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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예요?”

 

공익제보자를 만나면 꼭 물어본다. 제보자는 제보 이후 외로워진다. 장소와 시간이 달라도 이것만은 아직 예외가 없다. 두 번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묻는다. 그 힘든 일을 다시 겪을 것인지. 

 

그런데 그 일을 실제로 두 번 한 사람이 있다. 윤지오는 故 장자연과 같은 회사 소속의 신인 배우였다. 그는 소속사 대표의 지시에 따라 장자연과 많은 술자리에 참석했다. 장자연의 죽음 이후 장자연 리스트를 직접 본 인물이기도 하다. 윤지오는 술자리와 장자연 리스트를 바탕으로 증언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술자리에서 장자연을 성추행한 가해자를 전직 조선일보 기자 조희천으로 특정했다. 그때 윤지오는 이순자라는 가명을 썼다. 

 

그리고 2018년 말, 얼굴과 실명을 모두 공개한 윤지오가 열 세 번째 증언을 위해 귀국했다. 검찰 과거사위 조사에서 한 증언으로 그는 10년 만에 장자연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유일한 목격자가 아니지만 10년 동안 유일한 증언자였다.

 

관심 속에서 제보했다는 것은 그 후에 따라오는 혹독한 단계도 또 겪어야 한다는 의미다. 관심이 높아진 만큼 제보 후에 오는 파도는 더 셀 수밖에 없다. 

 

열 세 번째 증언 이후, 다시 그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 윤지오를 만났다. 인터뷰 시기는 공식일정과 언론 인터뷰가 마무리되어 가던 4월 12일이다. 

 

이때도 윤지오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팩트 체크는 타 언론에서 이미 수차례 다루었고, 장자연 사건의 본질과 무관하다 판단, 따로 다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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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오 / : 인지니어스)

 

: 요즘 뭐 하세요?

 

: 인터뷰 계속하고, 끝나면 방송 모니터를 해요. 다음 인터뷰 때엔 개선해서 더 잘 전달하려고요. 댓글도 다 읽고, 인스타그램 체크도 하고요.

 

: 오늘도 30분 잤다면서요.

 

: 이런 생활을 반복한 게 한 달...? 살도 빠지고 체력적으로 아무래도 힘에 부쳐요. 두 달이 연장되었기 때문에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많은 걸 하고 가고 싶었는데, 엄마가 편찮으시다는 얘길 듣고 더 많은 인터뷰에 응할 수밖에 없었어요.

 

: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이 하고 가려고요?

 

: 네. 제가 관심을 더 받아야 사건에 대한 관심도 이어질 거라서요. 자연 언니가 없기 때문에 언니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저라고 생각해요. 무리하면서 응급실에 가고 잠시 입원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진 잘 버텨 온 거 같아요. 그만큼 많은 분이 응원을 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죠.

 

: 인터뷰를 많이 하셨는데, 요청한 언론사는 더 많았을 것 같아요. 조중동과 조중동 소유 종편에서도 요청이 있었나요? JTBC 빼고.

 

: 없었던 거 같은데. 제가 명함을 다 갖고 다니거든요. 볼까요?

 

윤지오 씨는 가방에서 명함을 모두 꺼내 보여줬다. 웬만한 언론사 명함은 다 있었지만 조선과 중앙은 없었다.

 

: 무리하면 하루에 인터뷰를 8개 넘게 한 날도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거기(조중동)는 기억이 안 나네요.

 

: 아! 동아일보가 있네요. 명함은 다 직접 취재나 인터뷰하신 분들한테 받았어요?

 

: 아니에요. 현장 가서 마주쳤을 때 주신 분도 있어요. 그럼 현장 자체를 안 왔을까요? 조선 빼고는 기사를 다 올렸던 것 같은데..

 

: 현장에 빠지진 않을 거예요. 사람이 많으니까.

 

: 근데 왜 받은 명함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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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윤지오 씨에 대해 쓴 유일한 종이 신문 기사.

