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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부분이 서른 즈음이 되면 자신의 20대를 몇 가지 단어나 문장으로 정의하려 한다. 나 역시 그렇다.

 

서른을 맞은 이 때, 나의 20대를 설명하는 문장 중 하나는, 치핵과 함께한 인고의 10년이라고 하겠다. 미운 정 든 녀석과 서른 살을 맞아 추억을 정리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다.

 

첫 만남은 스무 살 무렵, 어느 학교 건설 현장에서였다. 온 세상이 얼어붙어 추위에 대한 감각도 얼어붙은 날 몇 푼이라도 벌어보자고 용역을 나갔고, 커피 한잔하자는 아재를 따라 어느 계단 위에 덜커덕 주저앉았다. 따스한 커피를 입속으로 부어도 추위가 가시지 않던 날씨에 이미 엉덩이는 무감각해져 있었고, 골짜기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다소 알싸한 느낌만 남았을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서야 나는 녀석과 만났다. 녀석의 정식 명칭은 '치핵'(필자와 독자, 서로 민망할 수 있으니 녀석을 앞으로 ‘핵이’라고 부르겠다). 손으로 더듬더듬 찾아간 곳에서 핵이는 살포시, 수줍은 듯 머리를 내밀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첫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지만 핵이는 복수하려는 듯 어마무시한 크기로 부풀어 올라 마음껏 분노를 표출했다. 고통스러웠던 그 밤의 첫경험은 첫사랑과 이별했던 날만큼이나 길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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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이는 이상한 녀석이었다. 잔뜩 화가 나서 복어처럼 부풀어오른 상태가 계속됐다면 어쩔 수 없이 수술대에 올랐겠지만, 아무리 길어도 하루 정도만 견디면 금세 일상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상태로 돌아갔다(본성은 착한 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피곤하거나, 술을 많이 먹거나, 기름진 음식을 과하게 먹거나, 매운 걸 먹거나, 운동을 심하게 하면 또다시 분노해 마구마구 부풀어 올랐다. 왜, 만화 영화에 악당들이 마구마구 커지는 장면이 있지 않은가. 나는 녀석의 변화를 마주할 때(주: 더듬거려서 눈치챌 때) 그런 인상을 받곤 했다.

 

고통이란 것은 아는 만큼 느끼는 것이니 치질이란 병을 앓지 않는, 전생에 최소 지역 의병장급 복을 지은 사람들은 그 고통이 어떤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사바사, 케바케이겠지만, 녀석이 최대로 분노하는 날엔 엉덩이에 아주아주 크고 아름다운, 건드리지 않아도 고통스러운 여드름이 난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화농성이었으니 맥락상으로 유효하다. 다만 아주 고통스러운 여드름을 짤 때의 고통수치가 대략 10이라면(짤 때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픈 상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녀석이 주는 고통은 대략 5~6 정도, 걷거나 움직일 땐 7~8 정도였다. 찌릿찌릿하면서 따끔따끔하면서 화끈화끈한, 변화무쌍한 고통이었다.

 

그 뒤로부터 10여 년, 핵이는 평범하거나 혹은 특별한 날들에 불쑥 나타나 발목을 잡았다. 녀석이 온갖 집중력을 빼앗아가서 뭐 하나 제대로 진행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카페에서 일하던 어느 날, 녀석이 심각하게 도진 나는 자연스레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었는데, 어느 손님들이 그 모습을 보며 깔깔댔고, 나는 그 대화를 듣고야 말았다. 애로사항과 쪽팔림이 번갈아 솟구쳐서, 그저 1분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

 

녀석은 때와 장소, 만나는 사람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분노를 마구 표출했다. 인생의 향방을 정할 면접장에서, 작고한 가족의 빈소를 지켜야 하는 장례식장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밤을 지내는 방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녀석이 가장 미울 때는 가뜩이나 잘 안 풀리던 연애를 발목 잡을 때였다. 위로는 얼굴이, 아래로는 녀석이 나의 핑크빛 청춘 라이프를 훼방 놓곤 했으니, 녀석을 단칼에 보내 버리고자 결심한 때가 한두 번이 아녔다.

 

굳은 마음을 먹어도 녀석과 이별할 수 없던 까닭은 수술 후 2주 이상 여유 있게 회복해야 재수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의사쌤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비록 몇 푼 안 되는 월급 받는 삶이었으나, 그 정도의 시간을 냉큼 빼서 수술 스케줄을 잡을 만큼 넉넉한 삶도 아니었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하나. 그리고 미운 정이 다 들어 녀석과 함께하는 삶이 그럭저럭 익숙해졌다는 내면적인 이유가 둘이었다.

