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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래와 캐릭터가 공연장 무대 위에서 대중에게 곧바로 내리꽂힐 수 있었다면 그는 오늘날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언론과 앨범을 통과해야 했던 과정에서 반사와 산란, 굴절과 간섭이 발생하고.

그 끝에 우리는 여러 장르를 능숙하게 다루는 보컬이자 수작 앨범들을 낸 프로듀서 지향 송라이터이자 최초와 최고 기록들을 지닌 공연연출가가 26년간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무대를 꾸몄음에도 왕년의 발라드가수로 남아있는 현상을 보게 된다. 

 

38일차 팬이 풀어봅니다. 그가 왜 인정받지 못했는가를. 

 

 

이번 화는 내 귀신 얘기로 시작해 그의 귀신 얘기로 끝맺으려 한다.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전, 구천을 떠돌던 어느 철학자의 영혼이 무슨 이유에선지 잠시 내게 깃들어 당시 초딩 3학년이었던 나로 하여금 일기장에 이렇게 쓰도록 한 적이 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연스러우며 자연스러운 대부분의 일은 옳지 않다.

 

거의 1년 동안 나의 일기장은 이런 잠언들로 가득찼는데 어느 날 참다못한 선생님이 날 도와주러 나서셨다.

내가 만약 다른 나라에 태어났다면 철학영재로 칭찬받았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나라에 태어났다면 학교 변소에 사흘은 갇혀있어야 했을 것이나 우리나라에 태어나 다행히 나는 따귀를 한 대 맞고 말았다. 선생님이 올려붙인 귀싸대기로 저 멀리 날아간 철학자의 영혼은 그 후로 날 찾지 않고 있다. 

 

이승환이 왜 인정받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을 푼다는 것은 그가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가 어떤 재능을 지녔건 어떤 노력을 기울였건 제대로 뜨지 못했던 것은 순리에 맞는 일이라고, 달리 되기 어려웠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번 미스테리를 푼다는 것의 의미이다. 물론 내게 왔던 그 철학자의 영혼에 따르면 이 자연스런 일도 역시 옳지 않은 일일 확률이 크다. 그러나 오늘 나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런데 잠깐. 내가 지금 음악에 대해 쓰려는 건가? 내가 양자역학 문제를 푼다고? 전에도 밝혔지만 난 정말 암것도 모른다. 내가 쓰려는 것은 정보왜곡에 관한 것이지 음악이 아니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 그럼에도 난 소심해져서 이승환씨에 관한 음악평론가들의 견해를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그의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거의 없었고 납득하기 힘든 주장들도 논거가 없다는 점에서 인터넷 댓글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전문가의 식견을 무시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차라리 이승환씨 기사나 포스팅에 달린, 비전문가들이 한두 줄씩 싸지른 부정적인 댓글들을 참고해서 그가 대중적으로 어디서 어깃장을 놓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곱지 않은 언어로 된 댓글들이 가끔 인용됨에 양해 구한다.

 

결론부터 밝히고 시작하자. 그가 언론/대중의 지지를 잃게 된 가장 큰 이유 두 가지를 들라고 한다면 난 그의 언론기피와 함께 노래의 다양성(장르, 창법, 특히 목소리의 다양성)을 꼽을 것이다. 그 다양성을 음미할 이유도 여유도 없는, 일반청자 및 전문청자들에게 그것은 지독한 편견만 갖게 했다고. 하지만 원인 하나만 딱 짚으라 한다면 그의 노래 <천일동안>을 고를 것이고 그러다 잠시 후 번복하고 그가 자기 회사 사장님이었다는 것을 가장 큰 패착으로 꼽을 것이다.

