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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1993년의 미국 방문 계기


1993년 어느 날 160cm가 될까 말까 한 아담한 체구를 가진 초로의 신사가 찾아와서 아들의 결혼식 주례를 서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주례를 부탁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네 가정을 이해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주례를 서줄 만한 사람을 찾다 보니 나를 찾게 되었다며 평범하지 않은 가족사를 들려주었다.


방장련 씨는 1950년도에 평양에서 고등학교(대학이 아니고) 1학년 때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전라남도 함평까지 내려와서 해안방어 임무를 수행하다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후퇴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지리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미군과 교전 중에 부상을 당한 채로 부대를 따라다니다가 국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비록 어린 나이에 온갖 고초를 겪은 그의 삶이 참담하고 불행하기는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래도 적어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는 이야기였다. 기막힌 이야기는 이다음부터였다.


방 씨는 엄연히 국제법상 전쟁 기간이었던 1952년도에 정규 군인으로서 전투를 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제네바협정에 명시되어 있는 바대로 전쟁포로의 신분에 적합한 처우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치산으로 취급당한 방 씨는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형무소로 옮겨져 10년 동안 징역을 살았다. 1950년도에 18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 징집되었다가 10년 만인 28살에 호적도 없이 형무소 출소 증명서 한 장을 달랑 들고 생소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로 나온 것이다. 


아까운 청춘을 감옥에서 허비했건만 출소한 이후도 조용히 살 수가 없었다. 좌익 용의자로 취급당해서 시도 때도 없이 안기부, 경찰, 보안사에 불려다니고 위협을 받고 조사를 받는 등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40년 동안 天刑의 삶을 살아야 했다.  


방 씨의 희망하는 바는 분명했다. 자신은 법적으로 전쟁 포로 신분이니 휴전 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살던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게 되어 있는 휴전협정 제3조 51항을 이행해 달라는 것이다. 즉 18살 때 떠나서 환갑이 되도록 꿈에도 잊지 못하고 살아온 고향이 있는 북한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방 씨가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 선뜻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설사 선생님은 북한이 고향이니까 가신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결혼한 부인과 이곳에서 출생해서 자라나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자녀들까지 데리고 갈 수야 없는 일이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 집 식구들은 보내만 준다면 모두 가고 싶어 합니다."라고 대답해서 또 한 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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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들이 북한 사회가 얼마나 살기가 어려운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남쪽 땅에서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산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굳이 북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하나였다. 40년간 이 사회가 그들을 너무나 못살게 굴어서 남한 땅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조선인민공화국을 꿈에도 못 잊는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곳에서는 적어도 그들을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다는 거다. 


그 후에 방 씨를 돕기 위해서 여러 차례 만나면서 만날수록 그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졌었다. 방 씨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 내 사무실로 여러 번 왔지만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혹은 내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만날 때마다 자기 문제에 대해서만 열심히 이야기를 했고 자기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와달라는 이야기만 했다. 나는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서 그의 가족관계와 생활상 등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나에 관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나의 시간을 많이 빼앗으면서도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고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를 위해서 국회 외무통일위원회 간사인 남궁진 의원과의 만남을 주선했더니 방 씨는 남궁 의원이 자기의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며 국회의원이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짜증을 냈다. 사실 남궁 의원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닌 이상, 방 씨의 일에 대해 사전 이해가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그의 상황이 쉽사리 이해를 못 하는 게 당연했다.


다른 사람의 문제로 여러 군데 연락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 등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위해 일해주는 사람에게 좋지 못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나로서는 그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인생을 살만큼 살아온 방 씨가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걸까.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그의 행동이 단순하게 개인적인 성격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40년이란 세월 동안 자기 방어적인 자세로 살아와야 했기에 남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 정부가 국제법을 지키지 않고 자기에게 부당한 처우를 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형식 논리상으로는 옳지만 전혀 현실과 동 떨어진 신념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고민했다. 방장련 씨의 북송문제를 국내에서 공론화시키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섰고 해외에서 공론화시키는 것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북한과의 통로가 있는 고 문명자 기자가 있는 뉴욕을 향하여, 미국으로 출발했다. 1993년의 일이었다. 




박지원 의원이 억지로 시킨 뉴욕 관광


이 시기, 마침 미국에 있는 정치인이 있었다. 박지원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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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평민당 국회의원으로 대변인을 맡고 있던 그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런 사람이 내가 뉴욕에 간다고 하니 시간을 조절해 만나기로 약속을 해주었다. 그는 당시 김대중 총재의 심부름으로 미국의 카터재단에 가는 길이었다고 했다. 

