 터져 나왔다.


'평범함'이란 게 당최 뭔지도 모르겠고 '평범하게 사는 것'은 더더욱 뭔지 모르겠어서 그냥 평범하지 않게 살기로 마음먹은 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 과정에서 제2, 제3의 전태일들을 보았다. 1970년대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지독하게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인간 대접 못 받아가며 고강도 노동에 시달렸다면,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직원 대접도 못 받아가며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 과거에나 있었던, 나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걸 역사라 여기는 소시민적 얍쌉함이 내게도 있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21세기판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현실이 밝혀지고, 21세기판 전태일이 생겨나도 크게 동요치 않는 사회의 분위기였다. 되려 집권층은 노동권에 반하는 정책을 개선책인양하며 내놓고, 한국사 교과서에 유관순보다 전태일을 다루는 비중이 크다며 어깃장을 놓는다. 웃기는 세상이라며 조롱만 늘어놓기엔 돌아가는 꼬라지가 너무 심각하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받았던 감동과 깨달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며 터뜨렸던 분노 섞인 눈물을 한때의 추억으로 치부할 수 없는, 전태일 열사 45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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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깃한기타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