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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요새(要塞)의 이름이 뭘까? 아마 ‘마지노선(Maginot Line)’일 것이다. 군사 분야에 관한 상식이 없는 이들도 일상으로 ‘ㅇㅇ이 마지노선이야’란 말을 쓰니 말이다. 무엇인가의 마지막 기한, 저항선이란 의미로 사용되는 마지노선은 동시에,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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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셔널 지오그래픽)


마지노선은 9년간 총 연장 750Km의 요새를 만드는 인류사에 길이길이 남은 대공사였다. 그 기간 동안 요새 건설에만 160억 프랑(현재 가치로 약 20조 원)이 들어갔고, 이 요새의 유지 보수에만 따로 140억 프랑 이상이 들어갔다. 이 ‘돈 먹는 하마’는 건설과 동시에 프랑스군의 든든한 버팀목이 아니라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다. 아니, 당시에는 속을 썩이는 아들 같은 입장이었을까? 돈은 들어도 믿을만한 구석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마지노선을 ‘멍청한 짓’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많다.


프랑스군은 마지노선의 건설과 유지를 위해 전체 예산의 47%를 쏟아 부어야 했다. 만약 이 예산을 다른 분야, 예컨대 공군력이나 기갑전력의 확충에 사용했다면, 프랑스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그렇게 허무하게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희대의 ‘삽질’이었을까?



프랑스가 마지노를 선택한 이유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세계의 군사 전략가들은 하나의 결론을 낸다.


“근대전은 공격자보다 방어자가 더 유리하다.”


이를 뼈저리게 확인한 것이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18~27세 사이의 남성인구 중 27%가 전장에서 사망했고, 프랑스의 20~32세 사이의 ‘청년세대’ 40%가 사라진다. 150만 명의 사망자 앞에서 프랑스인들은 절망했고, 마지노선 건설 계획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마지노선을 건설할 수 있었던 건 프랑스 육군 장관 앙드레 마지노(Andre Maginot) 덕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인 1913년, 마지노는 36세의 나이로 하원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마지노는 당연히 자원입대를 한다. 하원의원 출신이지만 하사관으로 자원입대한 마지노는 곧 지옥을 맛본다.


지옥도 이렇게 처참할 수는 없다. 모두가 미쳤다.       

- 베르됭 전투에 참전한 프랑스 육군 장교의 증언


프랑스의 소도시 베르됭에서 벌어진 베르됭 전투(Battle of Verdun), 마지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이야기 할 때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베르됭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후송된다(덕분에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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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의 영웅이 된 사람이 있다. 바로 '베르됭의 구원자'로 불리는 필리프 페텡이다. 하지만 독일군의 대공세를 저지하긴 했지만, 그 결과 프랑스군 40~54만이 희생돼야 했다(독일군은 35~43만 정도의 희생을 치렀다).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프랑스는 안전했다. 베르사유 체제 하에서 철저히 발가벗겨진 독일은 히틀러의 등장으로 서서히 부활의 기지개를 폈다. 프랑스는 다시 긴장했고,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의 세 영웅들이 장차를 고민하며 각자의 목소리를 낸다. 포슈(F. Foch) 원수, 조프르(J. Joffre) 원수, 그리고 페탱(P. Petain) 원수가 그 주인공이다.


포슈 원수는 전통적인 군사전략을 내놨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다.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비해 프랑스군은 신기술을 적극 받아들이고 이를 전력으로 극대화해야 한다.”


라는 공격에 주안점을 둔 주장을 내놓은 반면,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경험한 조프르 원수는 다른 이야기를 내놓는다.


“근대전은 방어자가 공격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베르됭과 솜 전투를 잊었는가? 다시 한 번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기관총과 철조망 앞으로 밀어넣을 수는 없다.”


당시 조프르 원수는 ‘요새지대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 직함을 보면 알겠지만, 프랑스는 독일이 부활하기 이전부터 ‘요새건설’에 대한 논의를 해왔다. 당시 이미 프랑스의 여론은 요새건설에 어느 정도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문제는 ‘어떻게 건설하나’였다.


당시 프랑스군 최고 고문 자리에 앉아 있던 페텡은,


“후방과 연계가 가능한 요새선을 구축해야 한다.”