 

박 의원이 예약해준 호텔에서 아침 식사 시간에 만났다. 식사를 하면서 관광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럴 계획이 없다고 했더니 그래도 남는 것은 관광밖에 없다며 이야기는 저녁에 만나서 하기로 하고 최소한 일일 시내 관광이라도 해야 한다며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비서에게 일일관광 버스가 언제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극구 사양을 했지만 비서가 이미 버스가 출발했다고 하는데도 우리 부부를 억지로 차에 태워서 버스를 쫓아가서 다음 정류지에서 타도록 해주었다. 박 의원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뉴욕에 오래 살아서 현지 실정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 피곤한 탓에 버스를 타면 졸고 내리라면 내리고 하면서 일일 관광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주마간산 식으로 마쳤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한 탓에 자유의 아줌마 상도 보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올라가 볼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뉴욕을 3번이나 갔지만 이 때 박 의원의 강권을 끝내 사양했더라면 자유의 아줌마 상이 어디 붙어있는지 영영 모를 뻔했다.




시카고의 흑인 슬럼가


나는 미국에 가면 어느 도시를 가든 반드시 흑인들이 살고 있는 빈민가를 방문한다. 93년도, 아마 오버마가 커뮤니티 조직가로 활동하고 있었을 시기에 나는, 시카고 빈민가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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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교회 목사가 슬럼가에서 음식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교인 할머니에게 갖다 줄 물건이 있다고 해서 같이 나섰다. 흑인 거리로 들어서면서 권 목사가 옆에 있는 차를 쳐다보거나 손가락질을 하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고 주의를 주었다. 혹시라도 흑인들하고 시선이 마주쳤을 때는 억지로라도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 시선을 돌려야지 그냥 무표정하게 얼굴을 돌렸다가는 봉변을 당하기가 일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의 인상은 미국인들이 보기에 밥맛이 없을 정도로 표정이 굳어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흑인들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인들은 얼굴이 넓적해서 왼쪽 눈과 오른쪽 눈 사이가 백인들보다 넓기 때문에 종종 백인들의 눈에는 사팔눈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학교에서 아이의 눈이 이상하니 병원에 가서 진단을 떼어 오라고 해서 50달러씩이나 내고 안과에 가서 사팔뜨기가 아니라는 진단서를 떼어주는 울화통이 치미는 경험을 한 친구도 있었다.)


중심가로 들어갈수록 동네 전체가 폭격을 맞은 것처럼 불에 타 있었고 창문마다 유리가 깨져 있든지 아니면 나무나 벽돌로 막혀 있었다. 마치 막 전투가 끝난 지역 같았다.


흑인들이 하나둘 동네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백인들은 빠져나가고 빈집에 흑인들이 들어가 살다가 관리소홀로 집이 폐허가 되어 버리든지 아니면 아예 흑인들이 들어와 살지 못하도록 벽돌로 막아 놓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그 동네에 흑인이 사느냐 살지 않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집값이 결정된다 했다.


흑인 거리로 들어가면서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도 성한 모습을 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유리가 깨어져 비닐을 대신 붙이고 다니는 차도 있었다. 거리에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없는 흑인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빈둥빈둥거리고 있었다. 굶주린 짐승들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들은 무언가 조그만 문젯거리만 생겨도 금방 파리 떼처럼 달려들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만일 문제가 생겨서 교도소에 들어간들 동료들과 따듯한 잠자리와 음식이 제공되는 교도소가 집보다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흑인들은 교도소에 가는 것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낮에 경찰차도 한 대로는 다니지를 못하고 두 대가 같이 다녔다. 사건이 터져서 신고를 해도 경찰은 일부러 상황이 끝난 다음에야 나타났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동네의 다른 집과 차이가 없는 누추한 건물에 '더 좋은 삶의 집'이라는 조그만 간판이 걸린 집이었다. 문을 두드리니까 뚱뚱한 흑인 할머니가 문을 빼쭉 열어 권 목사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문을 열어줬다.


권 목사와 나는 차의 트렁크를 열고 미리 준비한 헌 옷들과 통조림들을 재빨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운반 도중에 그만 비닐봉지 하나가 밑바닥이 뜯어져서 깡통들이 길거리에 모두 쏟아지고 말았다. 길에 떨어진 통조림들을 다시 주워담으면서 주변의 흑인들을 의식해서 마음이 급해서 동작을 서둘렀다. 벌써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흑인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쫓기듯 서둘러 물건을 가지고 들어가려는데 할머니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흑인들이 언제 총을 들고 습격할지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개 3마리와 함께 살고 있는데 개를 방에 가두어 놓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송아지만 한 개 한 마리가 나타나서 덥석 앞에 선 권 목사에게 달려들었다. 할머니는 웃으면서 그 개는 물지 않는 개라며 괜찮다고 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나타난 것이 반가워서 그런지 자꾸 앞발을 들고 달려들며 핥아대려는 통에 영 성가셨다. 방에 갇혀 있는 개들도 사람 냄새를 맡고 컹컹대면서 문짝을 발로 긁어댔다. 