아무래도 이 분야에 대해서는 종이를 아끼기로 한 모양이다.

 

 

첫 번째 증언, 그 이후의 삶

 

10대의 윤지오는 학교폭력을 목격한 이후의 충격으로 심리치료를 받게 된다. 어머니는 캐나다 유학을 권유한다. 몇 년 후,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한 캐나다 오디션에서 1등을 하고 연예인이 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다.

 

: 연습생이었을 때 힘들게 지냈더라구요. 특히 연습생 시절에 어머니가 일부러 경제적 도움을 주지 않은 것 같았어요.

 

: 엄마는 내심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 것 같아요. 돈을 아예 안 주신 건 아니고 한 달에 20만 원 정도만 주셨어요.

 

: 그래서 연습생으로 지내며 밤에 커피숍 아르바이트하고, 막일을 하러 다니잖아요. 그 정도면 포기할 것 같은데 어떻게든 하려고 오디션도 보고 미인대회를 나가고 했더라고요.

 

: 할 수 있는 건 다 했죠 제 선에서.

 

문제의 소속사 대표 K를 만나기 전에도 윤지오의 연습생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첫 소속사 대표가 사임하며 계약이 해지되었고, 두 번째 소속사에서는 매니저가 부적절하게 접근해 결국 준비 중이던 걸그룹 팀에서 탈퇴한다.

 

2009년, 장자연의 죽음 후 첫 증언을 한 윤지오는 증언으로 이미 알려진 이름 윤지오 대신 다른 가명을 쓸 것을 권유받는다. 캐스팅도 불발되었다. 그때 윤지오는 더 버티기 위해 개인기로 성취할 수 있는 미인대회에 나간다. 한국에 돌아와 연예계에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배우의 꿈을 계속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오디션을 보고, 막일을 하고, 미인대회를 연속으로 나가는 그 선택이 당시 본인에게는 차선이 아니라 최선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에 온 지 10년 만에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기가 무척 아까웠을 텐데요.

 

: 아쉽죠. 10년 넘게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거든요 사실은. 저와 같이 준비하다 지금은 활동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도 났고요. 저도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건 그분들의 삶이고, 지금 저는 제가 선택한 삶이 있는 거죠.

 

: 책을 쭉 읽다가 그런 게 좀 찡했어요. 주변 상황이 하나도 잘 풀리지 않았지만, 본인 나름은 배우가 되려고 사건 이후에도 발버둥 쳤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 그래요? 하하. 책에도 다 쓴 건 아닌데. 그 이후에 잠깐 아나운서로 방향을 튼 적도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정확히는 제가 하고 싶었던 게 아나운서가 아니니까 다시 배우가 되기 위해 마지막 기획사를 선택했던 거죠. 그곳 대표에게 처음으로 잠자리 제안을 받은 거고요.

 

: 그땐 알게 되었을 것 같아요. 장자연 씨가 말하던 “발톱의 때"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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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씨의 죽음 후에도 윤지오는 배우가 되기 위해 오디션을 보고 미팅을 이어간다. 그러다 계약 얘기가 오가던 기획사 대표로부터 노골적인 잠자리 제안을 받는다. 그 후 그는 의욕을 잃고 심한 우울증에 걸린다. 전문의는 장자연의 죽음이 남긴 트라우마라고 했다.

 

: 그때도 참 어렸죠. 이십 대 중후반이었으니까. 그래서 잘못된 생각을 했어요. 내가 뭔가 행동을 조금은 잘못한 부분이 있어서 이 사람이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게 만든 건 아닐까.

 

: 내가 뭔가 여지를 주지 않았나?

 

: 네, 화살을 계속 저한테 돌렸어요.

 

: 그렇게 하면 병나요.

