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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전쟁이 끝나고 나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문제제기를 했다.

 

, 네들 너무   아니냐? 육군, 해군 이전에 네들은 미국 군대잖아? 서로 머리 맞대고 고민하고, 협력하면서 싸워야지  따로국밥으로 싸워?”

 

아니, 해군은 바다에서 싸우는 거고 육군은 땅에서 싸우는  아닙니까?”

 

서로의 영역은 지켜줘야죠.”

 

집안싸움에 기둥뿌리 무너질까봐 그렇지! 일단 서로 악수해!”

 

루즈벨트는 해군과 육군을 강제로 악수 시킨다.

 

합동위원회의 설립이다.  당시 루즈벨트는 육군과 해군의 충돌을 조정하고, 향후 공동작전을 통해 인명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효율적인 작전을 펼칠 것이라 예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육군과 해군은 서로를 외면했다. 이들은 효율적인 작전은 고사하고, 서로 싸우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골이 깊었다. 결국 합동위원회는 대통령의 군사문제에 있어서 자문을 하는 정도의 역할만 수행했다.

 

육군과 해군의 공동작전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이후 있었던 1 세계대전은 공동작전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짧았고, 미군은 당시 연합군을 쫓아가기 바빴다(당시 미군은 장비마저도 빌려올 정도였다.  앞가림하기 바빴다).

 

평화가 이어지자 다시 합동작전이나 군사작전의 효율성 재고를 위한 합동 지휘체계에 대한 논의는  들어갔다(당장 대공황을 극복하는  급선무이기도 했고). 그러다 덜컥 2 세계대전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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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계대전은 미국에게 있어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대규모 병력 동원을 강요했다. 2 대전 말기 미국 육군은 11 야전군, 26 군단, 114 사단을 운용했다. 그럼 해군은? 항공모함만 100여척 이상 찍어냈으니  다했을 거다( 대부분이 호위항모라고 하지만 어쨌든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배였다).

 

문제는  대규모 군대를 통제하기도 바쁜데, 육군과 해군의 공동작전이 전제되는 전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거다. 당장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하는 태평양 레이스의 기본 형태가 ‘상륙작전이었다. 물론, 해병대가 선봉에 서긴 했지만 육군도 해군 함정에 몸을 실어 같이 움직였다.

 

대서양 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아프리카는 물론, 이탈리아, 프랑스로 진격하는 도중에 해군과 육군은 서로 손을 잡고 움직여야 했다. 대표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이때 직접적인 상륙 병력인  1군의 병력만 7 3천명이었고(1만 5천명 정도의 공수 사단을 포함했다), 이를 지원해 주는 해군 병력이 7 5천명(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동원된 함대 규모는 상륙주정들을 포함해서 7천 척 가까이 됐다. 미국, 영국, 캐나다를 포함해서 동원할  있는 가용 해군력을 총동원했다)이나 됐다.

 

누군가 이걸 지휘해야 했다.

 

1942 캐나다 아카디아(Acadia)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이 회담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의미 있는조직체가 하나 만들어진다.

 

이번에 미국과 영국이 같이 손잡고 싸우게 됐는데, 아무리 같은 영어를 쓴다고 해도  작전을 하려면 서로 손발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그렇겠지? 어딜 공격하려면, 작전도 같이 짜야 하고 서로 간에 암구어라도 맞춰봐야  테니까.”

 

 참에 참모본부 하나 만들어 볼까?”

 

 좋은 생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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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미군과 영국군을 지휘할 연합참모본부(CCS : Combined Chiefs of Staff) 만들어진다. 여기서 고민해 봐야 하는  이름은 ‘연합참모본부인데, 이게 어떤 확실한 명령체계가 있는  아니란 점이다.

 

같이 싸우긴 하겠지만, 쟤들은 영국 국적이고, 우리는 미국 국적이잖아?”

 

그렇지. 법적으로 명령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좋은  좋은 거라고, 서로 이해해 주면서 싸우자는 거지.”

 

글치? 쟤들 폭격하는데,  밑에 우리 애들 있으면...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연합참모본부는 어떤 명령권이나 강제적인  집행과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협의 기구같은 성격이었다. , 서로 공동작전을 펼칠  서로 알아야  것들과 진격방향, 연합작전의 필수 요소인 통신이나 신호체계, 지원의 범위 등등을 협의하는 정도였다.

 

영국과 손잡는 일은  정도로 마무리 지을  있었지만, 미군끼리의 교통정리는 요원하기만 했다. 태평양 전선에서 해군과 육군은 다시 부딪친다.

 

태평양은 바다잖아? 바다에서 작전은 해군에게 맡겨야지!”

 

바다에서 ? 바다에 둥둥  있을 거야? 상륙  ?  점령 안할 거야? 네들이  들고 상륙작전  거야?”

 

결국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을 반으로 갈랐다. 태평양 동북지역은 해군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남서쪽은 육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걸로 낙찰을 본다. 이들은 각자 열심히 일본군과 싸워가면서(가끔 항공모함을 빌려주긴 했다) 일본 본토로 진격해 나갔는데, 덜컥 문제가 터졌다. 바로 필리핀이다.