 

(참고로 음악산업, 즉 환경적 변화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씨디가 엠피3가 되든 멜론 스트리밍이 유튜브 음악감상이 되든 일단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기에 논의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지난 회에 그의 체력을 장인정신으로 푼 이승환학 석사논문을 제출했는데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분께서 그 논문을 자신의 페북에서 정력을 증명하는데에 써먹는 경악할 행태를 보였는 바, 내 전공 학문에 대한 프라이드가 일거에 무너지고 말할 수 없는 참담함으로 가슴 속에 피가 역류하며 면역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현상 속에서도 그에 관한 악성댓글을 모으기 위해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쓰레기장과 시궁창, 정화조를 뒤지고 다녀야 했으니 거기 살던 뇌 파먹는 아메바 같은 게 나한테 들러붙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번 글이 좀 길다면 쉬다가 나중에라도 와서 마저 읽어주길 바란다. 뇌 파먹는 아메바를 무릅쓰고 쓴 글 아닌감.)

 

 

 

<정보왜곡의 원인>

 

1.언론 기피

 

1.1.불투과

일단 그가 어느 정도로 안 유명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부터.

난 TV를 별로 보지 않고 대중음악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거의 없다. 그런 나도 김건모, 신승훈, 이승철, 서태지, 신해철, 윤종신,유희열 또한 김장훈, 싸이...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알고 있었고 노래도 몇 곡 알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승환씨의 모습을 알게 된 것은 <위대한탄생2>에 대한 신문기사를 통해서("택배"). 즉 내가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인지하게 된 것이 그가 활동한지 22년 만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언론노출빈도가 위에 언급한 그 어떤 가수보다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핫한 대중가수였던 1, 2집에서 <이오공감>을 거쳐 3집까지 활동하던 시기에도 그는 tv에 심하게 안 나와서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보던 시청자들이 저 사람은 누군데 나오지도 않고 계속 2등을 하나 하는 의문을 갖게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나는 밥 먹을때마다 위에 언급된 가수들을 tv에서 본 기억이 있지만 그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언론과 접촉이 많지 않은 와중에도 안 좋은 경험을 누적하게 된다. 그가 한 말이 이상한 말이 되고 취재하지 않고도 취재한 듯 보도되고 또 촌지와 굽신거림의 문제... 

그러다 그는 다음편 미스테리에서 상술할 귀신소동으로 결정타를 맞는다. 그는 이 때 아예 세상과 자신이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러 자신을 드림팩토리 공장내에 유배시키고 공연할때나 기어나오는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앨범파트에서 말하겠지만 그는 대중의 지지를 버리고 자신만의 아트의 세계로 떠나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공장 안에서나마 세상과 소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들거나 "나만의 울타리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하고 싶어서" 잡지도 발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발신하는 모르스부호를 해독하고자 했던 것은 오로지 그의 팬, 드팩민들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바짝 언론에 나왔던 것은 2011년에서 12년에 걸친 일로 콘서트장의 빈좌석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것을 몇 년간 경험하고 느낀 위기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지난회에 나는 그가 블럭버스터를 만드는 인디음악/공연인이었다고 했는데 비슷한 그림이 여기서도 그려진다. 

그는 주류음악을 하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근본에 충실했다. 앨범에 대한 거의 편집증적 완벽주의, 왜소한 몸의 존재를 순식간에 지워버리는 라이브 콘서트의 카리스마, '드림팩토리'라는 자가발전 시스템의 완성 그리고 언제나 놓치지 않는 '사랑'의 선율들." (2001 강헌)

 

"아티스트로 생각하자면 '이승환', 가장 모범적이었던 것 같아요. 90년대 데뷔한 이래로 지금까지 쉬지 않고 활동을 하고 있고, 최고 수준의 공연을 보여 주었죠. 그리고 자기의 모든 앨범을 수작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았을 때는 장인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나 생각해요.​" (2006 김영대 )

 

나 역시 그가 언론노출 대신 앨범과 라이브로 대중과 만나온, 그것도 쉼없이, 매 스텝 최선의 흔적을 느끼도록 해온 음악인이라는 점을 들어 지난번에 그에게 모범적이란 수사를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근본에 충실한 모범적인 가수라니, 이 말은 애들에게 착하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위선적인 칭찬 아니겠는가. 넘 착하네, (성공하긴 힘들겠어.)