 

: 맞아요. 그때 우울증이 시작되어서 캐나다에 갔고, 캐나다에서 거의 2년 정도 사람을 잘 못 만났어요. 낮에 잘 안 돌아다니고, 일은 안 하니까 20kg이 쪘어요. 벌어둔 돈을 까먹으면서 가족한테 빌붙어서 산 거죠.

 

엄마가 제일 속상했을 거예요. 엄마가 나가자고 하면, 누가 절 볼까봐 차 안에서도 쭈그리고 있었거든요. 남들이 그냥 웃고 있어도 꼭 나를 욕하면서 웃는 거 같고, 날 비웃는 거 같고. 우울증이 심해져서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거죠. 사람들도 무섭고, 눈도 못 마주쳤어요.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이런 게 심해져서 자살시도를 했어요.

 

우울증이 심해져 약물치료를 하던 중에 윤지오는 자주 장자연의 환시와 환청에 시달린다. 그러다 결국 죽기로 결심한다.

 

: 극단적인 선택을 했죠. 그러다 엄마가 오셔서 저를 살렸고, 그러면서 두 달 정도 입원치료를 했어요. 제가 입원했던 층에는 저처럼 자기를 해하는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어요. 약물치료보다도 그 사람들이랑 소통을 하면서 많이 치유됐어요.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보니까. 위로받고, 위로하고, 같이 울고 웃으면서 지냈어요.

 

: 원래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 스타가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연기를 할 수 있는 게 좋았어요. 배우를 하는 동안 작은 역할들만 했지만, 저는 되게 만족했어요. 솔직히 배우의 작고 큼을 구분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역이나 조연도 다 똑같은 배우인데요.

 

듣보잡이라고 하는데 저는 듣보잡인게 오히려 감사하고 행복해요. 제가 바른길로 걸어왔다는 게 증명이 되는 거 같아서 오히려 떳떳하거든요. 한 번이라도 욕심을 냈더라면 좋은 역할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과연 그걸 견딜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니더라구요.

 

: 이 질문은 제일 궁금했던 것인데요, 미안하게도 아마 지오 씨가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일 거예요. 왜 이렇게까지 증언을 한 거예요?

 

: 저도 이 질문을 많이 받아서 역으로 정말 왜 그랬는지 생각을 해봤는데, 이유가 없어요. 그냥 시작했어요. 그냥.. 사람으로서 해야 되니까? 도움이 필요하니까. 그냥 수긍했던 것 같아요. 하지 않아야겠다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 10년 전에 한 최초의 증언부터 쉽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증언하면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거고, 연예인 되고 싶은 내 꿈은 다 망가질 수도 있는데.

 

: 말씀하신 것처럼 21살이었고, 그냥 단순하게 생각했던 거죠. 내가 아는 만큼 대답하는 거라고. 물론 불이익이 있었어요.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안도 그렇고 더더구나 일에서도... 끝난거죠. 그런데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걸 당시에 알았더라도 했을 거예요. 아무도 안 나서니까. 저밖에 할 사람이 없는데 저마저 안 해 버리면 안 되잖아요.

 

: 아깝지 않았어요?

 

: 어차피 앞으로도 연예인을 할 수가 없어요. 솔직히 연예인을 하고 싶지도 않아요. 연예인이라는 직업 자체에 당시에 실망을 많이 했고, 지금 제가 꾸린 삶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요.

 

그래서 왜라는 질문은 다시 생각해봐도 답이 없어요. 그냥 제가 해야 되는 일이고, 입장 바꿔서 제가 그렇게 되었다면 자연 언니도 똑같이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 나이가 자연 언니 나이보다 더 많아져서 이제 제가 자연 언니의 언니 역할을 해줄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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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증언, 그 이후의 삶

 

: 열세 번째 증언을 하면서 실명과 얼굴을 공개했고, 정말 많은 응원을 받았잖아요. 그렇지만 지금 잡음도 굉장히 많죠?