 

각자 독립적인 작전구역을 가지고 전투를 벌이던 맥아더와 니미츠였지만, 필리핀 점령을 위해서는 태평양해역군과 남서태평양해역군을 모두 동원해야 했다.

 

결국 태평양해역군 소속의 3함대( 유명한 홀시제독이 지휘했다) 남서태평양해역군의 7함대(킨케이드 제독이 지휘했다) 연합작전을 펼치게 된다.

 

이때  유명한 전문,

 

어디 있는가, 반복한다. 34임무부대는 어디 있는가.  세상이 알고 싶어 한다.”

 

(‘ 세상이 알고 싶어 한다 크림전쟁 당시 벌어진 발라클라바 전투를 배경으로 쓰여진 테니슨 경의 시구에서 따온 거다.  당시 홀시 제독의 3함대에 있던 6척의 고속전함을 34임무부대로 재편성 일본해군의 오자와 함대를 쫓아가게 했는데, 이때쯤 킨케이드 제독의 7함대는 일본해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킨케이드는 3함대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 세상이 알고 싶어한다라는 전문은 니미츠가 홀시에게 보낸 전문이었다)

 

처음으로 태평양해역군과 남서태평양해역군이 공동작전을 펼쳤는데, 손발이 맞지 않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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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만 해전뿐만이 아니었다. 2 대전 내내 해군과 육군은 갈등과 충돌을 반복했다. 트루먼이 해군과 육군이 싸우지만 않았어도 전쟁은  빨리 끝낼 수도 있었을 거라 말한  이런 사연이 있었던 거다.

 

이렇게 2 대전이 끝나자, 트루먼은 전쟁 내내 생각했던  가지를 실천에 옮기려 한다.

 

 합쳐서 싸워도 시원찮을 판에 육군은 육군대로, 해군은 해군대로 갈라져서 싸우는 꼴은   보겠다! 조만간 공군도 만들어  텐데, 군끼리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트루먼이 생각하기에 2 대전은 ‘기적이었다. 육군은 육군대로 싸웠고, 해군은 해군대로 싸웠다.  때문에 이길  있는 전투를 지기도 했고,  손실 없이 이길  있는 전투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육군 항공대에서 쪼개져 나간 공군이 등장하면서  간의 갈등은  커질 거라 예상했다.

 

결국 1947 트루먼은 ‘국가 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이란  만들게 된다.  국가안보법의 주요 내용을 3가지로 압축하자면,

 

첫째, 국가안보회의(NSC : National Security Council) 설치

둘째, , ,  3군을 통합한 국방부의 창설

셋째, 중앙정보국(CIA) 설치

 

.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국방부 창설이다. 원래 미국은 육군을 담당하는 전쟁부(육군부) 해군을 담당하는 해군부가 따로 있었으나, 이걸 하나로 통합해 국가군사기구(National Military Establishment)라는  만든 거다(이게 2  ‘국방부 개명한다).

 

 까놓고 말해서, 트루먼이 만든 국가 안보법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국은 형식적이지만, 어쨌든  간의 통합을 시도했고(엄밀히 말하자면, 실패라고 봐야 하지만), 이후  세계를 대상으로  첩보전의 선봉에 서게  CIA 얻게 됐다. 또한,  방위군을 실질적인 연방군의 ‘예비대 만들  있게 됐다. 이제 미군은  방위군을 자신들의 조직 안으로 끌어들일  있게 됐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미국 국방부에 관해서다.

 

국방부의 설치 목적은  간의 통합이다. 이건 자존심 싸움의 문제도 아니고, 효율을 위한 문제도 아니다. 절박한 현실이었다.

 

"각 군이 독자적으로 지상, 해상  항공전을 수행할  있었던 시절은 지나갔다. 평시 국방력을 건설하고,  조직을 정비하고자  때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것이다."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

 

2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었고, 나토 초대 사령관이었으며, 34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1958년 4. 그러니까 대통령 임기 중에 했던 말이다. 국방부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 바다에서 통합적으로 작전을 전개하는  어렵다는  아이젠하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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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균열의 조짐은 여러 곳에서 나왔다.

 

공군 창설 초기에 공군은 장교 수급의 어려움을 토로하면, 육군과 해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 졸업생. 그러니까 임관하는 장교의 25% 이내로 희망자를 뽑는 거야!”

 

그래서?”

 

어쩌라고?”

 

걔네들을 공군으로 전환 하는  어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 우리새끼들을 네들이  빼가려 ?”

 

아니, 우리가 만들어진 지 얼마  됐잖아? 당장 장교 수급하려면 사관학교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알 바 아니지! 우린   파서 장교 만들어 내는  알아?”

 

그러게? 은근슬쩍 숟가락 얹으려 하네? 어디서  것만 배워 와서...”

 

!  같은 미국 군대 아냐? 같이 나라 지키자는데...”

 

나라  혼자 지켜? 우리도 지켜!”

 

, 네들 나오기 전에 나라 지키던  우리거든?”

 

“...더러워서 안한다.”

 

이렇게 해서 1954  공군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공군사관학교를 세우게 된다.  보면 알겠지만, 미국  간의 갈등과 견제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그리고  갈등이 폭발했던 사건이 바로 초대 국방부 장관이었던 포레스탈의 자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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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