 

 

1.2.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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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그림의 예. 아내와 장모

 

이승환씨의 그림은 걸핏하면 이중그림, 이렇게 보면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저렇게 보면 비웃고 싶어지는 이중그림이다.

 

주류음악을 하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인. 이렇게 보면 모범적인 가수의 초상인데 달리 보면 양쪽 진영 모두에서 욕하고 싶게 만드는 꼴이 아닌가. 

 

그는 발라드가수 주제에 방송을 타려고 들지 않았으며, 게다 꼴에 락을 한다고 많은 이들에게 더욱 고깝게 느껴졌을 것이고 방송을 타지 않아 필연적으로 겪게 될 낮은 인지도는 그의 성취를 음미할 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더욱 낮은 평가를 이끌어 내었을 것이다. 

언더진영에서는, 밀리언셀러 발라더가 락을 한다구? 그의 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그가 락페스티벌에 오면 발라더를 외면함으로써 가오를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냥 주류가 아니라 완성도를 끈질기게 추구하는 주류 음악인이었다. 그렇다면 이 이중그림은 다시 모범적인 가수의 초상이 된다.    

 

"이승환은 조용필이 토대를 닦은 한국 팝, 곧 한국 주류음악의 진지한 계승자면서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진영의 방법론적 핵심을 내면화하는 행복한 조화를 달성했다." (1997 강헌)

 

그러나 '행복한 조화'의 '행복'이 적어도 이승환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2.앨범의 다양성

 

2.1.목소리와 창법의 다양성이 주는 왜곡

 

언론을 통과하지 못한 그는 앨범과 콘서트로 대중을 파고 들어야 했다.

<이오공감>을 포함하여 3집까지 그는 이것을 성공시킨다. 

그런데 이 성공에는 발라드라는 장르와 이승환의 목소리 및 표현력이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인데 그는 벌써 3집에서 이 성공요인과 결별할 수순을 밟는다. 한 앨범 안에 다양한 장르, 다양한 목소리, 다양한 창법을 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4집 이후 이 다양성은 전방위적으로 심화된다.

 

이승환씨는 자신이 발라드가수였다가 락을 해서 망한 케이스라고 몇 차례 밝혔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지나친 단순화를 무릅쓰자면, 나는 그가 락을 해서가 아니라, 락커 지향 보이스로 발라드를 해서 대중적으로 망했으며 락커로 완벽히 전향했다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발라드를 포함한 온갖 장르를 붙들고 있는 그의 태도가 평단과 매니아층이 그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본다. 

 

그는 대중에게서 사랑받았고 그럴 자격이 충분했던 포근하고 순수했던 목소리, 그리고 가끔씩 보이던 뛰어난 서정적 표현력을 3집에서부터 자제하고 거의 모든 곡에 다른 목소리와 다른 창법을 시도하면서 점차 대중의 외면을 자초하게 된다. 다양성이라니. 

 

대중과 언론은 서로를 몸서리치게 싫어하면서도 침흘리며 숭배하는 등 하여간 징한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만한 온갖 생난리를 떠는 관계인데 의외로 이들의 뇌는 하나이다. 즉 하나의 뇌를 공유하는 샴쌍둥이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뇌는 걸핏하면 과부하로 정지되곤 하는 저사양적 특성이 있어 이들은 노래 한 곡으로 가수의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다양성이라니.  

 

누구나 그의 노래를 한 곡쯤은 들어볼 수 있으며 그 한 곡은 <천일동안>이나 <붉은낙타>, <물어본다>와 같이 비교적 알려진 노래일 가능성이 클텐데, 그 누구나는 거기서 그가 사용한 가늘고 떨림이 많거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고 그를 향한 길목에서 넘지 못할 문턱을 마주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목소리 뷁" "락한다면서 간드러지는 목소리 내기 시작해서 끊었음")

 

나 역시 내가 처음 접한 그의 목소리가 <가만히 있으라>의 힘 뺀 담담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내가 처음 접한 것이 예컨대 <물어본다>의 목소리였다면 그의 노래를 계속 찾아볼 생각을 했을까? 