 

: 응원해 주시는 만큼 저를 싫어하시는 분들이 있기 마련이라... 저도 사람이니까 이유 없이 싫을 수도 있죠. 그런데 성형을 했다, 다른 부위도 아니고 가슴을 운운하니까 너무 모욕적이죠. 어차피 응급실 갔을 때 엑스레이를 찍어둬서 그거까지 공개하려구요.

 

: 해명과 별개로 고소를 하실 예정이라 들었어요.

 

: 고소를 하는 이유는 악플이 악의적인 ‘습관’이기 때문이에요. 그분들이 저한테 처음으로 악플 쓰신 게 아니에요. 그전엔 A에게 달고, B에게 달고, 그리고 이제 저한테 와서 다시고. 이렇게 달아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으니까,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를 하는 분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저는 선처 없이 민사, 형사 모두 고소하려고 해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고 하시는데 제가 피해도 똥은 그 자리에서 계속 피해를 줘요. 그래서 치우려는 거죠. 거기서 모인 금액을 좋은 데 쓰면, 악플 다신 분들이 좋은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니 선처 없이 하려고 해요.

 

: 고소를 하려면 다 PDF로 준비해야 해서 네티즌들 도움을 받고 있죠?

 

: 처음에는 그냥 신고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악성 댓글이 쓰인 페이지) 캡처도 안되고 PDF 파일, 또 URL 주소까지 전체를 프린트하고 목차를 사이트별로 써야 돼서 제가 이메일 하나를 만들어 네티즌분들께 부탁을 드렸어요.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PDF 파일을 되게 많이 받았어요.

 

고소를 하려는 다른 이유도 있다.

 

: 제가 댓글을 다 보는데, 말투가 비슷한 댓글들이 많아요. 그리고 공격하는 뉘앙스가 비슷하고...

 

: 논리가 비슷하다는 거죠?

 

: 네. 아니면 아이디가 비슷하든지요.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인데 팔로우도 없고 게시물도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저도 아이디 차단을 하거나, 부모님 욕이나 누가 들어도 모욕적인 댓글은 삭제를 해요. 단순한 악플이 아닐 수도 있고..

 

: 댓글 알바가 의심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 고소를 진행하며 한 사람이라도 털어놓게 되면 그 자체가 증거가 될 것 같아서 단 한 명도 선처 없이 할 거예요.

 

: 인스타그램에 악플을 다 캡처해서 올려두잖아요. 그 과정이 고통스럽진 않아요? 악플을 다시 보고 곱씹고 하는데.

 

: 그렇죠. 그런데 제가 멘탈이 강하기는 해요. 이제는 보고 웃기도 하고, 뭘 먹으면서 보기도 해요. 물론 흔들릴 때도 있지만, 예전에는 그게 며칠씩 갔다면, 지금은 몇 초, 몇 분이에요. 아프리카가 멘탈을 많이 키워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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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는 왜 시작한 거예요?

 

: 연예인을 하려다 잘 안돼서 레이싱모델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저보다 먼저 아프리카를 시작했어요. 그 후에 그 아이 표정 자체가 밝아진 거예요. 계속 누군가와 소통하고 사랑받으니까. 그래서 아프리카에 가입을 하게 되었죠.

 

병원에서 퇴원한 후 윤지오는 운동을 하고 개인 방송을 시작한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새벽에 시청자들과 얘기를 나누며 지내다 보니 증세는 점점 호전된다. 그는 방송 시작 후 2년 만에 약물 치료를 중단하게 된다.

 

: 당시 캐나다에서 주택에 살 때였어요. 그때 집에 이상한 일들이 많아서 집 주변에 CCTV가 다 있었는데, 방 안은 특수한 목적이 아니고서는 CCTV 설치가 불법이었어요. 생각을 하다 보니 개인 방송을 하면 방 안에서 찍을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48시간 켜 놓은 적도 있고 양치하는 것도 다 찍고.. 근데 그런 걸 특이하게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한때는 시청자가 몇 천 명이었던 적도 있었어요.

