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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꼰대가 몇 %의 비율로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꼰대라는 단어는 남발된다. 보통 산업화세대를 가리키는 이 말은 화살촉을 틀어 386세대를 향하기도 한다. 산업화세대에 공감하는 보수 성향의 젊은 층은 그렇다.

 

지금의 쓰임을 반영해 꼰대가 무엇인지 정의해보자면,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만 갇혀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고 억압하는 사람' 정도 되겠다. 그렇다면 타인이나 타 계층, 특정 세대를 꼰대로 규정하는 일은 '꼰대론'이라 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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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세대의 경우를 먼저 이야기해보자. 젊은층이 꼰대론에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불안정한 삶의 고통이 아무리 심대한들 사실 그 고생이 산업화세대의 노고에 미칠 리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계 최빈국에서 태어나 굶주림을 경험하고 초고강도의 노동, 독재와 혁명이라는 격변을 견뎠으며 국가동원에 시달렸다. 그들은 맨땅에서 우리 삶의 기반을 만들어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국의 산업화세대는 전 세계의 동 세대 중 가장 성공적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실패했다.

 

대한민국의 노인빈곤율은 OECD 국가 중에서는 물론 전 세계 1위이며, 76세 이상의 빈곤율은 무려 60% 이상이다.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의 풍경은 너무 흔해서 우리에게는 당연할 지 모르지만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기괴한 풍경이다.

 

그들은 한국의 물질적 조건을 만들고나자 미련없이 버려졌다. 자기 세대에게 강요된 노고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아파트단지에서 나온 쓰레기를 모아 연명한다. 그들은 쓸모가 다한 귀찮은 존재가 됐다. 사회의 입장에서는 편리하게도 이제는 더 이상 뉴스도 못 되는 고독사와 자살(노인자살율 세계 1위)로 빠르게 사라져주고 있다.

 

386과 88만원, 그리고 이후 세대는 산업화세대를 배척하는 데 세계제일의 성공을 거뒀으며 그들을 폐기처분할 준비를 완료했다. 여기엔 감정적인 준비도 포함된다. 꼰대론은 그래서 유용하다. 미국이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징집된 세대를 '위대한 세대'로 부르며 존경하는 것과는 정 반대다.

 

경제성장의 연료로 골수까지 연소된 그들은 이제 잔여물이 되었다. 우리는 잔여물의 냄새와 관리비용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30~40대 커뮤니티에서는 노인들의 무료 지하철 이용을 지금보다 강력히 제한해야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교통 인프라가 누구의 땀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상관없다. 유지하는 입장에서는 약간의 비용도 낭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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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고생스러운지 경쟁하는 소모적인 감정싸움에서 공평한 룰을 적용하면 젊은층은 산업화세대를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을 꼰대로, 그들의 언행을 꼰대짓으로 규정한다. 즉, 꼰대는 싫지만 꼰대론은 애착한다. 그리고 젊은 꼰대가 된다.

 

'노년층은 수많은 성공의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젊은층의 고통을 모른다.', '공장만 다녀도 처자식을 건사할 수 있었기에 함부로 말한다.' 이 사고의 구조는 "요즘 젊은 애들은 편하게 커서 바라는 게 많다."는 명제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즉 고생을 덜 해서 뭘 모른다는 사고방식이다.

 

386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386이 특권세대인 건 사실이다. 그들은 산업화세대가 다져놓고 IMF로 갈려나간 경제적 토대에 무혈입성한 후 후배 세대를 비정규직으로 쓰고 버린다. 386은 경제적으로 강인하며 신체도 건강하다. 그들이 헤게모니를 놓을 일은 요원해보인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구조와 그늘을 비판하는데 어느 세대보다 386이 자주 거론되어야 함은 맞다.

 

그러나 민주화세대가 우리 사회에 절차적 정당성,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를 부여했다는 자명한 사실마저 부정하면 그때부터는 얘기가 안 된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386이 가졌던 정의감마저 부정하려고 한다. 민주화투쟁에 대해 '데모를 했던 이유는 그래도 졸업만 하면 취업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데모가 아니라 당구나 등산을 해도 졸업하고 취직은 됐다. 그럼에도 최루탄을 맞는 선택을 했음은 사명이고 헌신임을 인정해야 한다. 데모하다 잡히면 맞고 고문당하고 취업길이 막혔음에도 위험을 감수한 이들이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니다.

 

386을 오해하고자 애쓰는 이유 역시 그들의 고생을 부정해야 해서다. 거기엔 '고생을 안 해봐서' 그모양이라는 사고구조가 깔려 있다. 꼰대라는 단어를 애용하는 이는 꼰대를 격렬히 증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한다. 자기 판단의 근거가 되어주고, 실은 자기야말로 꼰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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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로 불리는 상황과 꼰대로 부르는 행위의 차이는 별반 없다.

 

자기 세대의 고통과 불안을 기성세대에 이해받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스스로도 기성세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그것이 공정거래다. 젊은 꼰대가 늙은 꼰대에게 꼰대질을 멈추는 관대한 처사를 요구해봐야 소용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젊은층은 힘도 없잖은가? 뭘로 결과를 이끌어낼 건가.

 

산업화세대의 고생이 더 컸다고 해서 젊은층의 고통이 배부른 투정이 되진 않는다. 고통은 고통이다. 민주화세대의 가치가 유의미한 것처럼 젊은층이 호소하는 공정함도 묵살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기성세대와 타협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내려면 꼰대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꼰대질을 재정의하자면 : '갈등의 이유를 남에게 전가하고 그들을 자기 편의대로 규정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태도'라고 본다.

 

그러므로 꼰대에 나이는 없다. 선수치듯 상대를 꼰대로 규정함으로써 자기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행위야말로 꼰대질이다. 동료시민은 누구나 이해의 여지를 보장받아야 한다. 덧붙이자면 일상과 미디어에서 '요새 젊은이'의 처지를 걱정하는 기성세대는 자주 발견되는 반면, 그 반대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산업화세대를 이야기하려면 그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애환을 이해해야 한다. 민주화세대를 말하려면 그들이 얼마나 폭압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 어떤 불의를 마주했는지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칠십 노인이나 스무살 젊은이나 모두 한반도의 유전자 풀에서 태어났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나는 남에게 하나의 대상이자 배경에 불과하다. 남을 이해하기는 싫은데 나는 이해받고자 하면 필연적으로 좌절한다. 좌절의 책임을 자기 밖에서 찾는 데 성공하면 그때부터 햄스터처럼 증오의 쳇바퀴를 돌린다. 스트레스는 좀 해소될지 모르겠지만 이미 억울해졌으므로 다시 바퀴를 돌려야 한다. 그걸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젊은 꼰대가 돼서 얻는 실익이 아주 없지는 않다. 남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태도는 스스로에게 지적, 윤리적 만족감을 준다. 다만 세상이 그런 이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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