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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이다.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김형민 선배님’을 찾는다. 서울대 무슨 과 동문이라고 했다. SBS 8시 뉴스 앵커로 계시던 김형민 국장은 이미 회사를 떠나셨는데 동명이인이다 보니 내게 연결된 모양이었다. 사정을 밝히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하는 일이 뭐냐고 해서 교양 PD라 했더니 이것도 인연인데 특종을 알려 주시겠다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

 

전화 주신 분의 직업은 국제 변호사였다. 외교학과를 나와서 그런지 외국어가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몇 개 국어를 하고, 특히 페르시아어 등 중세 중앙아시아 언어도 구사하고 해독할 수 있다고 했다. 영어 10년을 배워도 버벅거리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언어를 그렇게 배울 수 있지?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그다음 말에서 이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출신의 국제 변호사님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페르시아어로 된 몽골 제국의 족보를 발견했는데 칭기즈칸은 고려 사람이었습니다.”

 

대발견이라도 한 듯 흥분한 어조로 얘기하는 그분과는 머지않아 통화를 끝냈지만 그분의 책이 출판된 걸 보고는 경악 반 황망 반. 거하게 코웃음을 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런 발상의 ‘원단’은 따로 있다. 일본인이다.

 

“예일대 박사 출신인 오야베 젠이치로는 1925년 <칭기즈칸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 찬사를 보낸 이들 중에는 일본의 아나키스트 사상가 오스기 사카에의 암살과 만주 진출의 배후로 지목되는 아마카스 마사히코,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한 오카와 슈메이도 있다.” (유사역사학 비판 7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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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 요시쓰네는 12세기 일본의 무장이다.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이복동생이다. 걸출한 무용을 자랑해서 당대나 후대에나 인기가 많았던 그는 형과 대립한 끝에 목숨을 잃었는데, 이 사람이 살아서 몽골까지 가서 칭기즈칸이 됐다는 어마무시한 ‘후라이뻥’이 되겠다. 이 이야기가 한때 교과서에까지 실렸다고 한다. 나름의 근거도 갖다 붙였을 것이고 비슷한 정황도 있었겠지만 누가 봐도 웃음이 터져 나올 소리를 예일대 출신 박사가 지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비슷한 소리를 약 80년 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의 한국인으로부터 들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이 <유사역사학 비판>을 읽다 보면 그 웃음기가 싹 사라지는 공포 체험을 아주 쉽게 할 수 있다. 비단 칭기즈칸 한국인 일본인설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또 소셜 미디어 도처에서 자주 발견되는 ‘민족 사학’ 숭배자들의 논리가 그들이 목에서 피가 나도록 비난하는 ‘식민 사학’은 물론 일본 제국주의 사관을 그대로 갖다 베낀 것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의사였던 최동은 1966년 <조선민족상고사>라는 책을 내서 조선 민족의 고향이 중앙아시아이고 “알타이계 고대 민족문화가 결실한 바비론(바빌론) 문화에 접근함을 발견하며... 동이족은 과거 중국 고대문화의 건설자이며 일본 문화의 선구자였던 것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문정창이라는 이는 한 수 더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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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인 소호족 일파가 서쪽으로 떠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하여 수메르 문명을 만들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수메르가 멸망할 때 아브라함이 살아남아서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황당하다고 웃음이 나오시는 분 많겠지만 <고삐>로 유명한 윤정모 작가가 위와 같은 주장에 감응하여 장편 소설 <수메르>, 즉 수메르가 우리 말로 ‘소머리’ 문명이라는, 실로 소대가리에서 나올 상상을 문학 작품으로 남겼던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더 웃기는 것은 우리 민족의 유구함을 목울대 세우며 외쳤던 최동은 친일 인명사전에 꽤 비중 있게 등장하는 사람이고, 문정창 역시 일제 강점기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까지 지낸 이였다. 일제 강점기 친일파 여부는 기실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이사관까지 지냈다고 역사의 죄인이라고 낙인찍을 의사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주창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 동이족의 역사, 오늘날 자칭 민족 사학, 점잖게 불러 유사 사학, 정확히 말하면 사이비 공상 역사의 원형이 사실상 ‘메이드 인 저팬’이라는 점은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사역사학 비판>을 더 읽어 보자.

 

일본군 20사단 차모 가네코 데이이치 대좌의 강연 내용이다.

 

“가장 용감하고 지능이 뛰어난 민족은 투란 민족이고 일본인이 우수한 것은 국제 관념에 기인한 것이므로 투란 민족인 조선인도 국제 관념을 함양하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해 달라.”

