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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5월의 어느 날 밤, 서울 중구 필동에 있던 반민특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관사가 갑자기 부산해졌습니다. “지금 빨리 볼일 보고!” 제헌국회의원이며 반민특위 위원장이던 김상덕의 얼굴은 굳어 있었습니다. “각자 방에 들어가서 내가 부를 때까지 꼼짝말고 있어라.” 이윽고 건장한 사내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경무대 (청와대의 전신) 경호원들이라는 그들은 반민특위 위원장 경호원들을 몰아냈습니다. “각하 오실 때가 됐소!” 이윽고 도착한 이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지요.

 

대통령이 반민특위위원장의 집에 행차한 겁니다. 파격이었지요. 김상덕 위원장 또한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용무가 있다면 경무대 비서실에서 호출이 오고 경무대로 찾아가는 것이 당연한데 갑자기 대통령이 들이닥쳤으니 말입니다. 대통령 경호원들이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를 빈틈없이 에워싼 가운데 대통령과 위원장은 밀담을 나눕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방문은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최악의 친일 경찰이었던 노덕술 (김원봉을 체포해 모욕을 준 바로 그 사람)을 비롯한 핵심 친일 세력들에 대한 면죄를 요구한 겁니다. 동시에 김상덕 위원장에게 감투를 제시하며 유혹했지요. “임자, 무슨 장관 하고 싶습네까? 뭐든 보장합네다.” 김상덕 위원장의 아들 김정육씨에 따르면 대통령 방문 후 원만한 성품으로 이름났던 김상덕 위원장도 분기를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동포의 손톱에 대침을 박고 뼈를 뭉개고 고춧가루 물을 들이붓던 놈들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기술자일 뿐이었다고? 그래, 대한민국 하에서는 그 기술을 누구에게 쓰겠다는 건가?” 당연히 김상덕은 이승만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며칠 뒤 김상덕은 이승만이 왜 격식을 깨고 자신을 찾았는지 그 이유를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건 일종의 최후의 담판이었고 마지막 경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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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각 시도 경찰국장이 경무대에서 찍은 기념사진 1957년

 

1949년 6월 6일 중부경찰서장 윤기병 지휘 하에 경찰 80여명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합니다. 그들은 반민특위의 무장을 해제하고 사무실을 때려부수고 주먹질, 발길질을 퍼붓습니다. 바로 몇 년 전만 해도 그들이 독립운동가들을 다루던 그 방식으로 말입니다. 검찰총장 권승렬이 반민특위를 방문했다가 호신용 권총을 압수당할만큼 경찰들은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반민특위는 치명적 타격을 입고 머지않아 간판을 내리고 맙니다. 엉망진창이 돼 버린 반민특위 사무실을 둘러보고 경찰에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반민특위 관계자들을 만나던 김상덕의 뇌리에는 꼭 30년 전의 겨울이 그림처럼 살아왔을 것 같습니다.

 

1919년 2월 8일, 일본의 수도 도쿄답지 않게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조선 유학생들은 이날 2시에 열린다는 학우회 총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구구전승으로 알고 있었고 삼삼오오 행사장인 조선 YMCA 강당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낌새를 챈 일본의 경찰들도 감시의 눈을 빛내고 있었죠. 드디어 2시. 학우회장 백관수가 개회를 선언했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최팔용이었습니다. “긴급동의가 있습니다!”라고 부르짖으며 단상으로 올라간 최팔용은 모여 있던 조선 청년들의 피를 펄펄 끓게 만드는 선언문을 읽어 내립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

 

일본 경찰의 취조와 감옥살이는 혹독했습니다. 주동자 중 하나였던 송계백이 젊디젊은 나이로 옥사했을 정도였지요. 그는 학생모자 안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국내로 반입하여 2․8독립선언이 예정되어 있음을 국내에 전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1919년 2월 8일. 눈 내리는 동경에서 터져나온 조선 독립 만세의 물꼬는 3.1항쟁이라는 거대한 물살로 이어졌고 나아가 이후 26년간 독립 항쟁의 정신적 지주가 됐습니다. 김상덕 역시 바로 그날의 주동자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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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던 2월 8일 이후 감옥에 들어갔던 김상덕은 1년을 채운 하루 뒤 1920년 2월 9일 석방됩니다.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그는 1920년 3월 5일 상하이로 망명했고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출발에 이바지합니다. 만주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를 통합하여 단일한 대오로 일제에 맞설 것을 호소하며 단일한 독립운동 대오를 외쳤고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이후는 다시 중국으로 와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에 다시 합류했습니다.

 

일본이 중국 내부를 침공해 들어오면서 김상덕은 임시정부와 함께 고된 피난길에 나서야 했고 그 와중에 막내딸을 잃었고 피난의 종착지였던 중경에 이르러 아내마저 세상을 뜨고 맙니다. 그때의 아버지 모습을 외아들은 안쓰럽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된 아버지는 임시정부 일을 마치고 한 달에 한 번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밀린 빨래를 하느라 바빴다... 나는 아버지가 빨래를 하는 동안 강가를 휘젓고 뛰어놀았다. 그러다 지치면 빨랫감 옆에 쭈그리고 앉아 아버지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버지 코 끝에는 항상 말간 콧물이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철없는 다섯 살 개구쟁이 눈에도 아버지의 옆모습이 그렇게 측은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사반세기 전 눈 내리는 동경에서 함께 목숨을 걸었던 친구들 몇몇은 이미 2.8 선언과는 딴판으로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 서릿발같은 2.8 독립 선언문을 썼던 이광수는 일본인 가야마 미쓰로가 되어 조선인들에게 천황폐하의 적자가 되라고 윽박지르고 있었고 독립선언 당시 개회를 선언했던 백관수는 말년에 조선 청년들에게 지원병으로 나가라고 목울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또 한 명의 2.8 주동자 서춘은 아예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주필 자리를 차고 앉아 있었습니다.

