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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영웅을 기억한다

 

이끌고, 구하고, 창조한 사람들을 기록한다. 악당도 잊지 않는다. 살상하고, 훼손하고, 파괴한 이들은 흔적을 남긴다. 반면 소중한 것을 ‘지켜낸’ 사람들은 기억하기 어렵다. 한국 전쟁 당시 해인사 팔만대장경, 화엄사는 폭격과 소각의 위험에 처했다. 군인 김영환, 경찰 차일혁은 적의 근거지를 파괴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했고 덕분에 귀중한 문화유산이 보존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김영환과 차일혁이라는 이름보다 2008년 숭례문에 불을 지른 70대 노인의 존재를 더 쉽게 기억한다. 지키는 자들은 창조하고 파괴하는 자들만큼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교사의 일도 그렇다. 교실을 지키는 일을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교육 현장의 많은 일들은 지키고 예방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교사가 안전 교육을 해 학생들이 다칠 위험을 사전에 차단한다. 그러나 예방으로 실현된 교육의 효과는 기록되지 않고 사고만이 부각된다. 6학년 아이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교사가 열심히 지도한다. 기초 학습 능력 부족으로 진로를 선택하지 못할 가능성, 교실에서 느낄 무력감이 가져올 온갖 사태의 가능성을 예방한다. 하지만 학생은 물론 교사 자신도 본인이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른다. 교육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악을 면하도록 한다. 가시적인 성과를 직접 창출하기보다 창조를 위한 길을 닦는다.

 

 

지키고, 예방하고, 조력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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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능을 마치고 개별 체험학습을 떠난 고3 학생들이 강릉 펜션에서 안타까운 사고를 당했다. 원인은 보일러 배기가스 누출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밝혀졌다. 상황 점검 회의에서 교육부 장관은 "우리 학교가 '설마'라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방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것이고, 교육부는 수능 이후 한 달여간 마땅한 교육프로그램 없이 학생들이 방치되고 있지 않은지를 전수 점검하겠다"고 말했고, 교육부는 전국 고교를 대상으로 개인 체험 학습 전수 조사 공문을 보냈다. 숙소 유형, 보호자 동행 여부, 보호자 유선 확인 여부, 허가 인원 등을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현장 교사들의 반발은 거셌다. ‘교육부 장관이 체험학습이 무엇인지 모른다’, ‘체험학습이 아니라 숙박업소 안전 관리 미흡이 문제다’, ‘체험학습 법규와 수능 이후 교육 공백기를 방치한 곳은 교육당국인데 학교에 책임을 떠넘긴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교육부 관료들에게 악의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정권이 달라지고, 장관이 바뀌고, 사고가 터질 때마다 보이는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면 교사들도 이 정도로 반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후 마치 사고 원인이 안전 의식의 부족이었던 양 안전 교육이 강조되었다. 학교 폭력이 이슈화되자 인성교육진흥법이 제정되고 인성 교육이 의무화되었다. 혐오와 갈등이 사회 통합을 위협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최근 교육부는 ‘민주시민교육 활성화를 위한 종합 계획’을 발표했다. 교육부는 지키고, 예방하고, 조력하는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사건이 터지면 원인을 철저히 분석해 장기적으로 대처하기보다, 관련 교육을 제도화하는 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2018 민주시민교육 종합 계획을 예로 들어보자. 시민 교육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공교육의 목표가 이미 ‘민주시민 양성’이라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모양이다. 민주시민성은 도덕, 윤리, 사회 교과만이 아닌 모든 교과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외국어 교과가 추구하는 목표는 토익시험 점수 향상, 일류대 진학이 아니다. 번역의 과정과 문화의 다양성을 통해 배우는 겸허함은 시민의 핵심 자질 중 하나다. 국어 교과의 문학적 소양, 수학 교과의 논리적 사고력, 미술 교과의 미적 상상력 역시 민주시민의 소양으로 수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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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교과에서 민주시민성을 녹여내자는 공교육의 목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특히 도덕, 사회, 윤리 교과의 철학과 방법을 어떻게 보완 수정할 것인가. 학교 구성원들의 민주시민의식은 어떤 상태인가. 학교 문화는 얼마나 민주적인가. 현존하는 무수한 문제들의 원인 분석과 현장 연구부터 선행해야 한다. 지금처럼 정책과 제도를 끝없이 생산해 내려보내는 방식은 민주시민교육을 교육 과정과 분리해 파편화하고, 개념을 왜곡한다. 교육부의 리더십이 리더십의 개념 자체를 왜곡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필요한 건 장기적 전망, ‘용기’, ‘일관성’

 

"가장 진지한 시는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시"

 

김수영이 산문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에서 한 말이다. 현장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다 보면 나도 곧잘 그런 생각을 한다. 가장 진지한 교육은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교육이라고.

 

사람을 기르는 교육, 그것도 공교육 현장에 뛰어난 영웅호걸이란 있을 수 없다. 영웅 놀이도, 영웅적 지도자도 필요 없다. 교육부는 자치 분권 시대의 정신을 겸허히 수용하고, 중앙 집권적 통제와 지시를 멈추라. 생산해 증명하겠다는 강박을 버리고, 보이듯 보이지 않는 조력의 역할에 충실하라. 교육 현장에 필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고 존중하는 능력, 침묵할 용기, 그리고 일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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