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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동홍, 장윤현, 이재구, 이은기

주연: 김동범, 최경희, 고동업, 신종태, 홍석연, 엄경환, 조현모, 이은희, 최일순

음악: 안치환, 조성욱

촬영: 김재홍, 오정옥, 이창준

15세 관람가 / Color / 106분

 

 

 

 

원래는 위 영상으로 만든 리뷰입니다. 

아래 글은 영상의 텍스트 버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영상 쪽을 봐주시면 좋겠지만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듯 해서 텍스트로도 첨부합니다. 

영상과 텍스트에 있는 내용은 약간씩 다릅니다. 

 

 

 

[놀랍게도 이번엔 스포일러가 적습니다!]

 

한국독립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제작 집단이 있다. 이름하여 '영화제작소 장산곶매'. 음악평론가 강헌, 명필름 대표 이은, 영화감독은 <이태원 살인사건>의 홍기선, <고고 70>의 최호, <알포인트>의 공수창, <접속>의 장윤현 등 훗날 문화예술계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당시에는 각기 다른 대학교 영화동아리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모여 영화도 운동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결성된 제작소였다. 이름은 황해도에서 구전되는 장산곶 전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륙에서 쳐들어온 매와 구렁이떼에 맞서 싸우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장산곶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전설은 7~80년대 한국 사회를 풍미했던 황석영 작가의 소설 <장길산>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해당 전설은 탐관오리들을 처단하며 백성들의 구원자가 된 황해도 구월산의 의적 장길산 이야기에 차용됐고, 장산곶매는 곧 민초들의 끈기에 대한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지금과 달리 대학교가 많지도 않았던 데다 진학하기도 힘들었던 시대. 당시 대학생들은 지금 같은 모습을 포함해서 부당한 국가에 맞서거나 사회를 좀 더 좋게 바꾸고자 뭔가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영화제작소 장산곶매의 행보도 이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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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명리학 대가지만 장산곶매가 그런 곳인지는 예측 못하셨다.

 

당시 일반적인 한국독립영화들처럼 16mm 필름으로 영화를 제작한 장산곶매는 장편극영화 세 편에 중편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었다. 첫 작품은 5.18 민주화 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 트라우마를 다룬 1989년작 <오! 꿈의 나라>였다. 이후로 당대에 끝없이 외면당했던 교육과 사회 정치, 노동 문제를 전면으로 다룬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영화들은 시나리오부터 조지고 보는 당대 심의 제도를 볼 때 결코 극장에 정식으로 개봉할 일이 없을 것이므로 '공동체 상영'을 택해 대학가와 노동 단체를 중심으로 상영됐다. 그러니까 이번 5월 1일 노동절에 맞춰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 4K 해상도로 복원된 <파업전야>는 처음으로 정식 개봉하는 셈이다.

 

<파업전야>는 장산곶매의 최고 히트작이다. 그럴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계기는 서울 혜화동에 있었던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처음 자리를 잡고 상영했을 당시 공권력에 의해 필름을 압수당한 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굳이 민감함의 정도를 따지자면 5.18을 소재로 한 <오! 꿈의 나라> 쪽이 더 심해 보이지만, 의외로 그 작품은 상영 당시 재판부에서 정부의 필름 압수시도를 기각한 바 있다. 노태우 정부 입장에서 전두환 정부와 다르다는 점을 어필하는 용도로 5.18을 활용하기에 적당했으므로 나름 유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 문제는 풀어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88 올림픽을 개최하고 산업 발전 측면에서 최고조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더 빼먹어도 모자랄 판인데 노동자들에게 노조와 파업의 중요성을 말하는 작품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심지어 무료 관람이었으니 이건 막아야겠다 싶었겠지.

 

 

(위) 마틴 리트 감독의 <노마 레이>

(아래) 장산곶매의 <파업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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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는 마틴 리트 감독의 1979년작인 <노마 레이>의 영향을 받은 작품처럼 보인다. 물론 한국에는 개봉하지 않은 작품이라 당시 제작진들이 봤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작품들을 보며 카메라 움직임을 연구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장면이 <노마 레이>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이는 게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닌 듯 하다.

