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생각보다 더디 낫는다. 감기만 걸려봐도 안다. 오늘은 좀 낫다 싶어도 내일 되면 또 아니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그렇다. 다치면 오래간다. 나도 마찬가지다. 상황에 따라 상태가 좋아지거나 나빠질 뿐, 완치에 대한 희망은 접은 지 오래다.
생애 초반에 엄청난 경험을 한 후, 꽤 오래도록 정서적으로 무감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매정하게 굴었는데, 정도가 좀 지나쳤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울면 왜 우는지,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지 않고, 왜 내 앞에서 우는지, 언제까지 울 건지를 궁금해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슬프지 않았지만,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타고난 성향이겠거니 했다. 한데 아니었다. 알고 보니 정서적 무감각 상태는 PTSD 증후군의 증상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아픈 거였다.
사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죽고 싶었다. 어차피 끝날 생이라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덕분에 우리 집은 매일매일 비상이었다. 엄마는 내 소식을 뉴스로 듣게 될까 한동안 TV를 못 봤고, 어디 모르는 곳에서 전화가 오면 가슴부터 쓸었다고 했다. 오빠는 전화를 안 받으면 안 받는다고 쫓아오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힘이 없으면 힘이 없다고 쫓아왔다. 직장도, 가정도 있는 사람이 허구한 날 우리 집으로 내달리기를 반복했다.
어느 날 오빠가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제발 이러지 말라고 너까지 죽으면 자기 못 산다고. 그 얘기를 듣는데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떤 죽음이든 결국 잊히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고. 그때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다에 잠겨있어 물 밖에 있는 사람들의 말이 하나도 귀에 닿지 않았다.
우연히 TV에서 <출가 그 후>라는 다큐를 보았다. 출가한 스님들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는데, 기분이 묘했다. 가진 거라고는 무명 법복 한 벌과 고무신 한 켤레가 전부인 스님들의 얼굴이, 종일 울력을 하고도 웃음을 잃지 않는 맑고 빛나는 얼굴이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전국의 사찰과 기도도량을 찾아다녔다. 인연이 좋아, 해인사 율원 출신의 몇몇 스님들과 친해져 차도 마시고, 불법도 배우고 했다. 불가의 가르침이 가뭄 끝에 만난 단비처럼 반가웠다. 그러니까 이 생에서 겪은 불행들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전생의 업과 연 때문이라니, 어차피 생이라는 것은 무상한 것이니 모든 일에 애착을 내려 놓으라니. 틈만 나면 전국 각지에 있는 사찰과 암자를 찾아, 절 수행을 하고, 법화경과 금강경 사경을 했다.
몇 해나 보냈을까, 법당 마루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있는데 어디선가 새벽 예불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 일인지 눈물 한 방울이 나와 마룻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러더니 가슴 깊은 데 맺혀 있던 눈물이 마구 치받쳐 올랐다. 한참을 울고 나니 신기하게도 더는 하루도 못 살겠다던 마음이 진정되고 '아 그냥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오른 지 7년인가 8년 만에 느낀 감정이었다.
이때 깨달은 것 하나는, 어떤 일이든 그 일을 떠올리는 게 불편하다고, 모른 척 하고 산다고 해서 그 일 자체가 없어지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를 속이면 사람들이 속고, 사람들을 속이면 세상이 속을 거 같아도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일은 끝끝내 마음속에 남아, 언제 어떤 이유로든 다시 불이 붙곤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생각보다 무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불행을 통제하거나 조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자체가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그 후로 내가 생에서 얻은 모든 것은 행운이며 잃은 것은 운명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알고 겪으면 좀 나을까. 아니, 천만에. 불행한 소식은 당일 오전에 받아보는 게 최고라고 본다. 미리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운명은 그렇게 뻔하지 않다.
글쓰기를 시작한 후, 요즘 처음으로 언어의 한계에 부딪혔다. 그 세월을, 그날들을 '아팠다', '불행했다'. '죽고 싶었다' 같은 고작 몇 개의 말들로 간단하게 정리한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요즘은 더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 내 얘기를 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난 수많은 날을, 법당에 무릎 꿇고 앉아 밤새 나를 몰아붙였던 시간들을, 더 잘 말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그럼 건물이든 배든 차든, 관련 엔지니어는 설계도면을 한 번 더 보고, 시행사와 시공사는 법을 준수하고, 감리기관은 관리와 감독을 철저히 하고, 관련 공무원은 인허가 기준을 확실히 하고, 국가재난위원회는 재난대처방안에 대해 더 연구할 텐데, 사법부는 선례가 되는 피의자들의 판례를 신중히 내릴 텐데. 이드리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책임을 느끼면 앞으로의 세상이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을까.
오래도록 내 상처를 들여다 보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지만, 다행히 요즘은 다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세월호는 말할 것도 없고, 타지로 끌려가 짐승 같은 취급을 당하며 일본군에게 유린 당한 그 때 그 소녀들, 위안부 할머니들, 그들의 외면당한 마음까지도 짐작해보게 되었다. 나는 딱 하루의 사고로 이 십 년을 잠들지 못했는데,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도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는데, 그분들은 어느 하루라고 발 뻗고 잤을까 싶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남은 생은 아픈 사람들과 연대해서 걸으려고 한다. 혼자 가는 길이 물론 편하고 좋겠지만, 여럿이 함께 걷는 일이 좀 고단하더라도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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