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빨리 진급한 인물은?
1.
역사를 뒤져보면, 소년등과를 했던 천재들은 수두룩하지(이후의 인생이 많이 꼬이긴 하지만). 이 사람들을 모두 정리하다 보면 한 세월일 거 같아서 몇 가지 기준을 설정했어.
첫째, 민주주의 체제 혹은 이에 준하는 국가 시스템이 존재하는 상황에서의 진급(전제왕조 국가에서는 왕이나 통수권자의 마음에 따라 쾌속승진을 하는 경우는 배제하기 위해)
둘째, 군 계급과 체제가 확실히 정립된 상황에서의 진급(군 체제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급 인플레가 적용되는 경우가 왕왕 있어. 창군 초창기부터 6.25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 30대 장군들이 수두룩 지천이었던 걸 생각해 보자)
이렇게 기준을 정하고 나니 얼추 윤곽이 드러나. 바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야.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진공군 총사령관직을 맡아 세계 역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의 병력인 287만 6천명을 휘하에 두고, 이를 지휘하였던 남자.
16년간 소령 계급장을 달고 살았으나 대령에서 대장까지 승진하는 데 2년 밖에 걸리지 않았고, 1943년 12월에 대장을 달았는데, 1944년 말에 원수로 승진했어. 불과 1년 만에 진급한 거야.
2.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아이러니의 연속이야.
Eisenhower라는 성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독일계 이민가문 출신이야(그의 조상 중에 철광석을 캐던 광부가 있었던 듯 해. Eisenhower라는 성은 철광부란 뜻을 지니고 있어). 독일인의 피가 흐르면서도 그는 2차 대전 내내 독일군을 때려잡는 데 온 힘을 다했으니...
까놓고 말하자면, 아이젠하워는 군인, 특히나 ‘육군’이 되겠다는 어떤 소명의식이나 신념이 있어서 군인이 된 건 아니야. 아이젠하워가 군인이 된 건 ‘친구’ 덕분이야.
아이스크림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친구를 사귀었는데(이 친구 이름이 헤즐릿이라고) 해군사관학교에 시험 쳐서 한 번 떨어지고 재수 준비 중이었다고 해.
이 친구가 아이젠하워를 꼬셨어.
“군인이라는 게 꽤 괜찮은 직장이야. 나라 망하기 전에는 월급이 계속 나오고, 제복도 멋있고, 나라 돈으로 해외여행도 가고, 게다가 장교가 되면 밑에 부하도 수 천 명 씩 거느릴 수 있어.”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아이젠하워는 친구 따라 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해. 처음부터 군인에 대한 꿈이 없었기에 육군, 해군 가리지 않았어. 그래서,
“기왕 치는 시험인데, 해군이랑 육군 다 넣자.”
이렇게 해서 아나폴리스 해군 사관학교와 육군의 웨스트포인트 두 군데에 시험을 쳤어. 해군사관학교 시험에선 수석으로, 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선 차석으로 붙었으나, 나이제한에 걸려 해군 사관학교는 포기 했어(어떤 신념이나 철학 같은 것 없이 성적 따라 대학교와 학과를 선택했다는 게 느껴지네. 그래도 머리는 좋았나 보다. 두 군데 다 합격했다니... 그것도 수석과 차석으로 말이야).
비슷한 시기 군 생활을 했던 맥아더나 패튼이 군대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과 신념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다.
3.
어쨌든 해군 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 모두 붙은 아이젠하워의 선택은 육군이었어. 해군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어(나이제한에 걸렸으니까).
군에 대한 특별한 신념이나 철학이 없었던 그를 사관학교에 붙들어 놓은 건 ‘미식축구’였어. 사관학교에 있던 미식축구팀에 들어간 그는 미식축구에 완전 미치게 돼(해군과 육군의 대항전은 지금도 유명해. 대항전이 펼쳐질 때마다 스포츠 메이커들은 자신들의 유니폼을 입히기 위해 별 짓을 다하지). 그러나 다리를 다쳐 더 이상 미식축구를 못하게 되자, 웨스트포인트를 자퇴하려고 까지 했었어. 한마디로 군인이란 직업에 목매달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인물이야.
어쨌든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하게 됐지만, 승진과는 별 인연이 없었어. 무려 16년간이나 소령 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니... 여기서 재미난 인연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맥아더야.
그는 9년간이나 맥아더의 부관으로 생활하게 돼. 그가 대령이 될 수 있었던 건 맥아더 품을 벗어날 수 있게 되면서부터야(그래도 나름 맥아더가 추천해줬어). 아이젠하워에 대한 맥아더의 평가는 훌륭했는데,
“아이젠하워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중 최고의 사무원이다.”
군인으로는 모르겠지만(야전군인으로 활용한 게 아니라 따까리로 사용했으니), 일 처리 하나는 똑 부러진 거지.
4.
맥아더의 품을 벗어난 후 아이젠하워는 승승장구를 해. 아니, 2차대전의 여파라고 해야 할까? 그의 능력이 인정받게 된 거야.
그의 지휘철학은 다른 게 없었어. 오로지 인화와 조화였어. 언제나 조정자 역할을 맡고, 실타래처럼 꼬인 현안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야. 더 대단한 건 그의 웃음이었는데, 말 그대로 백만 불짜리 미소였어.
“20개 사단에 필적할 만한 미소.”
라는 평가만 봐도 알 수 있을 거야. 언제나 온화하게 웃으며 상대방 의견을 경청하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그 누구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그가 실실 웃다가 끝내는, 그저 그런 사람 좋은 사람만은 아니었어. 언제나 조화롭게 문제를 해결했지. 미영 연합군 지도부는 다가오는 유럽진공 작전의 총사령관을 찾았는데, 더 이상 볼 것도 없었어. 유럽전구 총사령관에겐 ‘뛰어난 전략’을 원한 것도 ‘대단한 용병술’을 원한 것도 아니었어. 다만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영연방군으로 구성된 이 3백만 가까운 병력을 부드럽게 끌고 갈 조정자가 필요했던 것이었고, 아이젠하워는 이를 훌륭히 해치웠어(늘 패튼과 몽고메리의 싸움을 중재해야 했거든.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가 없었다면 연합군은 진즉에 콩가루가 됐을 거야).
아이젠하워는 개성강한 연합군 장성들의 의견을 조율했고, 300만이 넘어가는 대부대를 운영하는 관리인으로서 활약하게 돼.
(미국의 물량을 생각한다면, 유럽 본토에 상륙한 다음에는 어찌됐든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전쟁이었지. 탁월한 전술전략보다는 큰 실수 없이 무난하게 가는 게 가장 안전한 방책이었을지도 몰라)
2차 대전을 성공리에 마무리 짓고, 나토 초대사령관을 거쳐 1953년에 미국의 34대 대통령이 돼. 대령부터 시작해 10여년 만에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 거지(만년 소령의 반전이다).
2차 대전이란 위기가 아이젠하워에게는 하나의 기회가 됐던 거야(군인에게 전쟁만큼 확실한 승진의 기회가 또 있겠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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