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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경제는 안전한가

 

마지막으로 전 세계 경제를 위협했던 2008년도 금융 위기가 발생한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지난 10년 동안 세계 금융 시장은 이례적으로 안정적인 회복기를 보냈고, 작년 4분기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조정기를 거치지도 않았다. 그나마도 올해 1분기 미국, 중국을 비롯한 세계 금융 시장은 역대급 상승장을 누렸고, 아직까지 다음 금융 위기를 발생시킬 만한 눈에 띄는 불안 요소는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안정기는 자칫 세계 경제가 지난 금융 위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시스템을 고친덕에 금융 시장이 탐욕에서 벗어나 성숙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시장에서 큰돈을 움직이는 사람, 회사는 금융 위기 이전이나 이후나 결국 엇비슷하다(오히려 금융 위기 때 과감하게 반대 포지션을 통해 큰돈을 벌었던 깜짝 스타 펀드 매니저의 상당수는, 이러한 과감성을 고수하다 회복기 동안 돈을 까먹으면서 많이 잊혀졌다). 이들이 운영하는 펀드의 간판이 달라지고 이들이 취급하는 종목이 바뀌었다고 이들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돈을 버는 방식 자체가 바뀐 것은 절대 아니다. 금융 위기 시절 생겨났던 많은 규제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완화되기도 하고, 이를 우회하는 파훼법이 나오기도 했다. 큰 틀에서 바뀐 것은 별루없다.

 

당장 눈에 드러나는 징후가 없다고 금융 위기가 앞으로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두가 다음 금융 위기가 언제, 어떤 형태로 찾아올지에 대해서 주시하고 있다(사실, 지난 10년 동안 금융 시장 안정화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것이 바로 이 불안이다. 금융 위기가 얼마나 세게 찾아올 수 있는지를 아직 기억하고 있고, 언제든 이러한 위기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단 걸 인지하고 있기에,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리스크 관리에 많은 공을 들인 것은 맞다. 안정성이 불안정성을 발생시킨다는 민스키의 말의 반대, 그러니까 불안정성이 안정성을 유지시켜 온 10년을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어쩌면 다음 금융위기가 언제 찾아오는지를 마음 졸이면서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한 유명 투자자는 지금의 상황을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는 연장전에 비유했다. 정규 경기를 모두 끝내고 어느 쪽에서든 득점 하나만 나면 지금 경기는 끝나고, 또 다른 경기 (불황 - 회복 - 호황기로 이어지는 사이클)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겐 금융 위기가 왜, 어떻게 발생하고 전개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다.

 

이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명이 이미 존재한다. 경제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먼저 수요와 공급을 떠올릴 것이고(과잉 공급으로인한 조정)투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시장의 불합리성 혹은 공포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투자 심리 과열과 위축의 반복).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위대한 거시경제 투자자 레이 달리오도 최근 답을 내놓았는데, 이를 정리한 것이 바로 금융 위기 10년을 기념하여 작년에 나온책 'Big Debt Crise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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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Debt Crises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이 달리오는 금융 위기에는 패턴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패턴이란 시장의 비합리성 혹은 공포와 같은 막연한 것(대표적으로 소로스는 재귀 이론을 들어, 투자 심리에 따라 시장이 요동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이 아니라 계측 가능하며, 반복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선택지 또한 한정적이라고 주장한다.

 

금융 위기를 패턴화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레이 달리오는 그의 회사 브릿지워터사 직원들과 함께 과거 사례들을 탈탈 털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주요 경제 국가에서 발생했던 수십 건의 금융 위기 사례들을 모두 분석했으며, 그 전개 과정과 이에 맞선 정부와 시장의 대응을 책에 정리해 두었다.

 

막상 책을 구입해 보면 생각보다 훨씬 두꺼운데, 그 이유는 방대한 사례 분석 때문이다. 사실상 첫 번째 챕터에서 그가 금융 위기를 이해하는 이론적인 방식을 모두 정리해 두었고, 두 번째 챕터는 전후 독일과 미국 경제에 대한 심화 분석, 세 번째 챕터는 그 외에 그가 분석했던 모든 금융 위기 분석에 대한 요약이 첨부되어 있다. 참고로 한국의 1997년 외환 위기 또한 이 세 번째 챕터에 짤막하게 수록되어 있다.