할머니와 작별인사를 하고 문이 닫힌 다음 자세히 보니까 현관문에 '오늘은 나누어줄 음식이 없으니 문을 두드리지 마시오'라고 쓰여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권 목사에게 "집안에 물건을 잔뜩 쌓아놓고 왜 저런 것을 써 붙여 놓았을까?"라고 물었더니 "매주 화요일에 음식을 나누어 주는데도 배고픈 흑인들이 아무 때나 와서 문을 두드리기 때문에 그렇게 써 놓았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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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의 나라


미국에서 이처럼 슬럼가만 헤매고 다닌 것만은 아니다. 총기 난사도 해 볼 수 있었다. 워싱턴 주의 주립대학이 있는 풀만이라는 서부의 소도시에 갔을 때였다. 주일 예배를 끝내고 점심을 먹는 시간에 우연히 총 이야기가 나왔는데 주립대학 생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강 교수가 "목사님! 총 쏘아보고 싶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럼요."라고 했더니 "그러면 제가 집에 좀 갔다 오겠습니다."하고 일어났다.


30분 후에 돌아온 강 교수는 갈 때는 승용차를 타고 갔는데 픽업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나는 험한 산길을 가려고 픽업트럭을 타고 왔으려니 생각을 했는데 웬걸? 오래가지도 않고 15분쯤 가더니 길에서 벗어나 야트막한 야산 하나를 돌아가서 차를 세웠다.


화물칸에 실린 박스를 여니 분대 병력의 화력에 해당할 만한 실탄과 여러 종류의 총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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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총들을 보고 깜짝 놀라서


"아니? 이것들을 다 빌려 왔습니까?"


"아녜요. 다 제 것이에요. 제가 가진 총을 다 모으면 여기 경찰서 화력보다 셀 걸요."


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총 수집 취미가 있습니까?"


"그런 것은 아니고 제가 데리고 있는 연구원들이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한 번씩 데리고 나서서 사격을 하다가 보니까 이렇게 많이 모으게 되더군요."


"위험하지 않습니까?"


"한 번 멍청한 녀석 때문에 사고가 날 뻔해서 지금은 안 합니다"


총알값이 비싸서 전에는 실험실에서 직접 만들어 썼는데 요즘은 사격을 잘 안 해서 그럴 필요가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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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박사가 총을 나누어주기 전에 나와 현지 목사를 번갈아 쳐다보고 "두 분 사이에 무슨 원한 관계없으시죠?"해서 한바탕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 무장을 하고 사격장을 향했다. 소총을 들자마자 긴장이 되어서 자동적으로 '앞에 총'하고 있는 내 자세를 보더니 현지 목사님이 "월남 참전 용사 자세가 딱 오시네."해서 또다시 웃었다.


한 목사는 사냥꾼 자세로, 나는 '앞에 총' 자세로, 강 박사는 막대기 든 자세로 각자가 총을 들고 메고 약간 후미진 곳으로 가니 땅바닥에 탄피가 무수하게 깔려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정식 사격장이 아니라 주민들이 심심하면 와서 사격을 하는 간이사격장인 셈이었다.


종류가 각기 다른 소총 4자루와 권총을 차례로 쏘았다. 군대에서 '누워 쏴' 자세만 해봤는데 이곳의 지형지물은 전혀 누울 형편이 못 되어서 '서서 쏴'자세로 하려니 조준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많이 쏠 수가 없었다.


미국 헌법에 총기 소지의 권리가 명시되어 있고 총기 면허도 실제로 운전면허 취득보다도 쉽다. 그리고 미국 가정의 '45퍼센트' 이상이 최소 1정 이상의 총을 소지하고 있고 전국적으로는 3억 개의 총이 있다고 했다. 값도 아주 싸서 보통 소총 한 자루에 200불이면 살 수 있고 대개 부부싸움용이 되는, 핸드백에 넣고 다닐 수 있는 20불짜리 권총도 있단다. 단, 총은 반드시 집에 보관해야 하고 허가된 사냥총을 제외하고 밖으로 들고나오는 순간에 불법이 된다.