 

근데 어디 사냐고 물어봐도 말을 안 했거든요. 무서우니까. 나이, 이름, 사는 곳 이런 걸 안 알려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시청자들이 짜증 내더라고요. 쟤 뭔데 신비주의냐고. 그리고 유료 아이템을 쓰면 저와 연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서 다 차단했더니 근래에는 시청자가 열 명도 안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나왔을 때도 아프리카 TV의 벨라라고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거예요.

 

: 요즘은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시잖아요. 저도 매일 확인하는데, 하루하루 뭐가 많이 올라오던데요?

 

: 하하. 제가 쌈닭이라서.

 

당시는 인스타그램에서 윤지오 씨에 대한 의혹 제기만 포스팅하는 계정의 팔로워 수가 늘고 있었다. 언론에 보도될 시점은 아니었으나 김수민 작가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윤지오 씨가 거짓말을 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

 

: 여기 오시기 전에도 올리신 거 봤어요. 지오 씨에 대한 의문을 계속해서 업로드하는 계정들이 생겼잖아요. 혹시 그 계정에 올라온 거 보셨나요?

 

: 저는 안 보고 있어요. 들어가 보긴 했는데, 저는 (차단해서) 못 보게 하셨는지 내용 안 보였어요. 다른 분들 말로는 제 라이브 방송을 보신다고 하더라구요. 윤지오 씨 지인이냐고 물어본 분들도 있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어요.

 

해당 계정에 올라온 것 중 몇 개를 보여주었다.

 

: 네. 방금 보여주신 사진은 엄마랑 같이 여행 갔던 거예요 하와이에. 뒤에 살짝 보이는 게 엄마예요 심지어. 안 그래도 막 퍼가시는 분들이 있어 다른 사람들이랑 찍은 걸 많이 삭제했어요. 다 제 추억이 있는 개인 공간이잖아요.

 

아빠가 선장님이라서 엄마랑 하와이를 간 거예요. 저 옷도 엄마랑 아빠가 사주신 거예요. 해외이기도 했고, 원래 흰옷을 좋아하니까… 제가 언제나 꽁꽁 감싸고 까마귀처럼 검은 옷만 입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건 오히려 사생활 침해거든요.

 

공익제보자는 비슷한 과정을 밟는다. 순수하고 가련한 모습에서 벗어난 개인의 사생활은 비난거리가 된다. 윤지오 씨는 과거 개인 방송을 하며 카메라 앞에서 춤을 췄던 것, 가족들과의 여행에서 흰옷을 입은 것, 10년 동안 친구들을 만난 것 등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10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숨어 살았다'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일상의 조각들이 ‘대국민 사기극'의 증거다.

 

이전 인터뷰이 박창진 사무장이 겹쳐졌다. 박 사무장은 인스타그램과 언론 인터뷰를 활발하게 한다는 이유로 회사 동료나 일부 네티즌에게 연예인 병 걸렸다는 평을 들었다. 블라인드 앱에서는 박창진 씨에 대한 루머가 오랫동안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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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거 자체가 2차, 3차 가해라고 저는 생각해요. 피해자다움이 과연 뭘까? 저는 증인이고, 목격자거든요. 그러니까 저를 피해자 프레임에 가두면 저는 프레임대로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 언제나 슬프고 엄숙해야 되죠.

 

: SNS에 ‘슬프고 힘들고 눈물 난다’고만 써놓는 게 오히려 가식적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우는 거죠. SNS는 더 그래요. 좋은 옷, 좋은 공간 위주로 올리지, 정말 안 좋은 날 솔직하게 올리는 사람 잘 없잖아요.

 

: 주로 제기되는 의혹은 이런 거예요. ‘10년 동안 힘들게 살았다’에서 예외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윤지오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고, 돈을 벌려고 하는 사기극이라는 것. 근데 10년 동안 검은 옷만 입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숨어 살면 죽어요.

 

: 죽죠.