 

녀석과 한 몸을 빌려 동거하던 나는 녀석이 ‘분노하지 않는 선’을 점차 알게 되었다. 연애나 결혼이란 것도 대략 서로의 선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던가. 핵이와의 동거도 적당히 피곤한 삶, 적당히 활동하는 삶을 살며 녀석이 얼굴 붉히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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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과 함께 나는 '갓수'라는 이름의 백수가 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행복한 작금을 아무 생각 없이 뒹구는 집냥이처럼 지내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서른이라는 글자가 시시각각 뇌에서 뒹굴거림에 대한 원죄를 되새기는 것 같았다. 이 기회에 그동안 못했던 갓겜도 다 해버리고 싶은데, 어쩐지 슬슬 알바 얘기를 꺼내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쬐끔 거시기했다.

 

그렇게 명분을 찾던 중 너무 가까워 그 소중함을 잊고 살았던 핵이가 떠올랐다. 핵이와의 이별, 즉, 치핵수술은 나의 게으르고 파렴치한 갓수 생활의 명분을 만들어 줄 것이다. 오직 그 일념으로 지역의 소문난 병원으로 향했다.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던 그 병원은 언제고 환자들로 북새통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문을 연 진료실에는 희뿌연 머리의 의사 쌤이 계셨다. 짐작되는 나이만큼이나 오랜 노하우를 가진 이 병원과 의사 쌤이 있다면 고비마다 심통을 부리던 핵이도 잠자코 떨어져 나가줄 것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이 샘솟았다.

 

진찰은 아주 짧았다. 멋쩍게 바지를 벗고 침대 위에 옆으로 돌아누운 나를 대강 살펴보던 의사 쌤은,

 

“수술해야겠구먼”

 

짧은 논평으로 상황을 정리하셨다. 10년이나 참았다는 내 말에 웃기도 하셨다. 나는 그저 흔하디흔한 환자일 뿐인 것 같은 쌤의 태도에서 왠지 여유가 생겼다.

 

수술 날, 병원에서 얘기한 준비물을 산 뒤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생리대와 입원에 필요한 몇 가지 물품들을 알려주었고, 수술 2시간 전 좌약으로 관장한 뒤 오라고 했다.

 

모든 것이 마미손의 계획처럼 잘 흘러가는 듯했으나, 화장실 문을 나서는 순간 모든 여유는 사라졌다. 녀석이 또다시 분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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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녀석은 때때로 화장실을 다녀올 때도 분노하곤 했다. 요사이 녀석이 꽤나 잠잠했기에 의식하지 못했건만, 하필 수술 당일 최후의 농성을 벌인 것이다. 아무래도 녀석도 눈치챈 것인지 모르겠다. 녀석과의 깔끔하고 쿨한 이별이란 역시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렵게 잡은 스케줄을 미루거나 연기하고 싶진 않아 기어코 수술대에 올랐다.

 

수액과 무통 주사를 꽂은 채로 나는 차디찬 수술실로 향했다. 한껏 긴장한 나는 간호사 분들의 지시대로 수술대에서 옆으로 누웠다. 오후 12시 40분, 으레 그렇듯 한껏 방정맞은 목소리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좀처럼 긴장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취 주사가 되게 아프다던데 혹시 수술도 아픈 게 아닐까? 마취가 잘 안되면 어떡하지?

 

다행히 악명 높은 척추 마취 주사는 아주 약간의 '따끔'과 함께 끝났다. 아무래도 미리 맞아 둔 무통주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취가 되었는지 보조 기구에 의해 들어 올려진 두 다리에서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난 두 다리를 벌린 자세로 고정된 나에게 의사 쌤은 묘한 말을 하셨다.

 

“어? 생각보다 심하네요?”

 

시간은 이미 1시를 향해 있었고 이 병원은 1시부터 점심시간이었다. 첫 진찰을 근거로 10분 정도면 끝날 줄 알았던 수술은 병원 직원 분들의 점심시간을 까먹으며 30분을 넘기고야 말았다. 계속되는 '사각' 소리와 피 묻은 수술 기구가 눈에 자꾸 들어왔고, 계획대로 되는 것만 같았던 줄거리는 오늘 아침 화장실을 분기로 아수라장이 되는 엔딩을 선택한 것만 같았다.

 

민망함보다 점심시간을 까먹은 미안함이 더 커질 무렵, 수술이 끝났다. 여전히 누워있는 나를 향해 의사 쌤은 한마디 덧붙였다.

 

“자네는 깊숙이 파내서 이후에 출혈 리스크가 있을 수도 있어.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단 얘기야. 퇴원하더라도 피가 많이 나온다 싶으면 언제라도 병원으로 찾아와요.”

 

그런 얘기는 계획에 없었을 텐데.

 

 

 

3.

 

수술을 마친 나는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 1인실로 들어왔고 침대에 들어 올려졌다. 마취가 안 풀린 다리는 제멋대로 요동쳤고 수술 부위엔 거즈가 붙여졌으며 여전히 팔에는 수액과 무통주사가 꽂혀있었다. 간신히 정자세로 누운 내게 간호사 분은 말씀하셨다.