미국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사회일지 모른다. 생각해보라. 저렇게 온 국민이 중무장을 하고서도 가끔씩 사고가 나서 떼죽음을 하기는 하지만 저 정도로 살아남아서 잘 돌아가는 사회가 어디 또 있겠는가? 아마 성질 급하고 극단으로 치닫기를 잘하는 한국 사람들이 미국인들처럼 총을 갖고 있다면 십 년도 안돼서 1/3은 전사 아니, 견사(개죽음)할 것이 아니겠나?


더욱이 적어도 정상적인 대한민국 남자라면 최소한 2년 이상 총을 가지고 놀아서 미국인들보다는 총을 훨씬 잘 다루지 않는가?




911테러에 관한 기억


8년 후,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아침에도 나는 미국에 있었다. 정확히 뉴욕에서 필라델피아 쪽으로 향하는 95번 고속도로에 있었다. 뉴욕으로 향하는 반대편 고속도로를 꽉 메우고 움직이지 않는 차를 보고 대형 교통사고가 났나 보다 하고만 생각을 했다. 라디오를 틀었으면 알 수 있었을 터인데 오랜만에 만난 동문들끼리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이야기를 하느라고 그럴 생각을 미처 못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집주인은 "아니? 이 난리 통에 어떻게 왔느냐?"고 깜짝 놀라서 오히려 우리가 놀랐다. 집에 들어가서 TV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의 폭파 장면을 보면서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주의 토요일 애틀랜타 시내에 가보니 벌써 시대를 내다보는 소수의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이 '아랍인들을 희생 제물로 삼지 마라', '전쟁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윤리적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들은 벌써 앞일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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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음날 테네시 주 네쉬빌에 있는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가서 기막힌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젊은 유학생들이 모인 교회였는데 지구가 뒤집어지는 사건이 발생한 그 주일에 복음 성가만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외계인 같아 보였다.


나는 그날 설교 시간에 "지금이 어떤 때인지 모르는가?"하고 질문했다. "이제 당신들 중에 한국군이나 미군으로나 전쟁에 나가서 미국 때문에 죽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겠느냐?"는 질문도 했다.


그 후 불행하게도 그 예언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아프간에 파견되었던 윤장호 병장의 전사로...


그 다음 미국 방문 때는 권총을 찬 애틀랜타 공항의 입국 심사대 직원들이 권총을 차고 있었다. (하루 종일 무거운 쇠 덩어리를 차고 있으면 허리에도 안 좋을 터인데.) 그리고는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물었다. "미국에 마지막으로 온 것이 언제였었냐? 이번에는 왜 왔냐? 얼마나 있다 갈 거냐?" 등등을 퍽 자상하게도 물었다. 그런데 대단히 거시기했던 질문은 "호주에 얼마나 있었냐?"는 질문이었다. (1993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 때는 호주시민권자가 되어 있었다.) 아니 호주 시민권자에게 호주에 얼마 있었냐고 묻다니? 내가 백인이었다면 절대로 그런 질문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호주에 얼마 있는 것이 미국 들어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잘못 직원의 심기를 건드리면 문제가 복잡해질까 보아서 '아! 이 직원이 특별히 개인적으로 나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구나'라고 좋은 쪽으로 해석하기로 하고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다음 질문이 정말 거시기 했다. "현금 얼마 있냐?" 이거 뭐 이민국 직원이 남의 호주머니 사정까지 알려고 한다. 보태 줄 것도 아니면서. 사실 나는 초청자 부담으로 갔던 것이기 때문에 돈을 많이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 집에 있는 자금을 총동원했더니 175불이 있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나는 무심코 사실대로 "175불 있다."고 하고는 '아차!' 싶었다. 다행히 그 직원은 내 인격에 감동(?)이 되었는지 "크레딧 카드는 있겠지?"하고 물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암 있고말고!"라고 대답을 했다. 사실은 나는 평생 크레딧 카드라고는 써 본 일이 없었지만.


86년 비장한 마음으로 도피성 미국행에 올랐던 이후 30년 동안 이러 저러한 일로 미국을 십여 번 다녀왔는데 대부분 돈을 쓸 일도 없지만 돈이 생길 일도 없는, 거의 무전여행수준의 일정이었다. 돈 생길 일이라고는 설교의 사례비밖에 없는데 내가 아는 미국 목회자들은 대부분이 가난해서 설교를 하고도 사례비를 받을 수 없었다. 교회에서 주는 것이니 받으라고 하면 안 받겠다고 거절하는 가벼운 실랑이를 하다가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 먹지."라고 하면 대충 상황이 끝난다. 그런데 사실은 그 교회를 찾아서 몇 시간을 가는 때도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손해가 나는 일일 때도 있다. 물론 내가 운전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나를 데려가기 때문에 돈이 두 배로 들었던 탓도 있다.