 

읽을 시간이 없다면 이론이 요약된 첫 번째 챕터만 읽어 봐도 무방하지만, 세계 최대 헤지펀드 매니저와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금융 역사에 남은 금융 위기들을 어떻게 분석하고 정리했는지를 실어 두었기 때문에, 적어도 두 번째 챕터까지는 읽어 보길 권한다. 참고로 이 책 역시 레이 달리오 홈페이지에 가면 PDF를 무료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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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움직이는 손, 크레딧

 

이제 책에 나온 이론 얘기를 좀 해 보자. 오늘은 이 책의 전반적인 토대가 되는 크레딧에 대한 개념을 잡고 가려고 한다. 레이 달리오가 경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크레딧이다.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신용도, 신용 한도가 될 텐데, 이 두 단어는 한국에서 왠지 대부 업체의 점유물이 된 것 같아 앞으로 계속 크레딧이라고 표현하겠다.

 

크레딧이란, 구매자에게 구매 능력을 주는 행위이다. 홈쇼핑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 무이자 할부를 제공해 주는 것도 크레딧을 주는 것이고마트에 가서 신용 카드를 쥐어 주는 것도 크레딧차나 주택을 구입할 때 담보 대출을 승인해 주는 것 역시 크레딧을 받는 것이다. 하다못해 함바집에 가서 이름만 대고 밥을 먹고 외상을 달아 놓는 것도 크레딧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상상 이상으로 이 크레딧에 의존해서 굴러간다. 만약 크레딧이란 게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소비는 현금이 있어야지만 이뤄질 수 있다. 퇴근해서 치킨을 시켜 먹으려고 해도 당장 지폐가 있어야 되고, 빨래를 돌리다가 세탁기가 고장이 나도 새로운 세탁기 살 돈을 모으기 전까진 그대로 버텨야 될 것이다. 아파트라도 사려고 한다면 사과 박스에 신사임당을 꽉꽉 눌러 담아서 부동산에 들고 간 다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돈을 일일이 세어야 할 수도 있다.

 

한가지 확실한 건 소비하기가 불편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일정 비율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할 것이고(그만큼 돈이 도는 속도가 줄어들 것이다), 수중에 현금이 없다면 소비 자체를 할 수가 없게 된다. 거시경제에서 누군가의 소비는 누군가의 소득이라서 이렇게 소비가 천천히 늘어나게 되면, 소득또한 천천히 늘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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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초창기 신용 카드(이름 자체가 영어로 크레딧카드다)가 개인 소비의 민감한 백화점(Sears), 식당 (Diner’s Club), 숙박업 (American Express) 등에서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매일 개인 고객들을 대하는 소매업자들은 조금이라도 물건을 더 팔기 위해 구매자들에게 크레딧을 제공해 주었고, 이러한 크레딧의 대중화로 우리들의 통장은 월급이 거쳐가는 정류소처럼 되었으나 우리는 소비를 편하게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

 

크레딧은, 기업의 투자 활동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수익률이 좋은 투자 기회가 있더라도 돈을 빌릴 수가 없다면, 이를 활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딴지마켓에서 절찬리에 판매 중인 이담채 김치가 전국적인 히트를 했다고 치자. 이담채 김치가 너무 잘 팔려서 김치를 받으려면 몇 달씩을 기다려야 한다. 내가 만약 사장님이라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고자 공급, 즉 신규 김치 공장을 세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금융 위기가 발생해서 크레딧이 사라져 버린다면? 아무리 김치가 잘 팔려도 은행은 나에게 대출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내가 새로운 김치 공장을 짓는 유일한 방법은 원기옥을 모으듯 김치를 팔아 공장을 지을 돈을 모아야만 할 것이다. 김치 공장 설립에 대한 투자가 늦어질수록, 김치 공장 설립으로 혜택을 볼 건설사, 설비 기계 업체, 김치 공장에 채용될 직원들 그리고 그 직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려고 했던 공장 인근 식당, 슈퍼 주인의 소득 또한 늦게 올라갈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 시간 동안에 이담채 김치에 대한 인기 자체가 사라져 버려, 이 추가 공장은 영영 세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크레딧이 줄어들면 놀고 있는 돈(예를 들어 은행 적금 등)이 더 생산성이 있는 곳(이 경우 김치 공장)으로 옮겨가는 속도가 늦어지고, 이 속도가 늦어질수록 누군가의 소득, 그리고 이로 인해 파생되는 소비 또한 느리게 증가한다.