 

<파업전야>는 <노마 레이>와 반대의 전개 방향을 취한다. 그 작품은 샐리 필드가 연기하는 노마 레이라는 노동자가 노조운동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노조운동가가 빨갱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한국의 현실에서 이런 성장 서사가 제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그래서 <파업전야>는 무기력한 현실 속에서 회사의 개처럼 살던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그가 노조에 관한 생각을 바꾸는 과정을 보여준다. 도입부에서 "이 세상의 주인은 바로 우리"임을 외치며 노조 결성을 부르짖다 끌려나가는 노동자를 보여주는 장면도 그가 외친 발언보다는 끌려나가는 행위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한국 회사에서 보는 일상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처음부터 본론을 꺼낼 생각은 없다. 다만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현장 노동자들의 생활을 익숙하게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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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언론에서 일상적으로 묘사하던 노조의 모습

 

노동운동은 '공산주의 의식화'로 치부되며 주류 TV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왜곡되어왔다. 작품이 노조활동의 숭고한 의미 대신, 평범한 사람들이 노조를 계획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연출로 상영시간 상당 부분을 채운 것은 이 왜곡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다. 노조에 회의적인 노동자 한수와 열성적으로 노조활동을 하는 애인 미자가 나누는 섹스 장면이 대표적이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직접적인 묘사가 없는 가소로운 표현 수위지만 아무리 노동자들의 일상을 묘사한다고 해도 섹스 장면까지 넣어야겠느냐며 장산곶매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당대 주류 한국영화의 트렌드 중 하나가 맥락없이 벗기기 였으니 그 수준과 비슷해 보일거라 생각했었나보다. 다행히 <파업전야>에서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행위로서 보여진다. 한수가 일하는 공장에서는 같은 노조원끼리 연애를 하고, 사상에 관해 치열하게 토론하기보다 축구를 통해 서로를 돈독하게 만드는 식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설문조사에서 임금차별에 대한 현실적인 논의를 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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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는 공장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노동운동가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사는 서민이 있을 뿐이다. 숭고한 사명감을 가지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여건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참여할 뿐이라고 말한다. 의외로 혁명이나 노동운동에 참여하거나 이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연애감정이다. 사회운동을 다룬 작품에서 연애라는 소재가 간과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파업전야>는 이 부분까지 수월하게 표현한다. 그렇게 노동영화이자 일상물로서 자기 위치를 충실히 유지하며 노동운동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춘다.

 

물론 일상물이라는 의미는 한 개인의 일상과 주변 일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법이고 뭐고 휴지조각으로 아는 당대 헬조선 노동 현장의 처참한 일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덕분에 노동자들에게 향하는 탄압도 열심히 묘사된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실제로 회사 측의 일방적으로 휴업으로 정상 조업 재개 투쟁을 벌이던 한독금속 회사 공장을 촬영지로 삼았다. 소규모 무대에나 쓸 법한 주피터 라이트 조명으로 거대한 공장 내부를 비춰야 했다며 제작진은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밝기조차 보장해 주지 못하는, 안 좋은 의미에서 현실성이 잘 부각된다. 공장 작업반장과 이사진들의 협박으로 밥도 제때 못 먹고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노조 결성 소식을 들은 이사진이 발 빠르게 어용노조를 만들어 맞불을 놓으려는 것 또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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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주류 언론은 노동자들의 노조와 어용노조를 하나로 묶어 설명하며, 그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노조결성에 회의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 점에서 <파업전야>는 이 노조와 그 노조가 다름을 말하고,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수를 보여준다. 한수의 갈등은 당대 정권과 언론이 수출역군과 경제활성화를 내세우며 미화시키기에 바빴던 기업권력의 음흉한 면모를 드러내는 순간이자, '어째서 노조가 우리에게 필요한가'를 효과적으로 대변하는 연출로서 부족함이 없다.