이승환이 다른 노래에서는 부드럽고 담담하게도 부른다고, 또 가성과 미성, 탁성을 자유롭게 오가는 소리를 듣도록 한 곡만 더 들어보라고 바쁜 샴쌍둥이의 길을 가로막을 수는 없는 일. 

 

<천일동안>이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이며 스테디셀러이긴 하지만 이 노래에 대한 평단의 반응과는 별개로, 대중이 열광했던 것은 아니다. 언론/대중은 이 노래가 다른 목소리와 창법으로 불리기를 원했던 듯 이승환에 대한 희화화와 폄훼(예컨대 작사도 이승환의 것이 아니다.)를 낳았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 중이다.   

 

<천일동안>으로 유명해진 그의 창법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귀를 닫게 된 계기가 된다. 그가 다른 노래는 다른 창법으로 부른다 한들 핫한 예능에서 그들의 귀에 그가 다르게 부르는 노래를 들이부어주지 않는 한 그들이 스스로 귀를 열 리는 만무하다. 결과적으로 <천일동안>은 그가 대중적 지지를 잃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된 노래이다.    

 

"취향의 호불호를 조금만 다독거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당대의 싱어송라이터 이승환의 앨범은 언제나 변함없이 듣는 이들에게 포만감을 선사한다." (강헌.1997)

 

문제는 호불호를 누가 다독거리겠는가의 문제. 그럴 여유도 이유도 없다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이 <천일동안>에 매료되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어대는 동안 이승환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노래하는 왕년의 발라드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앨범 단위로 그의 노래를 감상하는 일은 더욱 드물어질 테니 그의 다양성은 음미될 기회를 더욱 얻지 못하고 언론/대중에게 한 곡이 주는 편견은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2.2.장르의 다양성이 주는 왜곡

 

4, 5집 이후 만약 그가 아트록의 세계로 훌쩍 떠나 버리든가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실험적인 음악으로 바로 뛰어들었다면 평단은 그를 계속 주목했을 것이고 지금 형성된 매니아층은 훨씬 두터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대중에 대한 고려를 멈출 수 없었고 "반 발자국씩만 앞서 가는 게 나에게 어울린다"며 팬들의 승인과 함께 점진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향해 가려 했던 것 같다. 또한 자신이 발라드와 여타 장르를 하는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으며 더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4집의 <천일동안> 이후 뽕끼가 배제된 세련된 팝을 구사하는 게 이승환의 음악적 목표였다고 평가하는 분들도 있으나 그는 뽕발라드를 아직껏 놓지 않고 있으며 이걸 락버전으로 편곡하여 뽕락을 하기도 한다. (거슬리는 표현은 모두 이승환씨 본인 표현). 그리고 그는 한국전통음악적 혹은 오리엔탈(?) 색채가 가미된 곡들을 여럿 만들었으며 내게는 대부분 성공적으로 보이나 이 모든 것이 상당수의 교양있는 청자들에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진지한 열정없이 산만한 보여주기식 구성의 일부일 뿐. ("장르소매상"). 

 

"이승환은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 양자를 아우르는 음악적 스펙트럼을 구축해 왔습니다. 가장 고급스러운 팝을 과시하는 대중가수 이승환과 가장 대중적인 록을 보여주는 록커 이승환,  하지만 오버그라운드에서는 지나치게 소수지향적이라며,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뽕기가 넘친다'고 비판합니다." (블로거 Ritprayer)

 

이것은 다시 이중그림. 같은 그림을 달리 보면,

 

"이승환은 팔색조의 다채로운 장르의 날개를 가지런히 빚어낼줄 아는 주류의 거의 마지막 수호자다." (강헌.1997)

