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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4조 (유흥영업종사자의 정의) 법 제20조 제2항에 규정된 유흥영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자라 함은 전 조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유흥영업소에서 영업적으로 객과 동석하여 주류를 직배하거나 가요음곡 등으로 객의 유흥을 돋구는 것을 업으로 하고자 하는 부녀자(이하 접객부라 한다)를 말한다.

 

(중략)

 

제17조 (접객부의 요건) 접객부는 다음 각 호의 요건을 갖춘 자라야 한다.

 

1. 성년자

 

2. 전염성 질환자가 아닌 자

 

3. 제20조의 규정에 의한 등록의 취소처분을 받지 아니한 자. 단, 취소처분을 받은 날로부터 1년 이상이 경과된 자는 예외로 한다.

 

(하략)

 

<식품위생법 시행규칙> (보건사회부령 제91호, 1962.10.) 中 발췌

 

이는 '식품위생법 시행규칙'이다. 다시 말해 '식품위생법'에 ‘성매매 관련 종사자’에 관한 항목을 끼워넣은 거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 당시 대한민국 법률은 여성을 ‘먹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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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의욕적으로 '양공주'와 일반 여성을, 미군 상대의 기지촌과 일반인들을 분리했다.

 

미군정 시절에 공창제는 폐지됐기 때문에 성매매는 불법이었다. 식품위생법 시행규칙이 생기기 1년 전에 만들어진 ‘윤락행위등방지법’에 성매매는 불법이라고 명시돼 있다.

 

제1조 (목적) 본법은 윤락행위를 방지하여 국민의 풍기정화와 인권의 존중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용어의 정의) 봅법에서 윤락행위라 함은 불특정인으로부터 금전 기타 재산상의 이익을 수수 또는 약속을 하거나 기타 영리의 목적으로 성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제4조 (윤락행위의 금지) 누구라도 윤락행위를 하거나 그 상대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제5조 (유인행위의 금지) 누구라도 남에게 윤락행위의 상대자가 되기를 유인하거나 권유하는 행위를 하지 못한다.

 

제6조 (매개행위등의 금지) 누구라도 윤락행위를 유인 또는 강요하거나 그 처소를 제공하지 못한다.

 

- 윤락행위등방지법(법률 제771호. 1961.11.9. 제정) 中 발췌

 

윤락행위등방지법으로 성매매를 불법화시킨 다음 식품위생법으로 ‘여성 접대부’를 관리하기 시작한 정부. 이 이중적인 태도는 뭘 의미할까? 원칙적으로 성매매는 불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성매매를 허용한다는 의미다. 공창제는 사라졌지만 사창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 국가가 이를 허용한 거다.

 

‘사창가’만으로 수요를 충당할 수 없어 타협책으로 ‘이중영업형태’가 생겨났다. 업종은 분명 식당이거나, 다방, 캬바레, 관광나이트지만 안에서는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거다. (다방이나, 모텔, 여관 등에 비치돼 있는 ‘여대생 출장 안마’ 광고가 박혀 있는 티슈곽. 소위 말하는 ‘여관바리’, ‘다방레지’ 등의 역사는 1960년대까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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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게 바로 ‘호스티스’다. 언제부터인가 호스티스란 말이 사회를 뒤덮었고, 수많은 호스티스 소설과 영화 등이 범람한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동명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1973)>다.

 

내용은 당시 통속소설의 구성을 그대로 쫓아간다.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상경한 영자가 철공소 사장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이후 공장과 버스 안내 일을 하다 팔이 잘려 사창가에 흘러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성폭행 대목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할 게 많은데, 6~70년대 호스티스 혹은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여성들의 성매매 동기 중 하나가 성폭행이었다. 이른바 ‘정조관념’이 부른 폐해였다)

 

이중적인 시대였다. 사회의 기본규칙이라 할 수 있는 법이 성매매를 허용한 것도, 그렇다고 허용하지 않은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였으니, 성매매는 음지로 숨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다방과 여관, 캬바레에서 성매매를 알선하는 것 자체로 윤락행위등방지법의 위반이지만, 현실과 법률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이 벽에는 ‘기지촌’의 존재가 있었다.

 

“미군에겐 왜 성매매를 허용하는가?”

 

정부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 기지촌을 폐쇄한다는 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정부에게 부담이었다. 일각에서는 1960년대 주한미군의 ‘소비활동’이 남한 GNP의 25%를 차지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1960년대 대한민국의 ‘특정’ 도시들은 미군에 의지해 살아가기까지 했다. 의정부의 경우는 인구의 60%가 미군과 관계된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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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고, 오징어와 돼지털(돼지털은 1961년 당시 대한민국 10대 수출 상품 중 하나였다), 은행잎(독일 제약회사에 팔렸다), 이쑤시개까지 팔았던 대한민국이다. 기지촌 여성들은 ‘매춘’으로 나라경제를 지탱하고 있었다.