 

: 그렇게 살면 지금 이렇게 못 살아 있겠죠. 어느 날은 힘들었지만 기분이 괜찮으면 친구를 만날 수도 있고, 친구를 만나 얘기 잘 하더라도 불안하고 우울한 속마음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때도 있는 거고. 인간의 복잡한 속내를 다른 사람이 재단하기 참 어려운 문제인 거 같아요.

 

: 제가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몇 년 전에 찍은 사진을 올린 적도 있거든요. 지금은 그걸 다 올린 날 찍었던 사진이라고 하면서 제가 거짓말한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실제로 어딜 놀러 갔더라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 본질과 상관없죠.

 

: 해명하라고 하는 게 많아요. 예를 들어 경호비를 엄마가 부담했는데, 그걸 실제로 얼마나 댔는지... 그럼 엄마가 경호비 입금한 걸 증명해야 돼요. 그런데 저희 엄마가 딸이 윤지오라는 이유로 불편함을 겪으면 안 되거든요. 너무 납득이 안 가고 화가 나죠.

 

제 친구들한테도 계속 DM(인스타그램 안에서 유저 간 1:1로 주고받는 다이렉트 메시지) 보내고, 친구들 사진까지 모으니까 제가 친구들 팔로우를 끊었어요. 저 때문에 괴롭힘당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해서요. 제 개인 공간인 SNS 때문에 이런 일을 겪으니 너무 미안하더라구요.


 

죄책감과 채무감

 

: 책에 죄책감과 채무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뭐가 미안했어요?

 

: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니 언니와 저에 대한 대우 자체가 달랐던 건 사실인 거 같아요. 언니에게 그게 가장 미안하죠. 저는 엄마가 보호막이었으니, 대표가 술자리에서도 9시에 보내줬거든요.

 

: 엄마가 지키고 있는 건 소속사 대표가 아무리 성격이 세도 불편했겠네요.

 

: 불편하죠. 저희 엄마가 여장군 같은 스타일이셔 가지고 대표님이 좀 무서워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 직업 특성상 어렸을 때 제가 유복하게 자라기도 했고요. 당시에 살던 집 주소, 엄마가 타던 차, 엄마가 입던 옷 같은 걸 대표가 다 봤으니까요. 심지어 대표님보다 좋은 차를 엄마가 타셨기 때문에.

 

: 주눅 들지 않게.

 

: 예. 경찰 측에서도 윤지오 씨는 소속사 대표가 돈으로 보고 투자 측면에서 캐스팅을 한 것 같고, 안타깝게도 장자연 씨는 그런 게 아니었던 거 같다고 해서 그 부분이 되게 미안했어요. 혜택까지는 아니지만 저는 좀 다른 대우를 받았고, 거기서 언니까지 구할 힘이 없었다는 게.

 

: 혼자 빠져나온 것 같아서?

 

: “엄마가 자연 언니를 보고 싶어 한다.”라고 대표한테 얘기해도 대표가 “자연이는 여기 있어야 된다.”라고 하니까...

 

: 같은 신인인데 거기서 뭘 더 하기는 어렵죠.

 

: 제가 가면 언니한테 연락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음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러면 언니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니까 저도 굳이 묻지 않았어요. 그러니 언니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애기야, 너는 진짜 발톱의 때만큼도 모른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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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미안하죠. 언니가 알고 있던 빙산의 일각도 몰랐고, 문건을 보기 전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몰라서. 마지막으로 꽃보다 남자 촬영장에서 화장실에 둘만 있었을 때, 내가 만약에 언니 얘기를 좀 들어줬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 병원에 입원한 동안 감정을 말로 푸는 것만으로도 훨씬 나아진다는 걸 경험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본인은 장자연 씨에게 그걸 못해줬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 나 때문에 언니가 이렇게 된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언니가 어쩌면 저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다 들어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어요. 어쨌든 제가 가장 가까운 데 있었는데... 책에 잔혹 동화로 묘사했던 것처럼 저만 도망치기 급급해서 언니 손을 놔 버린 거죠.