라고 주장한 반면, 조프르는,


“일정한 간격으로 요새군을 배치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즉, 페텡은 요새선이 돌파당할 경우를 상정해 후방의 요새선과 연대할 수 있는 요새건설을 주장했던 것이고, 조프르는 국경선 전체를 틀어막자는 것을 주장했다. 결국 이 두 개의 안은 ‘타협점’을 찾아, 독일 국경선에 면한 지역은 페텡 원수의 안으로, 벨기에 국경선을 면한 부분은 조프르의 안에 맞게 건설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프랑스의 영웅들이 요새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내놓을 때 프랑스 육군장관 자리에 앉아 있었던 이가 ‘마지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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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마지노(Andre Maginot)


마지노는 베르됭 전투를 잊지 않고 있었고, 다시 한 번 그 지옥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들어갈리는 없지만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체험했던 지옥을 다시 한 번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1929년 육군장관이었던 마지노는 프랑스 의회에 요새 구축안을 상정한다. 의회는 90%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요새 건설안을 승인했다. 그들도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의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요새 건설계획은 착착 진행됐다(마지노가 입안한 계획이지만, 마지노는 마지노요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실제로 마지노 요새를 완성시킨 건 후임인 폴 팽르베였다).



마지노선은 난공불락일까?


겉으로 보이는 ‘스펙’으로만 보면, 마지노선은 완벽 그 자체였다. 이탈리아 방면을 지키는 ‘알프스 라인’을 제외하고, 스위스 접경지대부터 벨기에 접경지대까지 750Km를 이어가는 이 ‘라인’은 가장 얇은 곳의 콘크리트 두께가 3.5m일 정도로 완벽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험준한 지형을 배경으로 당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건축기술과 최고의 화력을 동원해 108개의 주요 요새를 구축했다. 이 요새는 15Km 간격으로 배치됐고, 그 사이엔 연락통로를 판 후 아예 지하철을 놨다(협궤를 놓아 병력과 탄약‧물자를 이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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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강건한 겉모습과 달리 요새 안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연약한 지반에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를 쏟아 부은 통에 요새선 여기저기가 가라앉았고, 지하수의 침수로 요새 내부의 전기시설이 고장 나거나 전기합선으로 불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하철 건설공사현장을 보면 알겠지만(아니, 잠실에 건설 중인 L모그룹의 빌딩만 봐도 안다), 지하공사는 침출수와의 싸움이다. 마지노선도 마찬가지였는데, 요새 안은 지하수 때문에 항상 습기가 차 있어 화포의 상당수를 제대로 가동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노선은 난공불락이 맞았다(제2차 세계대전 때 한 군데 요새선이 뚫리긴 했지만). 독일도 마지노선에 대한 공략을 포기하고 벨기에 쪽으로 우회하는 낫질(Sichelschnitt)계획으로 프랑스를 점령한 걸 보면, 요새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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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슈타인이 입안한 ‘낫질계획’이라는 기상천외한 작전은 정확히 1940년 5월 10일 새벽 5시 35분에 시작됐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1940년 6월 17일 신임 프랑스 수상에 취임한 페텡이 휴전을 제의했고, 1940년 6월 22일 파리 근교에서 프랑스는 항복 조인식을 했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측 항복 사절단이 타고 온 객차를 끌고 오게 해(프랑스는 이 객차를 보관하고 있었다) 이 안에서 프랑스의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제2차 세계대전의 스틸 컷 중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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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진짜 이야기가 나온다.


“프랑스는 어째서 벨기에 쪽 국경선으로 마지노선을 연장하지 않았던 건가?”


돈이 없어서? 프랑스가 방심해서? 아니면 프랑스가 바보라서? 아니다. 여기에는 국제정치학적인 계산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벨기에 방면 국경선까지 마지노선을 연장할 계획과 생각이 있었다(대서양까지 둘러치려고 했었다). 그러나 벨기에가 방해(?)했고, 이 외교적 실수(?)로 프랑스는 한 달 만에 독일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사실 벨기에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은 배신과 음모가 횡행하는 상태였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를 탓하고, 서로를 의심하면서 독일의 부활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다음 시간에는 마지노선 건설을 전후로 한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와 외교적인 마찰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  



첨언

마지노선 이야기가 나와 가볍게 2~3회 외전을 연재하려했는데, 분위기 이상하다. 뭔가 잘못 건든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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