 

비록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으나 그의 4, 5집은 평론가, 매니아들에게 주목받는 앨범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앨범에 대해서는 점점 저평가의 시기를 거치다가 9집 정도에서 다시 평가를 받게 되지만 그에 대한 주목도는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데 과연 6집 이후의 앨범이 잘못 만들어져 청자들을 실망시켰던 것일까? 그의 디스코그래피 내에서 상대평가는 있을 수 있지만 수준이하로 비판을 받거나 나아가 관심의 대상이 될 가치가 없었던 작품이 있었던가? 다양한 장르와 혼성장르를 다루는 솜씨가 점점 능란해지는 느낌과 저 먼 아트의 세계로 빠지지 않고도 그가 벌이는 실험들을 음미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앨범이 락 혹은 발라드로만 가득했다면 내가 그의 앨범을 듣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을 것이다.

 

 

2.3.장인으로서의 포지셔닝이 부르는 폄하

 

4집 <휴먼>과 5집 <사이클>에서 사람들을 놀래켰던, 기존의 한국가요와 단절적으로 느껴지도록 세련되게 편곡된 팝과 선진국적 사운드는 점차 보편화되고 사람들이 이승환에게 또다른 새로움을 기대할 때 그는 장르의 다양성과 세련된 편곡, 사운드 개선에 더욱 천착하는 모습으로 답한다. 5집 이후 그를 매너리즘으로 공격하는 것은 사실 가장 근거없는 비판으로 그는 차라리 누구 말대로 발전이 습관이라고 해야할까, 한번도 안주한 적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보컬로서 프로듀서로서 더 다양한 장르를 더 잘 다루고 더 질높은 사운드를 빚어내는 장인의 것이었으니 예술가적 도발과 도전을 기대했던 사람들을 필연적으로 실망시키고 주목할만한 다른 음악인들이 계속 등장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관심은 점차 식어간다. 

 

하지만 또 이중그림.

"[HUMAN]과 [CYCLE]을 통해 이승환은 자신이 추구해야 할 음악적 방향성을 찾았다고 보는 게 맞아요. 자기 손으로 자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론을 완성해 놓고 다시 새로운 접근방식을 찾으라니,어불성설도 이런 억지는 없는 법입니다." (블로거 Ritprayer)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향해 그의 다양성과 능란함을 음미할 시간을 들이라고 요구하려면 그의 스토리가 공식, 비공식 신화가 되어 다른 프레임으로 그를 보게 되거나 아니면 예능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하거나 엄청난 가창력을 뽐내어 세간의 호기심을 강력히 자극해줄 계기가 있어야 했을 텐데 거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인에 가까웠던 그로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대중/언론으로부터의 소외 속에 그의 사운드에 대한 집착은 날로 심화되고 그는 사운드장인이 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니 사람들은 그에게서 음악이 기술이라는 웅변을 듣고 그의 예술은 조력자들이 해온 것이라며 그를 모욕하게 된다. 

 

3년 간 1,820시간의 녹음시간, 순수하게 녹음비용만 3억8천만 원, 300트랙에 달하는 코러스...(<폴투플라이 전> 앨범) 

현기증나는 이 숫자들에 경탄할 것인가 경악할 것인가. 

 

이미 그의 오랜 사운드집착("사운드스토킹")에 비판자들은 다 나가 떨어지고 남은 지지자들은 그의 음악과 사운드는 하나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으며  나 역시 일 년 내에 백기투항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심지어 사운드에 집착하지 못하게 하면 그가 심장마비로 죽을거라는 설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이 집착의 기회비용에 다음의 것들을 넣어 계산했으면 싶다.

