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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해 흥미는 있지만 따로 공부할 기회는 없었지만, 역사 선생님이 김구를 죽인 안두희가 강원도에서 손 댈 수 없는 사람이 돼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 해주신 것이 기억난다. 독립군의 큰아버지 같은 분을 암살한 사람이 벌을 받지 않고 아무 탈 없이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어린 나이에 이해가 안됐다.


역사 선생님은 음울한 체념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것 같다. 근현대사 시험 진도 이외에 이야기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생활에 무너진 젊은 날의 의기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 아이들의 눈망울에 비쳤었던 것 같다. 선생님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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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의 기억으로 조정래님의 <아리랑>을 빌려 읽었다. 대하소설이라는 말이 새삼 느껴졌다. 장마철 큰 강물의 흐름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물결 속의 소용돌이들과 쓸려가는 온갖 잡동사니들의 사연과 이야기를 풀어놓은 듯했다. 아직 감성이 여리던 시절이라 보름이의 불행과 수국이의 운명에 마음이 아팠다. 읽은 후엔 감동보다는 참담함이 컸다.


역사속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틈틈이 읽으며 이야기들이 교차되는 부분을 마음에 남겼다. 어두울수록 빛나는 사람들이 있고 빛날수록 슬픈 이야기들이 교차되고 반복된다.


군대 있을 무렵에는 진중문고의 환단고기류 상고사에 재미가 들렸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반식민지 상태의 비참한 모습이고 슬픈 일들이 많지만, 우리 조상들의 나라인 쥬신제국은 아시아에서 짱 먹는 나라였고 아메리카까지 진출했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아마 자부심이 넘치는 총알받이가 좀 더 역할에 충실할 거다.


세상에 믿을 놈이 별로 없다는 걸 체득해서 인지 그리 심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조상들이 아메리카를 점령했대도 내 처지가 궁핍하고 피곤한건 변하지 않았다. 읽을거리를 들어야 화장실에 가는 습관이 있을 정도의 약한 활자중독 상태는 계속 되었다. 닥치는 대로 잡문들을 읽었다.


어느 날 문득 인간들이 왜 이 모양인지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도서관에서 눈에 들어온 건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였다. 위대한 조선 상고사 부분이 대폭 생략되었지만 대부분 아는 이야기여서 술술 읽혔다. 몽골에 항전하는 동안 숱하게 죽어간 민초들의 이야기는 안타깝지만 먼 과거의 일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저만 내빼려던 왕의 이야기도 왕의 시대엔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러다 동학 이야기부터 답답하고 먹먹해져서 손을 놓았다. 세계사가 급변하던 시기에 조금만 열린 눈으로 대응했으면 조선의 운명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근현대사에 겪어야했던 수난과 참사들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같은 민족의 역사적 비극이라도, 시간의 차이만큼 거리감의 차이도 줄어 더 현실감 있고 아프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 비슷비슷한 유형의 사건들이 시대와 지역을 벗어나서 벌어진다. 해서 로마사를 읽기로 했고, 단편적인 사물의 역사와 고증이 뚜렷한 소설 흐름이 이어지는 역사서를 흥미위주로 골라 읽었다. 역시 수많은 비극적 사건들이 있었지만 남의 이야기라 그런지 별로 아프지 않았다. 나는 인류애가 넘치는 성인이 아니다.


얼마 전 파리 테러 뉴스를 접했다. 안타까웠지만 세월호 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세월호도 지나고 보니 사실 동생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프랑스하면 유일하게 떠오르던 ‘아까이 소라’님의 기사 글을 보고 조금 궁금했던 안부를 확인했다. 잘은 모르지만 생각과 마음의 단위가 큰 사람은 내가 느끼는 조금의 거리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편협해진 나보다도 마음의 단위가 적은 사람은 부족단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고.


