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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서 갈랑트리, 그리고 에티켓은 무엇인가.

 

요즘 의미로 연애, 썸, 사랑이라는 것은 당시에는 생업에서 자유로운 상류층의 특권이었다. 왕이 지나치게 화려한 왕관을 써서 부를 과시하는 것처럼, 상류층은 연애라는 특권도 최대한 과시하려 했다. 연애는 사치였다. 따라서 플라토닉한 낭만적 사랑과 성욕만을 위한 섹스는 달라 보이지만 실은 같다. 자식을 낳고 양육하기 위한 목적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권이고 품위였다.

 

남녀가 서로 썸 타고 껄떡거리고 흘리고 넘어가는 모든 행위와 방법. 그것이 갈랑트리다. 갈링트리 유행의 최전선은 프랑스 궁정이었다. 앤과 메리 불린 자매는 프랑스에서 궁정 예법을 배웠다. 다시 말해 에티켓이다. 유행에 맞는 옷 깔 맞춰 입기, 예쁘게 웃기, 인사하는 각도. 이러한 예법에는 갈랑트리도 포함되어 있다.

 

여자의 갈랑트리란 남자로 하여금 자기를 직접적으로 유혹하도록 간접적으로 유혹하는 것이었다. 성욕을 달아오르게 하고, 적당히 해소시켜 주기도 하는 방법까지도 망라한다. 입과 손으로 사정을 유도하는 유사성행위 기술도 포함된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넘어지면서 맨다리를 보여줄 수 있는지 역시 갈랑트리고 에티켓이다.

 

에티켓을 예법이라 번역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에티켓은 '법도'와 '기술'을 모두 포함한다. 상류 사회에서 생존하고 인정받는 걸 넘어 '잘 나가는' 남녀가 되는 것까지도 모두 에티켓이다. 그래서,

 

<프랑스 궁정에서 에티켓을 배워왔다>

 

는 것은 현모양처의 자격을 갖췄다는 것과는 맥락이 다르다. 귀족다운 권위로 아랫사람들을 부릴 수 있으면서 권력자를 유혹할 수 있고, 악소문을 이겨내고 외려 소문을 퍼트린 사람을 더 지독한 루머로 응징할 수 있는 기술까지 아우른다. 법도, 품위, 술수, 요령, 심지어 야한 짓까지도 모두 에티켓이다. 자신의 육체적 욕구 충족을 위해서든, 그 이상의 야심을 위해서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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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불린이 프랑스 궁정에서 보고 익힌 것. 그것은 갈랑트리이자 에티켓이었다.

 

앤이 프랑수아 1세와 잤는지, 섹스 파트너 노릇을 짧게라도 했는지는 미지수다. 프랑스의 젊은 왕이 불린 자매를 불러서 쓰리썸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프랑수아는 문자 그대로 왕이다. 궁정의 주인이다. 또한 앤은 눈에 전혀 안 띄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다만 확실한 건, 앤은 자신의 평판을 관리했다. 그녀에 관한 악소문은 전혀 없었다.

 

앤의 스승은 언니 메리였다. 반면교사였다.

 

앤은 메리처럼 개방적으로 지내면 주가가 급상승하는 반면 필연적으로 급락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썸이든 몸이든 뭔가를 허락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유럽 궁정문화의 숨은 고수로 성장했다.

 

앤이 언니 메리의 성공과 실패를 면밀히 분석할 동안, 우리의 해피한 메리는 영국 궁정에 출사한다. 이만하면 지저분한 소문이 잊혀졌을 거라고 생각한 불린 부부는 맏딸 메리를 영국 궁정에 데뷔시켰다. 메리의 임무는 간단했다.

 

<최대한 신분 높은 젊은이의 사랑을 얻을 것>

 

일은 일사천리로 성공했다. 메리는 윌리엄 캐리라는 전도유망한 귀족 젊은이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했다. 둘은 1520년에 결혼했다. 그런데 영국의 주인 헨리 8세의 눈에도 메리의 미모가 꽂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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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언제 메리를 보고 한눈에 반했을까? 1520년이었다는 설이 있다. 메리와 윌리엄의 결혼식에 헨리 8세도 하객으로 참석했는데, 이때 감히 자기 신하가 지나치게 예쁜 여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얘기다.

 

1522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울지 추기경의 대저택에서 열린 파티, 두 자매가 왕을 위한 연극 무대에 주요 배역으로 등장했는데 이때 자매를 보고 흥미가 생겼다는 설이다. 울지 추기경의 저택은 요크 플레이스. 이곳은 왕실 궁정에 버금가는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했다. 실제로 이 당시 헨리의 궁궐은 파티장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이 실질적인 정부였다.