 

그의 가창력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댓글 중에 "라이브에 한정하면 가창력 있음."이 있었다. 즉 앨범에서는 그의 가창력을 느낄 수 없다는 것. 좀 과장하자면 보통 사람들은 이승환의 목소리가 수백가지 사운드 중 하나가 아니었던 그의 초기 앨범들에서 그의 가창력을 더 절절히 느끼리라는 것. 내가 폴투플라이 앨범 수록곡 중 <내게만 일어나는 일>에 울컥하고 <폴투플라이> 의 "날아요"에서 날아오르는 기분을 느낀 것은 그의 앨범에서가 아니라 <빠데이26년> 라이브 영상을 볼 때 였다는 것. 

 

 

3. 원인의 조건

그가 언론을 기피하고 앨범에 원하는 만큼의 다양성을 맘껏 넣은 것. 그리하여 다양성을 음미할 이유도 여유도 없는, 일반청자 및 전문청자들에게 편견만 갖게 한 것.

나아가 사운드에 집착하여 그 편견을 공고히 한 것.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자기 소속사의 사장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1집부터 스스로 앨범을 제작하다가 나중에는 회사이기도 하지만 드라큐라 백작의 성이나 피터팬의 네버랜드처럼 허구적이기도 했던 드림팩토리를 세우고 공장장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멋대로 오류를 저지르는 가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견실하고 유능한 소속사에 속한 가수였다면 그의 커리어는 완벽히 다르게 펼쳐졌으리라. 

그러나 이승환씨는 자신의 인생이 그런 식으로 펼쳐지느니 차라리 드림팩토리와 함께 몰락하는 길을 택할 듯 하다.    

 

 

 

<정보왜곡의 결과>

여러 장르를 능란하게 다루는 보컬이자 수작 앨범들을 낸 프로듀서 지향 송라이터이자 최초와 최고 타이틀을 지닌 공연연출가가 왕년의 발라드가수로 남았다. 앨범 좀 판, 창법 특이한. 

인정받지 못하면 더욱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가 가수로 인정받지 못하면 공연인으로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나아가 그가 주장할 법한 모든 명예가 폄하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1. 공연기획/연출자로서의 명예 

그가 방송활동을 그렇게 안하고도 명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콘서트에 들인 에너지와 상상력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전 글을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이 글이 완결성을 갖도록 다음을 재차 인용하니 지난 글을 읽으신 분은 두 문단 건너뛰셈.)

 

그가 공연에 쏟은 에너지의 기록.

"일본에서 조명을 하던 나는 한국에 돌아온 97년부터 이승환 콘서트를 함께 했다. 일본에서 모든 것이 분업화되고 전문화되어 있던 것만 보던 나에겐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는 모든 걸 혼자서 해내고 있었다. 미친 줄 알았다고 하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한정된 하드웨어 안에서 공연이 체계화된 나라의 그것보다도 더 훌륭한 공연을 만들어 낸 것이다. 초인적으로 일을 하는 그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런 사람은 안 나올 거라 생각한다." (한국에서 모든 대규모 콘서트의 조명을 담당한다고 하는 테크노라이트 신두철 대표의 말)

 

그가 공연에서 보인 상상력과 최초성의 기록.

"최초로 공연에 타이틀을 붙여 브랜드화시킴. 최초로 공연에 스토리텔링을 본격도입. 영화 분량의 영상을 제작해 공연과 접목시킨 연출 기법을 최초로 선보임. 물쇼 같은 지금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연출법도 이승환이 원조. 공중에 매달린 스크린 개폐장치나 ABR(대형 공기막 조형물) 360도 와이어 플라잉 등 하드웨어들도 그에 의해 개발됨. 대기실 케이터링과 스태프들의 공연장 내 안전모 착용을 처음으로 정착시킴. 컨츄리꼬꼬의 무대 도용 문제를 제기해 공연저작권에 대한 개념을 세움. 2002년 국내 최초로 전문적인 공연 스태프 교육 학원 DFS를 설립함. 현재 한국 공연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 학원 출신들임." (매일경제 기사 축약. 2013.2 기자 이현우)

 

공연은 그가 지키고자 하는 명예의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그는 신화가 되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전설이 되기에는 일을 너무 오래 했던 것일까. 