얼마 전에 <토지>를 읽었다. <혼불>을 읽으면서는 답답하지만 글이 시도 아닌데 영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잡문이라도 꾸준히 읽다보니 보는 눈이 조금 뜨인 것 같다. 왜 그동안 <토지>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술술 읽혔다. 글은 담백하고 사람들은 살아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엮어가는 이야기는 <아리랑>을 읽을 때처럼 먹먹하고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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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를 다시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딴지에 강준만님의 인터뷰가 실렸다. <코스모스>에 만족했던 기억이 '산책'을 선택하게 했다. <근대사 산책>과 <현대사 산책>을 읽었다. 한 가지를 깊이 파고든 심도 있는 연구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정치 문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들을 무겁지 않은 책이었다. "산책"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실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에 대한 냉소가 있다. 불합리가 무력으로 정의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나간 데 한팔 거든 사람들이라고, 지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인이거나 지식을 도구로 권력자에게 자신을 파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니 필자니 하는 사람들의 책 중엔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의지보다 자신을 어필하려는 노력이 더 많은 경우가 흔했으니까.


사사오입을 설명하던 수학자나 유신헌법을 설계하던 법학자나 사대강을 찬미하던 생태학자와 환경운동가들을 생각하면 별반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좁고 좁은 학계에서 별탈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초록이 동색이라 다 같은 놈 같았다. 재야에서 헌신하던 양심적 지식인들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접할 수단이 없었다.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에게 속으로 '개 X빠는 소리하고 있네'라고 생각했다. 나른한 봄날 적당히 배가 부른 개는 볕 아래 누워 생식기를 할짝할짝 핥는다. 생식 활동을 위해 다른 개와 싸우다 다치기는 싫고 생식기가 신경은 쓰이고 해서 할짝거리며 자위중인 거라고, 젊은이에게 짱돌을 들라는 책 제목이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제목을 보면서 생각했다. 읽어보지 않아서 오해일 순 있다.


냉소와 편견을 완전히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80년대부터는 거명이 조심스러워지는 게 느껴진다. 친구 아버지거나 선배 아버지거나 하는 인연으로 얽힌 사람인가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위치에 오르면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뭐 안 친하거나 만만한 사람이라면 역사의 정당한 기록이란 이유로 이름을 선명하게 새길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치우침이 없고 읽기 편한 글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한 방편이 되었을 유일한 박사의 ‘유한양행’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미국에서 헬렌 켈러가 성인이 되고 맹렬하게 살았던 훗날의 이야기를 가르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한 박사가 널리 알려지고 존경을 받게 되면 손자손녀에게 수백억의 주식을 상속하고 직원들의 산재사고를 덮어버리는 회장님들이 그만큼 욕을 먹게 된다. 욕먹는 걸 좋아하는 나쁜 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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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박사(좌)와 우장춘 박사(좌)


“저년이 조선이 국모다.”라며 일본 낭인들을 안내한 아버지의 무도한 죄를 씻기 위해, 굶주리는 국민들을 위해 종자 생산 연구에 헌신하며 정부의 감시로 어머니의 임종과 장례식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자식들을 돌보지 못한 우장춘 박사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의 아들 안중생이 살기 위해 아버지의 죄를 대신 사과하고 자식들을 부양하는 이야기가 빠진 것이 아쉽다.


식민지 이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명한 두 개의 모델이라는 생각인데 별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아버지의 친일을 속죄하려했던 우장춘 박사의 무덤을 우장춘 박사의 자식들은 찾지 않는다. 조선인의 피가 섞였지만 일본에 그냥 있었으면 노벨상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사람이었다. 목숨을 독립 의지에 헌신한 안중근님의 자손들은 아들의 배신으로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다.


친일파 청산이라는 정의감에 가려져 옳은 일을 한 사람들의 가족을 돌보지 못한 비극이다. 귀한 이들의 헌신으로 사회가 용케 굴러가고 발전 했다. 다시 말하지만 강준만의 <근현대사 산책>은 읽을 만하다.


학력은 딸리지만 어차피 집필진도 비공개로 하는 역사교과서 근현대편에 응모할까 하는 생각중이다. 공식 기록으로 형이 있으니 어머니의 처녀막을 뚫고 나오는 처녀 생식은 힘들고, 난생설화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구미 촌마을 농부의 집안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산허리를 감싸고 내려와서 마을이 완전히 운무에 쌓였을 때 아이가 태어난다. 첫 아기가 아니라 산파도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산파가 깜짝 놀란다. 여자가 알을 낳았기 때문이다. 조류의 알처럼 딱딱하지 않고 거북알(콘돔껍데기로 만든 아이스크림)처럼 말캉하다. 아기가 태반을 뒤집어쓰고 나왔다. 태반을 벗기니 천상의 옥동자가 있었다.


