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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18. 월요일

산하








<5월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은 노래는 여러 곡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일련번호를 붙여서 구분을 하지요.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와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을 들이대면서 ‘왜 쏘았니, 왜 찔렀니, 트럭에 싣고 어딜 갔니’를 통곡하듯 묻는 노래는 <5월의 노래 2>입니다. 대개 5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술자리에서는 그 노래가 먼저 사람들의 결기를 세우며 울려 퍼졌고, 밤이 깊어지고 마음들이 가라앉으면 <5월의 노래 1>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와서 사람들의 콧날을 시큰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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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의 5월 18일, 종로 바닥을 열심히 뛰어다닌 뒤 최루탄 가루 잔뜩 묻힌 채 무사생환하여 가진 술자리에서 <5월의 노래 1>을 함께 불렀습니다. 그런데 한 선배가 매우 감상적인 어투로 자신이 이 노래의 가사 한 구절 때문에 지하철에서 체면도 창피함도 없이 펑펑 울었노라는 얘기를 꺼내더군요.


“형, 감성적인 데도 있는 거 인정할 테니까 거짓말하지 말아요.”라는 무시섞인 호소나 “그날 지숙이한테 차인 날이지?라는 비웃음이 사방에서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선배는 꿋꿋했습니다.


“아냐 정말 울었어. 근데 그 가사가 틀린 가사였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요. 좌중은 조용해져서 모처럼 진지한 빛으로 상기된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우리가 1학년 때 받았던 찌라시는 인쇄 상태가 영 안 좋고 가사도 띄어쓰기가 하나도 안 되어 있고 오탈자도 많았거든. 근데 2절의 한 대목이 잘못 적혀 있었어. ‘해 기우는 분수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인데, ‘애기 우는 분수가에’로 되어 있었던 거야. 그 대목에 왜 그리 가슴이 턱 막히고 눈물이 쏟아지는지... 나는 그 뒤로도 1년 동안 ‘애기 우는 분숫가에’라고 계속 불렀었어.”


“아니, 근데 애기 우는 데 왜 형이 울어요?”


“광주 애기들이 물밀듯이 떠오르는 거야. 저수지에서 물놀이하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죽은 꼬마, 그리고 아버지 영정 든 꼬마... 근데 울음이 터지게 만든 건 세상 그 누구도 얼굴을 모를 애기 때문이었는데... 너희들 그 묘비명 본 적 있지?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남편이 쓴. 그 돌아간 아내가 임신 8개월이었다는 거 알지. 그 태어나지도 못한 애가 광주도청 앞 분수가에서 엉엉 울고 있는 거야. 갑자기 내 눈 앞에서.”





언제 생각해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억울함이 가실 리 없는 죽음들인데, 이제는 이따금 생각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거리로 멀어진 듯합니다. 그 죽음들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 낸 작가의 입에서 실수일망정, 잘못 전달되었을망정 “그런 사태는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도 아니며 큰 틀에서 봐야 한다.”라는 표현이 튀어나오는 세상이 됐고, 그가 지지하겠노라 한 실용의 큰 이름 앞에서 저 작은 죽음들은 박제가 되어 박물관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랄까요.



항쟁이 발생하고 학살이 있은 후 35년. 지금도 대한민국 인구의 상당수가,


“총 들고 설치니 총 맞았지.”


라고 말하고 싶어 입술을 들썩거리고, 대관절 왜 쏘았는지 왜 찔렀는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는지 속 시원히 밝혀진 것은 없고, 전 재산 29만 원짜리 학살자는 편안히 늙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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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들고 싸웠던 사람들, 계엄군을 향해 총이라도 쏘고 악이라도 쓰면서 저항이라도 했던 사람들은 그래도 자신들의 최후가 어떤 의미인지, 자신들이 왜 죽어가야 하는지를 알고서 이승을 떠났을 것입니다만, 교사인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대문 앞에서 이제나 저제나 목을 늘이던 새댁은, 그리고 그 뱃속에서 힘차게 뛰놀던 생명이 된 지 8개월이 된 아이는, 저수지에서 멱을 감다가 계엄군의 조준 사격으로 오리보다 못한 목숨으로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던 아이들은,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과 손으로 세상에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여잡아야 했던 아이들의 울음은 누가 달래 줄 수 있을까요. 하늘 위 천사들인들 ‘내가 도대체 왜 죽었나요?’라고 울부짖는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었을까요.


광주 망월동 묘역을 막 다녀와서, 등사기로 밀어댄 <5월의 노래> 가사를 전철 안에서 외우던 한 대학생의 눈에 들어왔던 잘못된 가사, 엉뚱하게 실려 온 아이들의 울음이 떠도는 분수가의 풍경은 무뚝뚝한 장정의 마른 눈물샘에 홍수를 일으켰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뒤 누구도 1년 동안이나 가사를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로 그를 구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가사를 바꿔 부른 다음 술 한 잔씩을 더 위장에 퍼부어야 했지요. 누구도 <5월의 노래> 2절을 끝까지 부르진 못했습니다.


이렇듯 봄이 가고 꽃 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애기 우는 분수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애기 우는 분수가에, 애기 우는 분수가에.


참극이 있은 지 35년입니다. 그때 엄마 뱃속에 있던 엄마와 함께 천사가 되지 않고 지상에서 발 딛고 살 수 있었다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부르며 하루하루 젊음과 멀어져가는 자신을 노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기나긴 세월을 지나서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광주도청 앞 분수가에는 애기들의 울음이 스며들지 않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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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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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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