 

확실한 건, 헨리 8세가 메리를 원했을 때 메리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는 사실이다. 남편 윌리엄 캐리의 의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왕은, 괜히 왕이 아니다.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는 서로를 맞수로 여겼다. 헨리 8세가 메리에게 푹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수아는 만족했다.

 

"내가 먼저 즐긴 여자를 헨리가 나중에 즐기니까 이건... 내가 이긴 거잖아? 우훗훗훗."

 

(미안하지만 프랑수아 1세의 여성관은 지금의 관점에서 딱히 올바르지 않았다.)

 

헨리 8세는 메리에게 열렬히 빠졌다. 그리고 동생 앤은 부모님의 명령에 따라 영국에 왔다. 불린 가문은 혼인을 통한 부동산 투기의 전문가였다. 이때 불린 가문은 아일랜드의 토착 대귀족의 영지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점유하는 것은 다르다. 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앤을 아일랜드로 시집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혼담은 지참금 문제, 더 정확하게는 오르몬드 공작이라는 타이틀(타이틀은 곧 영지에 대한 적법한 소유권이기도 하다)을 어느 집안이 가져가는지 하는 분쟁으로 지지부진해지고, 결국 혼담은 무산된다. 그런 애매한 상태에서 불린 부부는 둘째 딸 앤을 아라곤의 캐서린 여왕의 시녀로 궁중에 취업시켰다.

 

앤 불린. 그녀의 데뷔 모습은 몹시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걸음걸이는 우아했고 옷은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최신 스타일이었다. 운동 신경이 좋아서 어려운 춤 동작을 쉽게 소화했고... 목소리도 좋아서 노래도 훌륭했으며, 다섯 가지 이상의 악기를 연주했다. 프랑스어 실력을 뽐냈고 재치와 순발력도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당일부터 구애하는 남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외모가 아름답다”는 평은 없었다. 즉 훈련된 매력이라는 뜻이겠다.

 

앤은 처음에는 캐서린 여왕을 극진히 모시면서 점수를 쌓았다. 권력자에게 사랑받는 거야 어릴 때 네덜란드에서 이미 수련을 거친 몸. 그녀는 아일랜드에 가기도 싫었고 궁중에서 나오기도 싫었다. 처음부터 헨리의 연인이 되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궁정에서 왕 곁에서 일하는 젊은 귀족과 결혼한다면 권력의 심장부에 계속 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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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불린은 궁정에서 노섬벌랜드 백작인 '헨리 퍼시'라는 젊은이와 사랑에 빠졌다. 노섬벌랜드 가문은 비록 공작이 아닌 백작이지만, 유럽에는 공작이나 후작보다 더 강력한 백작들이 많았다. 원래 백작은 '변방백'이다. 왕이 먼 곳을 다스리며 치안과 국경 수비를 맡도록 전권을 준 귀족이 백작이다. 백작은 왕과 떨어져 있는 곳에서 진정한 자기 동네의 왕이었고, 변방 수비란 넒은 지역을 커버하는 일이라 영지도 그만큼 광대했다. 진짜 실세는 백작이었다.

 

잉글랜드 북부의 광활한 지대를 지배하는 노섬벌랜드 백작가의 후계자는 영국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신랑감이었다. 아일랜드로 시집가는 것보다 비교도 안 되는 조건. 앤은 야심가였고, 부모의 그림보다 더 큰 그림을 스스로 설계했던 것이다. 여기까지야 앤 불린의 야심이고 사정이다. 헨리 퍼시는 앤에게 푹 빠져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그에게는 원래 정략결혼 상대로 정해진 정혼자가 있었다. 그런데 앤의 갈랑트리에 마시멜로처럼 녹아서 그만...

 

"날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내 가슴도 운명도 가문의 명예도 모조리 다 갖다 바치겠소. 앤!"

 

그는 앤 불린에게 영원한 사랑과 함께 결혼을 약속해 버렸다. 프랑스 궁정에서 배워 온 갈랑트리 앞에 영국 촌놈은 무방비였다. 사랑의 정표와 맹세도 주고받았고, 남은 것은

 

"나 부모님이 정한 결혼 안 해! 앤이랑 할 거야!"

 

라는 폭탄선언 뿐. 헨리 퍼시의 부모님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지경이었다.

 

"아이고 저걸 아들이라고 키웠으니..."

 

불린 가문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정통 귀족이 아닌 한, “고작 기사의 딸이랑 함부로 결혼을 맹세하다니”라는 호통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헨리 퍼시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목표가 있었다. 바로 앤 불린의 육체였다.

 

앤은 언니 메리를 반면교사 삼아 깨달았다. 남자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면 최후의 순간까지 몸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벌가의 상속자가 궁정에서 만난 웬 아가씨에게 함락되어 부모와 예비 처가의 뒤통수를 치고 드러누워 땡깡을 부린다는 뉴스는 영국 전역의 스캔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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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영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처녀 총각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러 출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