 

이런 작품이다 보니 노태우 정부는 상영 저지를 위해 경찰과 헬기까지 동원했다. 작품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공연장 허가가 취소됐고 관객은 봤다는 이유로 연행과 구금, 심지어 일하던 회사에서 해고당하기까지 했다. 장산곶매는 이에 맞서 일명 '<파업전야> 탄압분쇄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 상영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대학교에서 상영될 때는 학생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필름을 사수했고,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며 상영장에 진입하면 상영 책임자들은 영사기와 필름을 챙겨 탈출했다. SNS도 없던 시대이니만큼 놔뒀으면 볼 사람들이나 보고 끝났을 작품이었다. 어찌보면 당시 권력자들의 호들갑이 <파업전야>가 3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모으고 당시 천 원짜리였던 팜플렛을 팔아 1억 원의 수익을 내게 만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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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는 이후로도 세상이 필요로 할 때 몇 번 더 소환됐다. 사실 지금도 이 작품은 존재감을 드러낼 만 하다. 작품이 공개된 지 30년인데 아직도 사회가 바뀌려면 멀었기 때문이다. 눈에 띄게 나아진 부분이 있다면 아마 노동법 공부했다는 이유로 정부기관에 부당하게 끌려가 고문당하는 시대는 아니라는 점. 아직까지는 그 뿐이다.

 

다만 이번에 첫 극장 개봉을 위해 다시 소환된 <파업전야> 복원판은 과거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영화, TV 드라마 쪽에서 몇몇 노동문제가 논란이 된 바 있다. 한국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과로로 인해 부상을 입거나 끝내 사망에 이른 경우가 있었고, 어떤 스태프는 드라마 제작사를 노동착취로 고발했다가 내부에서 감시당했다. 영화계엔 고작 몇 년 전 표준계약서가 도입됐는데 이제서야 표준근로기준법도 도입된다며 자화자찬하는 중이다. 머리를 쓰건 몸을 쓰건 예술이란 원래 중노동이었고, 영화현장은 막노동 현장이나 마찬가지다. 노동과 관련된 이야기를 최전선에서 만들어 왔으면서 정작 노동권리가 보장되는 영역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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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안치환의 명곡 '철의 노동자'가 울려퍼지는 <파업전야>의 엔딩 크레딧을 보고 있으면 영화, 드라마, 영화제 분야에서 일어난 스태프 혹사에 관한 일화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스태프가 과로사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넷플릭스의 <킹덤>, 아래 인스타그램 글을 나오게 만든 TVN의 <아스달 연대기> 등등. 90년대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촬영할 때도 '우리는 예술하는 사람'이라는 명목으로 혹사시켰다. 무려 전태일 이야기를 촬영하면서. 영화, 드라마 분야는 '철의 노동자'란 노래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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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사회에 대한 저항운동이자 평상시 받아들여졌던 노동현장에 대해 영감을 주는 식으로만 기억되던 이 작품이 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마침내 첫 개봉하는 <파업전야>는 되물을 수 있다. 작품이 만들어진 지 30년인데 어째서 그동안 한국 영화 현장은 바뀌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영화 또한 노동의 산물이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또한 노동자다. <파업전야>는 여태까지 이상할 정도로 접점이 없었던 영화계 종사자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한 편의 영화가 될 것이다. 장산곶매 일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나이를 먹었을 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만든 <파업전야>는 지금도 새로운 영감을 주는 고전으로 남았다.

 

최소한 이 작품은 시대에 부끄럽지 않다.

 

p.s.

 

1) 노동절을 기점으로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한 4K 복원판은 정작 나 사는 동네에서 개봉하지 않았으므로, 2008년에 발매됐던 DVD로 다시 봤음을 알린다. 후줄근한 DVD지만 발매 당시에는 작품이 한층 화사하게 보인다고 호평이 자자했는데 복원판은 확실히 작정하고 작업했으니까... 예고편 영상으로 봐도 장난이 아니더라. 어서 블루레이가 나올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2)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작품에서는 금방 지나가지만) 먼저 노조 활동을 하던 한수의 애인 미자가 다른 노조원들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사적으로 더 이익을 누리기 위해 노조활동을 하는 것이면서 5.18의 슬픔을 이용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파업전야>는 그 장면을 통해 노조는 결국 사회적으로 소수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끼리 연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노조는 자기네 회사 투쟁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노조, 혹은 사회단체. 혹은 성소수자 단체 관련 행사나 투쟁 등에도 참여하고 돕기도 하더라. 그런 연대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3) <파업전야>의 공동 감독 중 이은기 감독은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단편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뙤약볕에서 노동을 하다가, 어느 날 지하철역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한다. 이후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