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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포레스탈(James V. Forrestal)이란 이름은 미국 국방부의 흑역사이고,  해군에게는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대속(代贖) 이름이다.

 

이야기는 간단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발씩 안겨  . 미국은  ‘이상한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 전쟁은 핵무기로 시작해서 핵무기로 끝날 거야.”

 

그렇지. 히로시마에 한 방 떨어뜨리니까 일본 애들이 바로 항복했잖아?”

 

그럼, 공군력을 증강시키는  오케이인데... 돈만 많이 잡아먹는 해군은 어쩌지?”

 

해군?  한 방이면  날아갈 텐데, 뭐하러 쌩돈 박아 넣어? 해군은 축소하자고.”

 

오케이 그렇게 가자!”

 

지금도 그렇지만 해군은 운용에 만만찮은 비용이 들어간다. 특히나 미국 해군은  돈이 많이 들어간다. 굴리는 항공모함  척의 건조비와 항공모함 함재기 비용, 거기에 함대 건설 비용까지 더하면 이건  잡아먹는 귀신이었다(21세기 현재. 미군 전체예산  60% 가까이가 해군에 배정되고 있다).

 

특히나 항공모함이 문제였다.

 

핵만능주의에 빠져 있던 미국, 게다가 2 대전이 끝나고 군축과 예산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미국 정부는 해군 축소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때 포레스탈은 초대 국방부 장관 자리에 앉는다. 해군 출신이었던 그는 2 대전을 치루면서 항공모함 기동함대의 위력을 실감했고, 해군 전력 유지와 항공모함 기동함대의 유지 발전을 위해 애썼다. 당시로서는 초대형이란 이름이 붙을 했던 USS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SS United States) 만들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당시 핵만능주의 덕분에 해군에 대한 압박이 날로 거세졌다. 심지어는 해군 항공대의 항공기를 공군에 이관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포레스털이 뉴욕 주지사 출신의 토마스 듀이(Thomas E. Dewey)와의 거래(듀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국방부 장관 자리를 포레스털에게 주겠다는) 공개되면서 포레스털은 초대 국방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고, 이후 우울증 진단을 받고 해군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해군병원에서 투신자살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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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의 4개군(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 타군보다 조금이라도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울러 자신들의 존재의의를 선전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한정된 국방예산 속에서 타군보다  많은 예산을 얻어내기 위한 싸움이 매년 이어지고 있다.

 

이러다보니 통합과 합동작전과는 점점 멀어지게 됐다.

 

베트남전 당시  육군 항공대가 사용했던 OV-1 모호크(Mohawk) 정찰기의 사례가 대표적인데, 육군은 전선 관측과 정찰용도의 항공기를 원했다. 공군이 처음엔 반발했는데, 국방부가 밀어붙인 덕에 어찌어찌 제작이 됐다. 문제는 육군이  녀석을 쏠쏠하게  활용했다는 거다(모호크는 상당히 괜찮은 정찰기, 전선통제기였다). 임무는 계속 추가됐고, 육군은  녀석의 항속거리를 늘리기 위해 공중급유를 생각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공중급유기는 공군이 보유하고 있었다.

 

, 우리 모호크에 급유   주면  되냐?”

 

아니 ?”

 

왜긴, 우리 같은 미군 아냐?”

 

같은 미군인데, 남의 나와바리를  넘어오냐?”

 

? 그건  무슨 소리야?”

 

하늘은 원래 공군  아니냐? 남의 나와바리에 멋대로 끼어드는데, 하다못해 언질이라도 줘야 하는  아냐?”

 

공군의 작전공역에 멋대로 날아오는 것도 문제였지만,   문제는 비행통보도 하지 않고 날아왔다는 거다. 공군은 모호크의 공중급유를 거절했다. 이에 화가  육군은,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너네 공중급유기  ! 우리도 공중급유기 살래!”

 

육군은 캐나다 수송기인 C-7 카리부를 가져와서는 임시 공중급유기를 만든다. 그리고는 모호크에게 공중급유를 했다.

 

명목상으로는 국방부 아래에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가 모여 있지만 저마다 다른 생각을 했었다. 모호크 정도는 애교 섞인 투정이었다. 아예 ‘대참사 벌어지기도 했다. 바로 독수리 발톱 작전(Operation Eagle Claw) 그것이다. 이란에서 회교 혁명이 일어났고,  이란 대사관 직원들이 인질로 잡히게된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 준비됐는데, 바로 독수리 발톱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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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개요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델타포스가 테헤란으로 잠입해 대사관을 타격, 인질을 구출하고(이들의 상공에 AC-130건쉽이 화력지원을 한다),  대사관 위로 헬기가 날아가 인질과 특수부대를 싣고 나오고,  사이 레인저 중대가 이란군의 버려진 활주로를 점령. 이곳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던 C-141 수송기가 날아와 구출부대와 인질을 태우고 탈출.  탈출을 호위하기 위해 F-14 동원.

 

RH-53 소해헬기와 C-130(공중급유, 화력지원 등등), 델타포스로 대표되는 특수부대. 각기 다른 군이 모여서 작전을 펼쳤고, 시작도 하기 전에  작전은 망할  같은 예감이 진하게 들었다. 그리고  느낌은 사실이 된다. 지나가던 유조차가 멈추지 않는다고 로켓포로 날려버리질 않나, 동원된 헬기 6  1대가 고장 나는 통에 작전을 취소하고 귀환하는데, 귀환도중 C-130에게 공중급유를 하다 충돌, C-130 헬기  대가 추락. 승무원 8명이 사망했다.

