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캠프 이즈벨, 캠프 그레이, 캠프 스페이스, 캠프 케이시, 캠프 레드 클라우드, 캠프 스탠리, 캠프 폴링워터, 캠프 콜번, 캠프 찰리블, 캠프 스탠톤, 캠프 게리오웬, 캠프 그리브스.

 

DjEymRkVsAQ9cZ8.jpg

 

‘기지촌’이 번성한 건 전쟁이 끝난 뒤였을 것이란 생각이 있다.

 

“전쟁이 한참이던 시절에 매춘할 정신이 있을까?”

 

전쟁이 한참이기에 매춘을 하는 거다. 이게 한국만의 문제일까?

 

비슷한 시기 전쟁을 치렀던 영국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미군은 영국에 주둔했다.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독일군은 영국 본토에 침공하지는 않았다(영국 본토 항공전이 있었지만, 이건 항공기끼리의 전투였다).

 

젊은 영국 남성들은 팔다리만 멀쩡하다면, 대부분 군대로 징집됐다(소아마비로 다리를 약간 저는 사람을 소방대에 집어넣을 정도로 인력이 모자랐다). 빈자리를 채운 건 여성들이었다. 미혼 여성의 91%와 기혼 여성의 80%가 생산활동에 투입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참전했다.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발을 담그게 됐다. 1942년 봄부터 영국에 미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까지 영국에 도착한 미군의 숫자는 25만 명에 이르렀고, 1944년 5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직전에 이르러선 100만을 넘긴다.

 

18~22세 사이의 남자들이 25만 명이나 몰려왔으니 무슨 일이 터져도 터질 수밖에 없었다. 미군 사령부에서는 병사들이 무슨 사고를 칠까 정훈교육을 강화했다.

 

“독립전쟁에서 영국을 이겼다는 걸 자랑하지 마라. 이건 과거의 일이고, 지금은 영국과 손잡고 독일군을 유럽에서 몰아내야 한다. 이걸 잊지 말도록.”

 

“영국이 입헌군주제 국가란 사실을 잊지 말도록. 영국 왕에 대해 욕하거나 모욕하는 행위는 일절 금지한다.”

 

미군 사령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정훈교육에 힘썼지, 상대적으로 ‘성행위’에 대해선 소홀했다. 미국과 영국은 같은 영어권 국가이자, 문화적, 인종적으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형제국이라 봐도 무방했다. ‘성 군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안심했던 것이다. 당시 미군의 주둔지는 대도시에서 벗어난 시골이나 도시 외곽 지역이었기에 성 관련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순진한 판단을 하기도 했다.

 

j1-20171109-175708.jpg

 

미군 사령부의 생각과 달리 성 문제는 터져나왔다. 자기가 태어난 동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던 18세의 청년이 난데없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도착했다. 이 동네는 지난 3년간 전쟁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 사지가 멀쩡한 남자는 찾아보기 힘든, 극심한 수준의 성비불균형 상태였다.

 

미군의 봉급은 (다른 나라에 비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이등병의 월급이 50달러 정도였는데, 영국군 평균보다 4배 이상 높았다. 또한 이들의 PX에는 없는 게 없었다.

 

피카디리 광장에 '굿 타임 걸(Good time girl : 미군을 쫓아다니는 영국 여성)'이 넘쳤고, ‘Wall job’이 유행어가 되었다. 영국엔 '벽에 기대어 옷을 입은 채로 섹스를 하면, 임신을 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물론 뿌리 없는 믿음이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이 시작된 1940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영국에서 태어난 신생아 수는 약 25만 명이었다. 이들 중 10만 5천 명이 사생아였다. 상당수는 전후 미국 가정 생활에 심대한 위협으로 작용했다.

 

j3-20171109-175708.jpg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국과 영국은 형제 국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문화적, 인종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문화적, 인종적 동질성이 없었다. 더욱이 영국은 비록 전쟁 중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경제 시스템이 돌아가는 상황이었고, 영국 본토에 대한 독일군의 침공도 없었다. 경제적으로 부족하긴 하지만 생존을 걱정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 매우 가난했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먹고 살아야 했다. 전쟁은 사람을 극단으로 내몰았고, 한국 여성들은 ‘성매매’에 나서게 됐다.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기지촌’ 역사는 1951년 말 부터다. 만약 전쟁이 1950년에 끝났다면, 이 정도로 기지촌이 활성화되지는 않았을 거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미군과 UN군은 북진을 시작한다. 전선이 고착화될 틈이 없었다. 1950년 10월 19일 평양이 수복됐다. 전선의 병사들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이 끝나고, 크리스마스 때에는 본국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거란 기대에 들떴다.

 

‘희망’이 아니라 현실적인 근거에 기반한 ‘예측’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했다. 1950년 12월 4일, 두 달 전에 점령했던 평양을 버려야만 했다. 1951년 1월에는 중공군의 대공세로 37도선까지 전선을 뒤로 물려야 했다.

 

(1.4후퇴가 대한민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민간 차원에선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많은 민간인은 UN군의 후퇴를 ‘전략적 후퇴’로 받아들여, 조만간 UN군이 다시 북상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잠깐 몸을 숨긴 뒤 다시 만나자고 한 뒤 흩어진 경우도 많았다. 정부 차원에서는 대한민국의 존망이 걸린 ‘정치싸움’이 치열하게 오갔다.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UN군 철수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UN에서는 중국과 정전 교섭을 했다. 아니, UN이 중국 측에 정전을 제시했다. 중국이 무리한 요구를 하지만 않았다면, 중국이 UN과 적절한 수준의 타협을 보았다면, 혹은 처음부터 무리한 조건을 내걸지 않았다면 한반도 운명은 뒤바뀌었을 거다)

 

IE002292118_STD.jpg

 

중공군 개입 이후 전선은 일진일퇴를 반복하다, 1951년 말 고착화된다. 전선이 고착화되자 미군은 전략적 요충지, 혹은 군 기반 시설이 갖춰 있는 곳에 주둔한다. 부산, 마산, 군산, 대구, 의정부, 동두천, 파주, 문산, 원주, 영등포 등 기존에 일본군이 주둔했거나 공창이 활발하게 운영됐던 지역에 들어온 것이다.

 

뒤이어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 당시 ‘돈’이 나올 곳은 미군기지 뿐이었다.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고아와 과부들, 생계 수단이 없었던 이들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레 기지촌은 확장된다.

 

5f646ae0.jpg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