 

이 명예마저 매체 노출이 많았던 다른 가수들이 가져가고 어느 평론가의 말대로 맛집 비결을 베낀 다른 식당들이 성업하는 와중에 원조는 잊혀져간다.    

 

"2009년 20주년 기념 空 콘서트 개최. 비우고 새로 담으려 했던 의미였으나 이 때부터 관객석이 현저히 비기 시작함." (이승환)

 

그러기를 몇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듯 그는 <위탄2>에 출연하고 스스로를 공연의 신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그동안 '라이브의 황제', '공연계의 황태자' 등의 호칭을 반려했던 그가 ("나는 '라이브의 횡재', '공연계의 황태'다") 2011년 자신을 공연의 신으로 부르며 <공연지신> 콘서트를 연 것이다. 

 

그리고 

 "따라 할 테면 따라 해 봐. ...무대를 대하는, 절제하는 내 삶을 통한 진심을. 가짜로 살지 않는 내 무대를. 내 자부심을​." (이승환 2011)

 

그러나 그의 진심과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2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가 공연연출가라는 것조차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2. 롸커로서의 명예

한 매체에서 인터뷰 서두에 그를 "로커를 꿈꾸는 발라드 가수"라고 규정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95년이 아닌 2014년에 이뤄진 인터뷰였기 때문이다. 20년간 락을 해도 락커를 꿈꾸어야 한다면 락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인가? 우리가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이데아계에? 아님, 락만 해야 락커라는 말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대중음악을 들을 때 락의 허세가 발라드의 뽕끼만큼이나 견뎌야 할 무엇이고 락의 역사에서 저항과 자유 어쩌고 하는 분들에게는 인류 역사에 그렇게 한가한 때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이승환씨의 락만큼은 존중한다. 왜냐하면 

 

"락이 뭐라고 그렇게 하고 싶어하세요?" "락은 서커스예요. 보면 재미있고 따라하고 싶은."

 

그에게 락은 서커스이기 때문이다.  저항과 자유 어쩌고 하지 않는 그의 락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20년간 서커스 해왔으면 이젠 그가 그것을 하고 있다고 좀 해줬으면 좋겠다.  

 

 

3.가창력

<진짜> 콘서트 영상을 볼 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일정 수준을 넘어선 프로의 가창력.

뭐 득음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 유혹을 나 역시 안 느끼는 건 아니지만 그의 가창력은 더 발전할 게 거의 확실하니 미리 인플레해두면 곤란할 듯하고, 무엇보다 득음이 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보컬 능력이 <천일동안> 이후 생겨난 그 놈의 호불호 때문에 심히 폄하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4.송라이팅

방송에서 이승환은 싱어송라이터가 아니고 작사가라고 하신 것으로 알려진 이대* 평론가님께,

님이 그러는 게 충분히 이해됩니다. 어떤 책을 봤더니 유희열씨가 인터뷰에서 이승환과의 공동작곡의 8-90프로는 이승환의 아이디어라고 말하지만 같은 책에서 지은이는 별 근거도 없이 유희열의 작업기여도가 더 높을 것이라고 추정하더군요. 그래서 이승환씨가 단독 작곡자로 올라있는 노래 중 제가 듣기에 괜찮은 걸로 골라봤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개미혁명, 카르마, 너의 나라, 워닝, 남편, 참쓰다, 내가 바라는 나, 잃어버린 건 나 파트3, 가을흔적

 

그 외 <좋은날> 등 히트곡도 아주 없진 않더라고요. 수고하세요. 

 

 

5.사회참여

아니나 다를까, 그의 사회참여마저 폄하의 대상이 되는데 이는 다음 번 미스테리에서 따로 다룬다. 

 

사람들은 보컬의 노래에서 감화를 받으면 그가 쓰지 않은 곡도 그가 썼다고 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가 저지르는 잘못도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며 다 감싸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는 그 반대의 반응을 부른다. 