 

여기서 투란 민족이란 무엇인가. 19세기 핀란드와 헝가리를 중심으로 ‘범투라니즘’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른바 ‘우랄 알타이어족’을 투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내려는 것이었고, 오늘날 터키의 국부 케말 파샤도 이 개념을 써먹었다고 한다. 일본도 잽싸게 이 투라니즘을 도입해서는 ‘일본을 맹주로 하는 우랄 알타이 민족의 단결’을 설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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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투라니즘’ 주창론자들의 지도를 읽다 보면 깔깔 웃게 되는 것이 이 투란 민족의 고대 지도는 오늘날 ‘위대한 상고사’를 주장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려내는 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단, 이 맹주 자리에 일본 대신 한민족을 끼워 넣을 따름이다. 투란 민족 대신 ‘동이’ 개념을 끌어올 따름이다. 그리고 피 터지게 싸웠던 몽골과 만주족은 사실상 형제며 사대주의에 빠져 그들을 외면하다가 응징을 받았을 따름이다. 중국 민족은 치우와 황제 시절부터 적이었고 우리 동이족은 만주와 몽골 한반도를 망라한다.

 

이건 바로 일본 만몽(滿蒙) 사관, 만선(滿鮮을) 사관을 그대로 이식한 논리다. 극히 일본적이고, 아니 일본인들이 만들어 낸 역사 가운데에서도 가장 멍청하고 무식한 논리를 ‘우리 민족의 상고사’의 근간으로 떠받들고 있는 셈이다. 뭐 이런 친일파들이 다 있나. 누가 누구더러 식민 사학이라는 거냐 지금.

 

요즘 민족 사학 숭상한다는 사람들이 툭하면 내뱉는 소리가 “일본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내는데 왜 우리는 있는 역사마저 축소하느냐”이지만 ‘있는 역사’가 아니라 ‘있어야 하는 역사’일 뿐이다. <유사역사학 비판>은 뭔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바늘로 톡톡 터뜨리고 있다.

 

“한국사를 가문의 역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주의가 오랫동안 강조돼 온 결과다. 고대의 일도 마치 어제 삼촌이 도둑맞은 것처럼 역사를 들여다본다.”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만주를 잃었다고 통탄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 논리 구조 하에서 신라는 민족(?) 반역자가 된다. 그럼 당나라로 건너갔던 백제 유장 흑치상지는 어떻게 부르나? 만주 벌판 말 달리던 고구려의 기상을 찾는 건 좋은데 이 고구려에 대한 높은 평가의 원류도 일본이다.

 

“고구려가 위대한 국가인 이유는 요동을 지배했기 때문이고, 고구려의 멸망으로 만선사(즉 만주와 조선을 합친 역사)는 종말을 고했는데 일제가 만주로 진출하면서 위대한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는 얘기에 이르면 헛웃음이 아니라 장히 민망해지는 것이다. ‘고토회복’ 티셔츠를 입고 고구려 옛 수도 집안 시내를 누볐던 왕년의 ‘다물단’ 회원들을 비롯하여 툭하면 광활한 만주 벌판을 논하고 ‘잃어버린 옛 땅’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사실상 친일파라니! 이거야말로 “내가 고자라니, 고자라니!”를 부르짖는 어느 짤방에 필적하는 블랙 코미디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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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고대사에 머물면 좋겠는데 요즘은 중세사까지 그 ‘위대한’ 병이 도진다. 도저히 안 그럴 것 같은 분들마저 이미 감염돼 있다. 현직 문화부 장관이라는 분은 이 사이비 사학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서 동북아 위원회를 들들 볶았고, 살아 있는 현대사 중 한 분이라고 해도 무방한 이종찬 전 국정원장, 전 금융 위원장 김석동, 전 행자부 장관 허성관, 진보적 경제학자로 이름난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뭐 이름조차 대기 황공한 분들이 이런 친일파스러운 논리에 파묻혀서 축사를 하고 이름을 보태고 주장을 하고 강연을 하고 있으니... 아직도 '식민 사학의 시대‘라는 사이비 공산 역사가들의 말만큼은 맞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친일파적 논리와 식민사관에 대한 탁월한 백신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 비판같이 어려운 대목은 건너 뛰어도 좋다. 단지 우리나라 ‘민족 사학’의 논리가 얼마나 ‘친일 식민사관’과 닮아 있는지만 촘촘하게 보아도 된다. 그러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얼마나 그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허위를 진실로 믿고 입에 침을 바르고 있는지를 간파하게 될 것이다.

 

나도 처참하게 속은 적이 있다. 1983년 육군본부는 <한민족의 용틀임 - 위대한 각성과 웅비>라는 정신 교재를 냈는데 그 책에는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이 실려 있다. 익히 아는 4행 짜리 짧은 시 뒤에 이런 내용이 덧붙여져 있었다.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천국)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이 모두는 가짜다. 타고르의 다른 시를 갖다 붙인 것이다. 이런 사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유사역사학 비판> 제발 읽자... 부탁한다. 친일파를 몰아내자! 식민사학 박살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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