 

: 이 죄책감의 시작은 중학교 때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그때도 지오 씨는 친구들이 맞는 걸 목격했잖아요.

 

: 그때도 공교롭게 또 목격자였죠.

 

: 차라리 같이 맞는 게 마음 편하겠다,라고 느낄 정도의 죄책감이 들잖아요. 중학교 때도 그렇고 장자연 씨의 죽음도 그렇고. 직접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죄책감을 느낄만한 자리에 있었네요. 많이 미안했을 것 같아요.

 

: 사실 언니를 떠나보낸 것도 잘 실감이 안나요. 어딘가 멀리 여행을 간 사람이라고,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그렇게 버텨온 거고. 그러니까 극단적으로는 언니가 갇혀있는데, 제가 뭔가를 해야 언니가 거기서 자유로워질 것만 같은 느낌이에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서 해온 일들이에요.

 

: 그 미안함 때문에 지금 증언을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증언을 통해서 더 이루고 싶은 게 있어요?

 

: 사람들이 이 일을 아직 성상납이라 생각하는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라는 정황들이 있어요. 언니가 리스트에 썼던 그 많은 사람들에게 성상납을 했었다면 이미 톱스타 반열에 올랐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야말로 사람을 본인들 액세서리로 취급하기 때문에 “내가 얘 만나는데 얘 좀 한번 써봐” 이런 식으로 해서 도움을 줬겠죠. 성상납이 있었다면 언니가 경제적으로 힘들고, 배우로서 작은 역할을 하는 그 상황이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 예전에 수사에서 술자리에 간 건 맞는데 그걸 장자연 씨 본인도 스스로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면이 있어서 참석한 점도 있을 거라고 해석했던 것 같은데...

 

: 네. 언니가 자의로 성상납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장자연이란 사람을 가엾게 여기면서도 ‘네가 그 자리에 안 갔으면 됐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문건을 보면 그렇지 않아요. 자필로 쓴 두 줄에 정확히 명시되어 있어요. ‘협박’이라는 단어와 또 다른 단어 하나가. 타의에 의해 술뿐 아니라 술에 든 무언가를 복용했을 정황이 드러나 있어요.

 

: 그때 목격했죠?

 

: 네. 그때는 제가 술을 안 마시고 주변에서 많이 보지도 못해서 알아보질 못했어요. 그런데 저도 그동안 나이가 들고 캐나다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다 보니 술에 취한 행동과 다른 것에 취한 행동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어요. 술에 취한 사람은 오히려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데, 술에 든 다른 것을 복용한 사람은 아예 힘이 없어요. 자기 자신을 거의 놔버리는,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를 몇 번 봤단 말이에요. 그때는 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겠어요.

 

: 그 두 줄은 어떻게 됐어요?

 

: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어요. 질문도 없었고, 무혐의 처분이 났고. 사실은 그게 가장 본질이고 핵심인데. 그래서 저는 이게 성상납이 아니라 성폭행이고, 성폭행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특수 강간이라 생각해요. 그러면 공소시효가 10년이 아니라 15년이 되어야 해요.

 

오히려 성상납이라면 그중 몇은 인정을 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계속 덮잖아요. 성상납 그 이상을 스스로 인정하는 거라 생각해요.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가해자를 위한 공소시효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 16번째를 끝으로 증언이 끝났어요. 끝나고 나니까 마음이 어때요?

 

: 마음은 더 후련하죠. 말을 한다는 게 저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지금도 모든 걸 다 오픈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쌓아뒀던 걸 계속 토해내는 상태에요. 그러면서 저도 많이 밝아지고, 예전 모습을 찾아가는 과도기 같아요.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만나면 놀라시는 기자님, 작가님이 있었어요. 제가 너무 슬퍼서 밝게 포장하는 줄 아세요.

 

: 난감하네요. 이게 난데 연기를 할 수도 없고.