 

 

이상으로 그가 왜 인정받지 못했으며 그로인해 그가 얼마나 더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나를 살펴보았다.

훨씬 긴 글이었는데 안 읽을까봐 여기 저기 자르느라 글이 매끄럽지 못하게 된 점, 그리고 논증형식이었는데 역시 글의 분량때문에 논증을 없애고 주장만 남은 부분이 많은 점 양해 구한다.

 

그리고 자연스러움을 말하겠다고 했는데 어느새 옳지 않음을 주장하고 있으니, 팬의 한계인 모양. 미안타. 

 

담주에는 마지막 미스테리, <그의 사회참여는 어떻게 시작되었나>를 다룹니다. 

 

 

 

추신

1) 강헌 샘의 평을 많이 인용한 것은, 내가 인용하고 싶은 글을 써주셔서, 그리고 이승환이 싸구려 발라드가수라며 내가 이 글 쓰는 걸 비웃던 지인이 강헌 샘의 평을 보여주자 바로 꼬리를 내려서.

(참고로 그 지인이 유일하게 알고 있던 이승환의 노래가 <천일동안>. 이 곡 하나로 이승환은 싸구려됐음.)

 

2) 나는 <천일동안>을 <진짜> 콘서트 영상으로 처음 접했으며 그 창법에 매료됐으나 나의 경우 그의 발음이 적응해야할 문제였음을 밝힙니다. (그에게는 가사보다 사운드가 중요한 듯.)   

 

3) 11집부터 거꾸로 들어간 나로선 4, 5집이 이승환씨 성취의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평가가 지나치게 역사성(당시의 시대성)에 매몰된 것으로 느껴지네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앨범은 8, 9, 10집. 그의 앨범 중 평가가 가장 낮았던 8집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 중 <카르마>는 <프레이 포 미>와 함께 내가 반복청취하는 락곡. 그리고 11집은 웰메이드 대중성의 한 수준이 아닐지. 들어보시길.

 

스트리밍을 지나 유튜브 음악감상의 시대에 이런 권유를 하는 게 음악청자들에게 고생물학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기분이 들기는 합니다. 앨범이라니... 게다가 그의 지난 앨범을 들어보라니, 이 무슨 공룡뼈다구 긁어모으란 소린지.

근데 좋더라고요. 그의 노래는 앨범단위로 들어야 할 것 같더라고요.

물론 앞으로 앨범단위 감상은 더욱 없어질테니 그의 다양성이 음미될 기회는 더더욱 줄고 한 곡이 심는 편견은 더 치명적이 될 것입니다.  

 

4)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나는 그를 다룬 책도 찾아보았는데 세 권이 있었으며 그에 대한 얘기가 각 도서에서 매우 적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빗속을 뚫고 가서 빌려왔습니다. 그 중 한 권의 내용을 요약하면, "노통헌정곡에 의해 관심이 촉발되어 이승환의 노래들을 쭉 다시 들어보았다. 사운드가 좋다". 다음에 몇 쪽이 찢겨나간 건가 싶어 살펴봤지만 정말 그 내용이 다였네요. 

그리고 11집을 듣고 한 가수가 내놓은 감상 역시 "사운드가 좋다." 끝. (아니, 11집 정도 되는 앨범을 듣고 그게 감상의 다라니..)

 

난 이것이 모욕으로 느껴지지만 이승환씨는 그 책에 정성어린 추천사를 써주었고 그 가수의 감상을 페북에 인용했고...그에게 사운드란 정말...

 

5) 그의 귀신 얘기로 끝내겠다고 했는데, 여기 그가 만든 두 편의 빙의음악을 올립니다.

<엄마>는 반복해 듣다보면 무서워진다는 분도 있더군요. 제가 들어본 제일 슬픈 노래 중 하나입니다.   

 

엄마(죽은 아이의 노래입니다)

 

 

 

남편(죽은 남편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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