 

반대로 크레딧이 잘 공급되면 어떻게 될까?

 

현금 + 크레딧 = 소비 (+) = 소득 (+)

 

크레딧이 늘어난 만큼 소비와 투자는 늘어나게 될 것이고, 이는 누군가의 소득 또한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기적같이 크레딧이 공급된 것만으로 경제 안에서 돈이 돌고 도는 속도가 빠르게 올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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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적으면 크레딧이 무조건 좋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크레딧이라는 건 사용되는 순간 항상 빚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 빚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지금 당장은 소비를 늘림으로 경제에 좋은 효과를 내지만 동시에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소비를 감소시킨다.

 

지금 돈이 없는데 치킨이 땡겨서 신용 카드를 써서 시켜 먹는다고 치자. 오늘의 나는 크레딧 덕에 먹고 싶었던 치킨도 먹었고, 치킨집 사장님의 매상을 올려 작게나마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스란히 카드빚이 되어 월급날 내가 쓸 수 있는 돈을 감소시킬 것이다. 물론 아주 장기적으로 보면 치킨집 사장님 또한 늘어난 소득으로 내가 다니는 회사 매출에 기여를 하여 나의 월급이 올라가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이건 순전히 가능성이고, 나라는 인간의 생산성(이 경우엔 월급)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기 때문에 미래 내 소비를 위축시킬 뿐이다.

 

이렇게 크레딧은 양면적이기 때문에 사실 가치중립적이다(굳이 한쪽을 고르라면, 크레딧이 아예 없는 게 너무 많은 것 보다는 좀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 금융 위기가 닥칠 때마다 중앙 은행들이 나서서 기를 쓰고 유동성을 공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 크레딧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고, 경제의 생산성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느냐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악덕 기업인 죽돌과 성실 기업인 마사오가 각자 회사 명의로 크레딧을 활용, 10억의 대출을 받았다. 악덕 기업인 죽돌은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이 돈으로 외제차를 뽑고, 매일 고급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를 먹으며 신나게 놀았다. 이 경우 10억은, 외제차 생산 회사, 레스토랑 사장과 같은 한정된 사람의 소득을 늘려 주는 것에만 소비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1회성 소비는 죽돌의 매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에 죽돌은 이 돈을 미래에 갚지 못하고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높다.

 

반면 성실한 마사오는 제2의 이담채를 꿈꾸며 10억으로 김치 공장을 차려 딴지마켓 등에 납품을 했다고 치자. 이때 마사오가 빌린 돈 10억은 음식, 자동차와 같은 소비재에 낭비된 게 아니라 사람을 고용하는 공장 설립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경제에 좀더 긍정적이고 지속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사오의 매출을 늘리는 것에 활용되었기에 이 공장이 잘 돌아갈 경우 10억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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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달리오에 따르면 똑같은 크레딧이라도 마사오처럼 생산적인 곳에 쓰일 때 크레딧은 순기능을 하고 경제를 발전시키지만, 죽돌처럼 생산적이지 못한 곳에 낭비되어 그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이 또다시 대출이 받는 방법(돌려막기)밖에 남지 않으면, 이는 악성 채무가 되어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따라서, 시장 참여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크레딧이 주어지고, 이 크레딧이 얼마나 생산적, 비생산적으로 사용되는가에 따라 경제는 요동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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