 

 작전이 실패한 결정적 이유는 회전익기와 고정익기, 특수부대의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결론이 났고, 훗날 특수작전사령부(SOCOM) 창설과 160 특수작전항공연대 편성, 그리고 V-22 오스프리 개발에 나서게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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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뻘짓은 계속 이어졌다. 1983 10 25 그래나다를 침공하게 된다. 베트남전 이후 미군이 대규모로 참여한 군사작전이었는데, 미군은 이때도 정신을  차렸다. 육군 헬기가 해군 항공모함에 착륙을 요청했는데, 해군이 이를 거절한 거다.

 

 대목에서 생각해 봐야 하는 , 미국 군들의 ‘변명이다.

 

 군끼리 통합을 하라는데, 물리적으로 가능해야  통합을 하든 말든   아닙니까? 전방에 있는 육군이 공군에게 화력지원을 요청하려면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압니까?”

 

단계를 줄이면 되잖아? 전방에 있는 육군 지휘관이 다이렉트로 공군 파일럿에게 지원 요청하면 되잖아.”

 

그게 가능하면 우리도 그렇게 하죠! 무전기 출력이 받쳐 줍니까?”

 

, 이제 다이렉트로 연결 .”

 

“......”

 

1970년대를 거치면서 전기통신 분야의 기술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지상에 있는 육군 지휘관이(중대장) 상공에 있는 CAS(Close Air Support : 근접항공지원) 항공기 파일럿과 음성  데이터 송수신이 가능할 정도가 됐다.

 

합동작전의 물리적 장벽이 하나씩 제거되기 시작했다(핑계거리가 사라진 거다). 여기에 결정타를 먹인 게, 1982 등장한 공지전(Air-land Battle)교리다. 공지전은 뭔가 새로워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고전적인 기동전(전격전) 새로운 변주였다. 다만, 여기에 신기술이 접목되면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육군과 공군의 공조가 중요하게 됐다(공지전은 이후 네트워크 중심전으로 가기 위한 가교가  준다).

 

주변이 무르익었다.

 

미군의 수많은 뻘짓, 고도화된 전장과 기술 발전, 새로운 교리의 등장. 시대의 선구자가 나올 토대는  만들어졌다.

 

1986 공화당 출신 상원 국방위원장 골드워터(Barry Morris Goldwate)의원과 민주당 하원의원 니콜스(W. Nichols)의원이 시대를 이끌었다. 바로 『골드워터-니콜스 국방부 재조직법(Goldwater–Nichols Department of Defense Reorganization Ac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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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은  의회주의의 승리이고, 정치인이란 어떤 ‘ 해야 하는지 보여준 적확한 사례이다. 최초  법의 시작은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존스(D. Johns) 장군이었다. 합참에서 8년을 보냈던 존스 장군은,

 

이대로 가면 미군은 위험해  것이다.  군의 분파주의를 극복하고, 신속하고 일관된 지휘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  생각을 1982 3  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말하게 된다. 처음 공을 받은 이는 당시 하원 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니콜스였다. 그는 1982년에 법안을 상정한다. 문제는 상원이었는데, 당시 상원 군사위원회는 보수적이었고 군부와 유착관계였다(상원 군사위원회 소속의 거의 모든 의원들은  경력이 있었다).

 

이때 상원쪽의 파트너가 등장한다. 바로 골드워터 위원장이었다.

 

 조만간 은퇴할 예정이다. 내가 은퇴하기 전에 조국을 위해  필요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

 

(1986 골드워터-니콜스 국방부 재조직법을 통과시킨  1987 골드워터 의원은 은퇴를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골드워터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반대의견을 설득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미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있는 엄청난 법안이었기에(실제로 골드워터 니콜스 법안은 21세기 미국의 세계경영을 가능케  법안이었다.   이전의 미군과 이후의 미군은 완전히 다른 군대가 됐다), 골드워터는 차근차근 그리고 확실하게  법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차근차근 상원 군사위원회를 설득했고, 군사위원회 투표 결과 19 0이라는 압도적인 결과로 통과했다.

 

(골드워터-니콜스 법안의 통과 과정에서 보여준  의회의 성숙한 토론과 문제제기, 의견수렴의 모습은  세계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모범이라   있다. 민주, 공화라는 정파적 이해를 뛰어넘어 무엇이 미국에게 필요한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 토론이 이어졌고, 반대의견에 대해서도  발언권을 보장했다. 초당적인 협력이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해서  의회에서의 이런 사전 정지 작업이 없었다면, 법안의 실행에 있어서 추진력을 얻는 것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간의 알력다툼,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끝내기 위해서는 확실하고 강력한 의회의 ‘의지 보여줘야 했다. 골드워터와 니콜스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의회를 설득해 나갔다. 이렇게 얻은 초당적인 지지가 법안의 통과 이후  상층부를 압박하는 힘이 돼줬다)

 

그리고 법안이 발의된  4년하고 241 만에  법은  의회를 통과했고, 1986 10 1 레이건 대통령이 사인을 하면서 미군 개혁이 시작됐다.

 

1947 만들어진 국가안보법의 실질적인 완성이라고 해야 할까?  동안 알고 있고, 바꿔보려 시도했던   간의 통합을 강제적으로 시행한 거였다. 바로 ‘통합군 탄생이다.

 

(골드워터-니콜스 법안 안에는 수많은 내용이 있다.  예산권에 관한 문제부터 군의 의회통제에 관한 부분까지 많지만,  연재기사에서는 ‘통합군하나에 초점을 맞춰보겠다. 실제로 통합군 창설이  법안의 주요 골자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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