 

성매매특별법(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특별법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줄곧 실효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유는 뿌리 깊은 ‘대한민국의 이중성’에서 찾을 수 있다.

 

 

 

2.

 

1960~70년대 한국 성매매의 변화상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1960년대 성매매와 관련된 법규에 관해 정리해야 한다. 박정희 군부 쿠데타 세력의 ‘정책적인 방향성’에 관한 이야기라 관련 법규를 언급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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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민주당 정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했다. 절차적 정당성을 뒤엎고 정권을 탈취했기에 '유능하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대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했다. 대표적인 게 깡패 소탕이었고, 성매매였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직후 대외적으로 '성매매 근절'을 선언했다. 당장 뚜쟁이 440명을 체포하고, 매춘부 4,411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겉으로만 보면 군인이 나서서 사회를 정화시켰다고 볼 수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앞서 말한 윤락행위등방지법이 대표적인 예다. 윤락행위등방지법은 선언적 의미의 ‘선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성매매를 금지시켰지만 성매매 방지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단속과 규제’였지만 단속은 어디까지나 ‘여성’들에 국한됐다. 성매수남은 훈방조치됐고 여성들은 강제로 직업훈련소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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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직업훈련소로 보내진 경우는 다행이었다. ‘대한청소년개척단’이라고 들어봤는가? 박정희는 깡패들과 노숙인, 부랑자, 성매매 여성 수천 명을 잡아다가 충남 서산으로 내려보냈다. 이들은 막사에 살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폐염전을 개간했다. 박정희 정권은 길거리에 부랑자와 성매매 여성이 있는 게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구악이라 생각했고, 이들을 모두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몰아넣었다(삼청교육대의 뿌리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군부정권의 ‘루틴’은 박정희 시대에 완성됐다).쇼를 위해 깡패와 성매매 여성을 단체로 결혼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쇼’의 핵심은 국가 주도의 인권유린이며, 초법적인 강제 연행, 강제 노역이었다. 

 

인권이나 법을 완전히 짓밟는 대신 성매매의 뿌리를 끊어버리려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박정희 정권의 성매매에 대한 모습은 표리부동(表裏不同) 그 자체였다.

 

의욕적으로 내놓은 윤락행위등방지법이 실행되는 데는 8년이 걸렸는데, 그나마도 지킬 의지나 생각이 없었다. 윤락행위등방지법에 시행령, 세부규칙이 붙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962년 6월에는 법무부, 내무부, 복지부 그 외 유관기관들을 모아 '특별구역'이라는 조치를 강구한다. 전국 104개 지역에 매매춘 특별구역을 만들어 이 안에서의 영업을 허용했던 거다(1964년엔 145개로 늘어난다). 솔직히 이 정권에게 성매매를 금지시킬 의지가 있었는지부터 의문이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성매매는 크게 산업적 측면과 군사적 측면 두 개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목적이 하나로 합쳐진 상징이 ‘워커힐’이다. 

 

1961년 9월 박정희 군사정권은 미군 위락시설을 짓기 위해 광진구 광장동 부지 18만 평을 수용했다. 그리고 이 ‘위락시설’에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의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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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발발했을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철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를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이 워커 장군이었다.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는 낙동강 전선을 끝까지 사수하며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의 상관이었던 맥아더는 대통령 한 번 해보겠다고 1/5000이라는 ‘썰’을 풀며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했다. 맥아더가 한국전을 백악관으로 향하는 톨게이트 정도로 생각할 때, 이 모든 ‘쇼’를 벌일 판을 만들어 준 게 워커였다. 부족한 병력과 물자를 가지고 낙동강 전선을 사수한 건 오로지 워커의 공이었다. 

 

박정희는 이 워커의 이름을 따 워커힐을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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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병사들과 장교들은 한국에 마땅한 ‘휴양처’가 없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넘어가, 일본에서 놀다 오곤 했다(당시 일본의 ‘유흥문화’는 한국의 그것을 압도했다)마땅한 외화 획득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뿌리는 ‘달러’가 줄어들면? 당연히 한국의 외화 보유고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처럼 워커힐은 박정희 정권의 고민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워커힐을 원래 목적인 '미군 유치'에 쓸 수 없었다. 당장 미국 부인 단체와 UN군 사령부가 한국 정부에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제2차 대전, 한국 전쟁 영웅의 이름을 카지노와 호스티스, 술판으로 점철된 곳에 쓰인다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박정희의 야심찬 계획은 이렇게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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