 

“7시간 동안 금식이구요. 절대로 움직이시면 안 돼요. 마취 주사 때문에 움직이시면 두통 심하실 수 있어요.”

 

실제로 마취 주사 이후 움직여서 강한 두통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마취가 풀린 뒤 찾아올 고통도 두려운데, 두통까지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관짝에 누운 미라처럼 가만히, 아주 가만히 있었다. 머리맡 핸드폰에 무한도전을 틀어놓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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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가 풀려가는 것과 동시에 수술 부위에서 통증이 서서히, 서해 바다에 드는 밀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첫날은 그야말로 통증과의 싸움이었다. 무통주사를 맞고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은 시시각각 찾아와 나를 괴롭혔고, 밤에는 통증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기도 했다.

 

시달리는 밤을 보내던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특별히 과식하거나 편향된 식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남들처럼 먹고, 남들처럼 쌌다. 약간의 변비와 운동부족이 있었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 과한 고통이 아닌가. 어찌하여 이 고통은 나만 겪어야 하는 것인가...! 아마 입원실을 가득 채운 환자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무통주사, 식사, 진통제가 반복되는 입원 생활이 끝나갈 무렵, 드디어 악명 높은 첫 화장실 거사를 치르게 되었다. 병원에 누워있으면 자연스레 수술 후기를 검색하게 되는데, 하나같이 첫 거사에 대한 충격과 공포의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대체로

 

“칼을 싸는 것만 같다”

 

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태어나 이토록 화장실 가는 것이 두려운 적이 없었다. 때때로 핵이가 분노에 가득 차서 고통을 줄 때보다 더 두려웠다. 그렇게 거사를 치르는 순간,

 

...엥?

 

생각보다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핵이가 진상을 부리던 고통에 비하면 그나마 참을 만했다. 의사 쌤은 병원에서 주사 맞을 때 화장실 가는 것이 좋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진통제와 무통주사 빨로 이겨낸 고통이 아닌가 싶었다. 또한 작은 초록색 약을 같이 처방받았는데, 응가를 묽게 만드는 신묘한 약이었다. 아무래도 그 덕을 본 게 아닌가 싶다.

 

퇴원 이후 당초 계획한 것처럼 한없이 잉여에 가까운 와식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삶이 기대했던 만큼 유쾌하지는 않았음을 고백한다. 퇴원 이후의 생활은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뭘 먹을 것인가 / 어떻게 누워있을 것인가 / 어떻게 쌀 것인가

 

인간의 아주 기초적인 생활을 '주의해서 실행하는 것'이 이토록 괴로울 줄은 몰랐다.

 

병원에서 준 안내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술, 담배, 고기, 밀가루 음식, 자극적인 것, 매운 것, 기름진 것, 튀긴 것, 구운 것은 금지‘

 

’과일, 야채, 견과류 중심으로 식사‘

 

먹고 싶은 것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작년에 했던 8kg 감량 다이어트도 이보다 괴롭진 않았다.

 

퇴원 후 셋째 날. 무미건조한 식단에 지친 나는 객기를 부리며 고추장 한 술 올린 나물 비빔밥을 먹었는데, 대가는 참혹했다. 이러다 재수술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장실이 고통스러웠는데, 문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소위 ’건강 식단’으로 복귀했지만 화장실과 화장실 이후의 고통은 꼬박 1주일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나를 구원해주는 것은 뜨끈한 물로 하는 좌욕뿐이었다. 그때만큼은 화탕지옥에서 잠시 지장보살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수술 후 직장생활에 바로 복귀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좌욕 없이 일상을 영위하는 것은 참으로 존경스러운 일이었다. 여담이지만, 딴지일보 편집장은 뜨끈한 욕조에 몸을 30분 이상씩 담그며 하루를 마감하는 것을 좋아한다던데, 치질을 앓는다면 그 즐거움이 배가 될 테니 소박히 기도해본다.

 

현재는 마지막 내원을 앞둔 상태이다. 1주가 지나면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고, 화장실에서 피를 보는 일도 없지만, 여전히 진물 때문에 거즈를 뗄 수 없고 가끔 화끈거리는 통증 때문에 운전이나 앉아 있는 일은 하기 어렵다. 이대로 무사히 회복하여서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떡볶이를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 없이 먹을 날만을 기대하고 있다. 중요한 순간마다 발목 잡던 핵이도 떨어져 나갔으니 이제 연애전선도 무사태평하게 흘러갈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핵이와의 이별은 첫 만남 만큼이나 강렬했다. 계획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어쨌든 녀석은 드디어 떨어져 나갔다. 소감은 다음의 짤방으로 정리하며 이 민망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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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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