 

: 정말 힘들었던 과정은 다 극복했는데, 그런 인식을 보면 안타까웠어요. 이분들도 나를 그렇게 인식을 하시는구나.

 

: 장자연 씨에 대해서는 이제 채무감을 좀 덜었어요?

 

계속해서 한편에 지고 살았을 이름, 장자연 씨에 대해 물었다.


: 항상 짐처럼 마음이 무거웠어요. 지금은 그래도 나중에 하늘에 가서 자연 언니를 볼 면목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언니, 나 이만큼 했어. 그때 못 지켜줘서 미안했어. 그래도 언니가 떠난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서 이렇게 했어.” 하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 일단은 주어진 일을 다 했잖아요.

 

: 법안을 요구하는 것이든지, 정책토론회에 참석한다든지…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저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는데 관심을 받아 계기를 만들었으니 이제 그 일을 할 수 있는 분들에게 바통을 드렸죠.

 

: 여러 일을 했어요. 증인의 신변 보호에 대해 사회가 진지하게 생각해볼 계기도 만들었고. 나중에 돌아봤을 때, 사회적으로 본인이 어떤 의미가 됐으면 좋겠어요?

 

: 사회적 의미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앞으로 나이가 들어갈 과정밖에 안 남았는데, 40대 윤지오가 지금의 저를 돌아봤을 때 창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 네.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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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자가 누구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가해자가 10년간 어떻게 지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요. 밝은 옷을 입고, 저보다 더 멋진 공간에 가고, 더 좋은 곳을 여행했어도 아무도 비난 안 하죠. 증인인 저에게 손가락질하는 동안.

 

 

인터뷰를 준비하며, 윤지오의 사회적 의미를 찾고 싶었다. 처음엔 가해자로 지목된 거대 권력자에 대항하는 증인이나, 증인 보호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처음으로 일으킨 인물쯤이 될까 생각했다.

 

윤지오가 등장한 이후, 언론은 그를 ‘10년간 박해받은 피해자' 프레임에서만 다루었다. 개인의 삶이 있다고, 그러니 밝은 윤지오 역시 자연스러운 거라 말할 때에도 대부분의 언론은 박해 프레임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어차피 검증을 할 수 없고, 장사는 잘 되니까.

 

윤지오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이번에는 언론의 대부분이 ‘윤지오는 거짓말쟁이'에 맞춰 얕은 보도를 한다. 팩트체크를 하지 않고, 입장을 전달만 해도 장사는 된다. 윤지오를 성인처럼 띄웠다가 이제는 싸구려로 팔아먹기 위해 언론이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는 동안, 윤지오가 이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며 10년간 사건에 대해 일관되게 진술해왔다는 흔들리지 않는 사실은 흐려졌다. 어제는 어머니의 소재 같은, 본질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일들이 그 사실을 흐렸다. 그 안에서 장자연은 몇 번이나 더 잊혀질까.

 

언론의 프레임에 맞춰 사회는 빠르게 열광했다가, 빠르게 비난한다. 그 열기와 냉기는 같은 맥락이다. 사회가 원하는 고상하고 연약하고 불쌍한 피해자 프레임에 맞을수록 환호 받고 그것을 벗어날수록 비난받는다는 점에서.

 

그러니 이 모든 건 윤지오 씨가 부처나 예수를 닮지 못한 탓이다. 무려 일반인처럼 여행을 다니고, 10년간 흰옷을 입은 적이 있으며, 무서워 동굴에 들어가야 할 때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좋아 감히 개인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네이버에서 오랜 기간 윤지오 씨의 첫 연관 검색어는 ‘윤지오 몸매'였다. 얼마 전부터는 ‘윤지오 거짓말'이 되었다. 우리 사회가 공익제보자를 품는, 혹은 인정하는 방식은 지금 몇 년도에 있나.

 

시간이 지날수록 윤지오 씨의 사회적 의미는 명확해진다. 윤지오는 우리 사회의 GP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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