 

옛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 맞아 죽고 헌병에 찔려 죽고, 가난 속에 병들어 죽고, 매질 하에 온몸을 못쓰게 되는 동안 몸을 팔고 마음을 팔고 정신까지도 팔아 버린 사람들은 그렇게 흔했습니다. 그들의 소식을 들으며 김상덕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오지 않을 것 같던 해방이 왔고 제헌 국회의원으로서 반민특위 위원장이 된 김상덕이었지만, 변절자 모두를 때려 죽이고 싶었을 그였지만 그래도 그는 옛 동료들의 체포에 가슴 아파했다고 합니다. 특히 2.8 독립선언, 그 사나운 명문(名文)으로 독립을 외쳤던 이광수의 체포 소식에는 더욱 그랬다지요.

 

어쩌면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2.8 독립선언의 구절 구절을 되읊으며 옛 동지를 원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랬소. 왜 그랬소.” 물론 자신의 친일 행위를 말도 안되는 논리로 계속 옹호하는 이광수에게 화가 난 수사관이 “가야마!”(香山)하고 창씨명을 부르자 본능적으로 “하이!”하는 일본말이 튀어나왔다는 옛 친구를 보면서도 계속 가슴 아파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경찰에 의해 박살났고 6월 중순에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반민특위에 힘을 보탤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잡혀갔으며 6월 26일에는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총에 맞아 서거합니다. 바야흐로 반민족행위자들은 다시 물 만난 고기가 됐고 다시 밝아온 그들의 세상에서 활개치기 시작했습니다. 반민특위 위원장 직을 떠나며 남긴 김상덕의 한 마디는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찌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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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난관을 피하면 앞으로는 평탄한 길이 오리라 했던 것도 난관을 피하면 피할수록 오는 것은 더욱 큰 난관이었습니다.”

 

감옥살이를 끝내고 상해로 망명하던 때 그는 항쟁의 세월이 그렇게 길다고는 생각지 못했을 터입니다. 곧 해방된 조선에서 그만둔 학업을 계속하여 소싯적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만주로 가서 김동삼 김좌진 등과 머리를 맞대고 민족유일당을 고민할 때에도 이것만 성사되면 해방이 멀지 않다고 스스로 위안했겠지요.

 

상해 임시정부로 다시 귀환하여 일본의 침략을 피해 수만리 피난길에 나서고 그 와중에 자식을 잃고 아내가 스러져도 그래도 해방만 되면 이 원수를 갚고 굽은 역사를 바로 펼 수 있으리라 속을 다독였겠지요. 해방이 왔지만 친일파는 여전히 활개치고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김상덕은 친일 경찰의 암살 리스트에 올라 있었습니다) 상황에서도 반민특위에 기대를 걸고 열정을 바쳤겠지요. 그러나 “난관을 피하면 피할수록” 오는 것은 난관 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6월 6일에 와서는 같은 국가에 정중한 국법을 지키는 기관 대 기관 사이에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런 사태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8월 말일까지의 짧은 기한 안에 우리들은 도저히 자신이 없으니, 자신이 없는 일을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맡아 가지고 동포들을 기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성명을 발표하면서 그는 또 한 번 1919년 2월 8일의 동경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동경을 뒤덮은 눈을 모두 녹여 버릴 듯 펄펄 끓는 기세로 독립 만세를 부르짖던 동료들 가운데 최팔용과 송계백은 고문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떴고 남은 사람들의 길은 여러 갈래로 갈렸습니다.

 

빼앗긴 조국은 찾았으나 봄은 아직 오지 아니하였고 봄을 부르는 외침은 꽃샘추위에 시들어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터진 전쟁 때 그는 납북됩니다. 자신이 지휘한 반민특위가 체포했던 옛 동료 이광수도 함께 끌려갔지요. 혹시 둘은 마주할 기회가 있었을까요. 그랬다면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요.

 

그리고 그가 나경원이라는 이름의 천박한 정치인이 “반민특위로 국민 분열” 운운하는 미친 원숭이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내뱉는 걸 보고서는 또 어떤 심경일까요. 궁금합니다. 반민특위가 국민을 분열시켰다... 참... 잔망스럽고 요사스럽기도 분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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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와해 후 통분해하는 김상덕을 바라보며 한 학식 있는 반민특위 대원이 적은 한시가 전해집니다. 작자는 미상.

 

邏京怨已棲契年 나경원이서글년

서울 거리 돌며 원망하노라 이미 오랑캐 세월에 살고 있는걸

反旻特僞皆謀毒 반민특위개모독

하늘을 거역하는 특출한 사기꾼들 두루 독한 음모 꾸미니

還壯恨多鬱火慟 환장한다울화통

돌아온 장사는 한 많고 울화로 통곡하노라

悖主氣高十盜祿 패주기고십도록

패악한 임금 기고만장하고 열 도둑 나라 녹 받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