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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터져나온 것이 아니다. 4,19라고 숫자 세 개로 간단히 표기되는 거대한 사건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다름 아닌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1960년 2월 13일, 이승만의 유력한 경쟁자였던 야당 후보 조병옥이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가있을 때였고 급사하기 이틀 전이었다. 나이 여든다섯의 이승만은 이런 말을 내뱉는다. 

 

“의견 다른 사람이 부통령 되면 당선돼도 응종(應從. 명령이나 요구 따위에 그대로 따르는 것)하지 않겠다.”

 

정/부통령이 같은 정당에서 나와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헌법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아울러 자유당과 행정부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라.”는 지령이었다. 선거에서 진다면 그걸 인정하지 않겠다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야할 것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나이 여든다섯 대통령은 언제 급사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였다. 즉 부통령은 막연한 ‘바이스(vice)’가 아니라 확실한 차기 권력이었다. 정권은 아예 발가벗고 부정선거에 나선다.

 

범기독교계는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대통령은 장로인 이승만 박사, 부통령은 권사인 이기붕'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낯뜨거운 짓을 자행했고 이정재, 임화수 등은 한국에서 이름 좀 알려진 배우와 가수 등을 총동원해서 ‘이승만 박사, 이기붕 선생 출마 환영 예술인대회’를 열었다(경남도민일보 2018년 3월 6일). 2월 27일, 대구에서 있었던 자유당 유세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노산 이은상이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고 기염을 토했다.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하는구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대구 2.28 시위였다. 

 

3.15 부정선거는 부정선거의 세계적, 역사적 사례라 할 만했다. 정전시키고 투표함 바꾸는 올빼미식, 야당을 찍은 투표지에 인주를 묻혀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피아노식에 3인조니 9인조니 서로 감시하며 여당표 찍는 공개투표가 감행됐고, 대리투표, 유령투표 별의별 수단이 다 동원됐다. 선거가 끝나기도 전 괄괄하기로 이름난 남도의 항구 마산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거기서 열 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들이 죽었고 김주열은 경찰들에 의해 마산 앞바다에 수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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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을 때 가장 흥분한 건 그 또래의 고등학생들이었다. 마산의 고등학생들은 마산 시내를 휩쓸었다. 신발을 감춰가며 뛰쳐나가는 것을 막아 보았지만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마산에 이어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교문을 박찼다.

 

“3.1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공화국이요, 결코 독재국가, 경찰국가가 아니다. 법에서 이탈하고, 만행으로 탄압하는 정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광학생들은 평화적인 행위로 시정을 요구하는 바이다(대광고등학교)."

 

그 뒤를 이어 대학생들이 나선 것이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었다.

 

경무대로 향하던 시위대에게 총탄이 퍼부어지고 서울에서만 100여 명이 죽었다. 부산, 광주 등에서도 경찰은 총을 쏘았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꾸러졌다. 사람들 눈에 핏발이 섰고 겁 많은 이들의 등줄기에도 용기가 솟았다. 서울 시내 병원은 사상자들로 만원이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달려와 부상자들을 위해 피를 뽑았다. 거리에서 병원비가 필요하다고 외치면 돈이 쏟아졌다. 

 

이승만은 “나의 전 생애를 바쳐온 한국민으로서 어느 누구든지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할 일”이라며 남의 다리 긁다 피나서 빈혈 걸릴 소리를 하는 가운데 이렇게 덧붙였다. "부상자들 가운데 두 사람의 미국인이 끼어 있음을 심히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동아일보 1960년 4월 21일)" 

 

한때 광주항쟁을 두고 어쨌든 공권력에 대항하여 총을 든 행위는 부당하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4.19 때에도 무장항쟁의 기운은 역력했다.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을 때 마산 시민들은 수류탄을 탈취해 경찰서를 향해 던졌고 서울 시내 파출소 태반이 불탔다.

 

시민들은 무장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년, 태반의 청년들이 총을 다룰 줄 알았다. 경찰과 시민들은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광주항쟁에서처럼 차에 나눠탄 시민들이 곳곳을 누비며 참여를 호소했고 이에 호응한 사람들이 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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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이 있었다.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는 신문 기사 앞에서 목을 놓아 울었다고 했다.

 

“공산당 나쁘다더니 공산당 같은 짓을 한다(동아일보 1975년 6월 2일).” 

 

당시 시민들은 그렇게 외쳤다. “부정선거가 이적 행위다.” “이기붕도 싫고 공산당도 싫다.” 정부는 그렇게 외치는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경남 마산에서는 시신의 호주머니에 불온삐라를 넣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진영숙은 ‘교복 깃에 달린 학교 배지를 뽑아 학생증과 함께 재봉틀 서랍에 놓고는.... 풀이 빳빳한 새 칼라로 교복깃을 하얗게 바꿔 달고 집을 나섰다(위 신문).’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동대문 시장 옷장사를 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14살 학생은 시위대가 장악한 버스에 올라탔다. 

 

도심은 경찰이 장악했으나 성북구 등 외곽 지역은 시위대가 경찰을 압도했다. 시민들은 버스에 올라타고 환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렸고 진영숙도 구호를 외치며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때 고립된 파출소에서 날아온 총알이 그 머리를 꿰뚫고 말았다. 설마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상상했을까만 진영숙은 어머니에게 비장한 편지를 남기고 왔고, 편지는 그대로 유서가 되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미 그치겠습니다.“

 

1960년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79달러. 254달러인 필리핀의 1/3도 안되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국민소득 3만 불을 헤아린다는 요즘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비아냥이 난무하는데, 당시의 민주주의란 어떤 의미였을까. 대관절 무엇이 14살의 마음에 의분을 불을 당겨 목숨을 걸고 싸우겠노라 결의를 하게 만들었고, 고등학생들이 소방차에 매달려 시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스러지고 대학생들로 하여금 경찰의 총부리 앞에 태극기를 들고 “이 국기 앞에 총을 겨누는 자 반역자다!”를 부르짖게 만들었을까.

 

딱히 그 이유를 댈 것은 없겠다. 너무나도 중요하고 당연한 것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는, 그래도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누리는 권리는, 바로 그들의 피로부터 자라났다는 사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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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4월 19일이다. 지금으로부터 49년 전 경무대 앞에서 첫 발포가 행해졌다. 피의 화요일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