미국 여행보다 더 흥미진진한 대한민국 교도소 여행


십여 번의 여행으로 통산 1년 가까운 미국 생활을 했지만 위에서 쓴 뉴욕 강제 관광 사건(?)과 단체로 움직인 일 외에는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관광을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정말로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것은 미국 여행보다도 국내여행, 그것도 교도소 여행이었다. 국방부 호텔 밥은 먹어보았지만 법무부 호텔 밥은 먹어 본 일이 없는 내무부(지금은 행정안전부인지 안전행정부인지, 이름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혼란스럽지만) 호텔 밥은 여러 번 먹어 본 내가 한 번은 영등포 교도소에 가서 설교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세상에서 교도소의 드려지는 예배나 법회보다 분위기가 경건하고 진지한 곳은 없을 것이다. 교도소에서는 예배를 볼 때 모든 찬송은 가사의 내용과 상관없이 무조건 힘차게 행진곡풍으로 부르고 기독교에서 오면 구호를 외치듯이 '아~멘!' 소리가 우렁차게 강당을 진동한다. 아마도 스님이 오면 '나무아비타불' 소리가 진동할 것이다. 그러니 세상 물정 모르는 목사들이 교도소에 설교를 하게 되면 수인들이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은 줄 알고 분위기에 도취되어 열심히 "여러분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새 출발을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 것이고 어쩌구..." 하고 열심히 설교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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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설교를 듣는 재소자들은 한 마디로 'X까지 마라'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서.


대부분의 재소자들은 '자기들은 힘이 없고 빽이 없어서 잡혀서 교도소에 안에 있고 진짜 도둑놈들은 모두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경찰, 검사, 변호사, 판사들의 놀이에 자기들이 장기판에 장기 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교도소를 나가면 얼마나 찬바람이 부는지도 잘 알고 있고 나가서 한탕 멋지게 할 생각만 하고 있다. 이런 재소자들의 심리가 비뚤어지고 왜곡된 부분도 있지만 현실이 어느 정도 그런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교도소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탓에 "도둑놈 여러분!"하고 설교를 시작했다. 단 위에 앉아 있던 교도소 간부들이나 아래 앉아 있는 재소자들이나 '이게 무슨 소리인가'하고 모두들 깜짝 놀라서 웅성웅성 대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당신들이 있는 감방 안에서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경제사범으로 들어온 범털은 대우하고 개털은 무시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바깥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웃기는 짓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지금 현재 있는 좁은 감방 안을 지옥을 만들 수도 천국을 만들 수도 있는 거다. 거기서 그런 것을 만들지 못한다면 교도소를 나가도 또다시 들어오게 된다. 이게 바로 예수님 말씀이다."


그날 설교 후 기도가 끝나고 아멘 소리가 우렁차지는 않았다. 재소자들이 자신들의 속마음을 들켰기 때문일 거다.


1980, 90년대를 통과하면서 민주화 운동 진영에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라도 참여했던 경험은 나의 삶에 큰 보람이었다. 반면에 기억하기 싫은 일도 있었다.


그것은 자아성찰 보다는 상대를 비판하는 일에 더 유능한 운동권의 작풍 때문이었다. 운동권의 생리는 소속한 정파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서 끊임없는 사상논쟁들이 지치게 만들고 비현실적 사상논쟁들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상대방에게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되면 절대로 묻어 두지 못하고 꼭 짚고 넘어가는 것이다.


가장 징그러운 조직은 하나로 힘을 합하기보다는 자기들의 입장을 목소리 높여 주장해서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직이다. 그들은 동지가 될 가능성을 많이 가진 사람들을 오히려 적으로 만든다.


그들은 항상 자기들과 같은 점 보다는 다른 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일체의 타협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자아 성찰이 없는 곳은 희망이 없는 법이다. 외부로부터 자극이 와도 자기방어에만 급급한 개인과 조직은 절벽 앞의 존재들일 뿐이다. 그것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럴 만도 한 일이다. 그러나 이익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에 방어적이고 자존심 세우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미성숙의 상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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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죽음과 광주

그시절 문제학교의 채플린

교육감이 된 민선생과 전두환의 사회정화위원회

양 김(金)과의 인연

스트립 쇼와 빈민운동 사이

제정구, 원혜영 그리고 최기선

그 시절 대한민국 경찰

사람 돕는 권위

부패를 이기는 깡

떠난 사람들과 김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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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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