조선이란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일본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시절이었다. 범상치 않은 아이의 탄생은 숨겨야했다. 금오산의 정기를 쪽 빨아먹고 태어나 천상의 동자처럼 완벽한 체형의 아이에게 먹을 것을 일부러 주지 않아 발육부진 상태를 만들었다. 현명한 부모의 노력으로 키가 작고 까무잡잡해진 아이는 조선의 기맥을 끊으러 다니는 총독부의 술사들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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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민족의 정기를 살리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교육자의 길을 택했지만, 일제의 감시 하에 민족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아이들의 수가 너무 적었다. 무력 앞에 교육은 너무 무력했다. 무력의 필요함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일본 육사에 가면 남방군도로 보내진다. 상해 임시정부와 가까운 만주 군관학교에 혈서를 써서 지원을 했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마치 군부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군부세력의 아래로 숙이고 들어간 훗날 김영삼의 선택과 같다. 일단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 칼을 휘두르자 한신은 부랑배의 가랑이를 기었다. 무력을 얻기 위해 적의 훈련과 교육 기반을 이용한다.


무력을 장악하기 전에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떨어뜨렸다. 일본의 패망이 원통했다. 준비가 미흡하지만 독립군에 가담한다. 미국은 점령군으로 들어와 독립군의 귀국을 막았다. 개인자격으로 입국해 대한민국의 군인이 된다. 민중과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좌익사범으로 몰린다. 범상치 않음을 알아본 미국의 계략이다. 알고 있는 좌익사범들을 다 고발해서 위기에서 벗어난다. 안타깝지만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카아~악 퉷.


이승만이 전시와 평시 작전 지휘권을 미국에게 넘겼지만 미국의 보호를 벗어나는 순간 버려졌다. 민중들이 처음 접하는 자유에 혼란이 찾아왔다. 미국의 작전 지휘권을 뚫고 군대를 이동시켰다. 권력을 잡았다. 미국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싼값으로 일본과 식민지 범죄를 ‘퉁’ 치는 협약을 맺었다. 계속되는 견제를 뚫고 기적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미국의 견제를 벗어나기 위해 핵무기 개발에 매진했다. 지나친 업무 스트레스를 붕가붕가 파티를 열어서 풀었다. 끌려온 사람은 억울하지만 민족을 위한 붕가붕가였다. 퉤엣.


따라쟁이 이북의 김일성도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한다. 걍 내비둔다. 나중에 통일 하면 핵무기가 두 배가 된다. 핵무기가 완성되기 직전 미국은 부담스런 동반자이자 잠재적 경쟁자를 죽인다. 권력을 잡은 지 18년 만이다. 조금만 쏘스를 주면 미국이 보장하는 이익을 위해 총질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의 허락을 받고 부대를 이동시킨 후임자는 쿠데타 후에 위대한 전임자가 진정한 독립국을 위해 개발하던 핵무기를 미국에 진상한다. 반대하는 국민들을 학살한다.


아버지의 큰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던 큰딸은 18년 후 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권력을 차지한다. 핵무기를 헌납하고 민족정기를 훼손한 반란군 두목에게 약소하지만 추징금을 받아낸다. 보복과 응징을 하지만 아버지의 큰 뜻을 음해한 새끼들보다 본인에게 이년 저년한 놈들이 감정적으로 먼저다. 다 처리를 하고 나면 통일대박이 나고, 국민화합의 장이 열린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민족중흥의 영광을 위해 다시 힘차게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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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홈페이지에 응모해야 하나 생각이 들지만 딴지도 엘리트 요원들이 관리하는 것 같으니까 딴지에 써도 무방하다고 생각이 든다. 맛 뵈기를 읽어보고 집필진으로 초빙할 생각이 들면 마티즈를 보내거나 직접오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댓글을 달아라.




범우


편집 :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