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홈양2.jpg

 

 

60~70년대 한국의 성매매는 ‘정치’, 그것도 ‘국제정치와는 떼놓고 이야기   없다. 저번 박정희 군사정권의 성매매는 크게 산업적 측면과 군사적 측면  개로 설명할  있다고 말했는데,  2개의 측면은 ‘국제정치 환경 아래서  톱니바퀴를 돌린 거였다.

 

1971  모든  시작됐다.

 

1971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1968 11 닉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다음해 7 닉슨독트린이 발표된다. 내용은 간단했다. 베트남에서 미군은 철수해야 하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개입을 줄여야 한다는  주요골자였다.  내용에 따라 한반도에 전개 중이던  2사단과 7사단이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건 명백한 한미 상호방위조약 위반이다!”

 

박정희는 항의했고, 진통 끝에  가지 합의를 봤는데, 대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1971 7 말까지 7사단을 철수하고, 서부전선의 2사단을 후방에 배치한다. 휴전선은 한국군이 전담한다.

미국은 15억불의 군사원조, 군사차관을 제공하여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을 지원한다.

양국의 외무, 국방 고위관리가 참석하는 연례안보협의회를 개최한다.

 

최규하 외무장관과 포터 주한 미국 대사의 공동성명이다.  공동성명은 이후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위기에 빠진다. 카터가 주한미군의 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거다(박정희 정권 말기 카터 행정부와 충돌을 벌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한미군 철수가 백지화 된  레이건이 등장한 덕분이다).

 

안보적으로 7사단이 빠져나간다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아울러 ‘산업적으로  타격이었는데, 주한미군이 빠져나가는 만큼 외화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만

 

대만의 상황은 더욱  극적이었다.

 

1964 월남전이 터지면서 대만은 잭팟을 터트렸다대만 동부 화롄(花蓮)이나 최남단 컨딩(墾丁) 미군 전용 휴양소가 개설됐고, 대만은 때 아닌 관광 호황에 즐거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당시 미군 장병들이 뿌리고  돈만 5,300  가까이 됐었다(한국은  당시 피를 팔았고, 일본은 물건을 팔았으며, 대만은 관광과 여성을 팔았다).

 

(아이러니   당시 미군이 최고 휴양지로 찾았던  타이베이의 ‘베이터우北投온천이었는데,  온천은 대만이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이 개발한 시설이었다. 미군은 일본이 남기고  유산을 이때까지 활용했던 거다)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할까? 70년대 대만은  마지막 불꽃을 태울 듯이 불타올랐고, 서서히 꺼져갔다.

 

기분좋은중화.png

 

1971 10 25, 유엔 총회가 2758 결의안 채택.

 

2758 결의안의 채택은 대만에게는 사형선고였다. 이전까지 대만 정부가 국제연합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였다. 그러나 2758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가 됐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승인된다. 불행은 연달아 찾아왔다.

 

결의안이 채택되기 전후로 키신저가 비밀리에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고,  와중에 중국 최초의 대륙간 탄도탄인 동풍(東風)-5 발사됐고(이미 1964년에 원자폭탄, 1967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뒤이어 핑퐁외교가 이어졌다. 그리고 1979 미국과 중국은 수교를 하게 됐고, 대만과 단교, 대만에 주둔하고 있던 주대만 미군 사령부가 철수하게 된다.

 

안보적으로 보자면, 한국 정부에게는 ‘위기였다. 대만에 벌어진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지지 말란 법이 있을까? 미국이 손바닥을 뒤집어 버린다면, 한국에 있는 미군들이  떠날 수도 있다. 실제로 닉슨과 카터로 이어지는 미국 행정부는 주한미군 철수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주한미군 철수가 ‘단교 이어지지 말란 법이 있을까? 한국 정부는 바짝 긴장하게 된다.

 

불행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과 불안의 기운 사이로 한줄기 서광(瑞光) 한반도로 비춰졌다. 바로 일본 기생관광이었다.

 

1972 일본 관광객이 폭증하게 된다. 이유는 크게  가지로 나뉠  있었는데,

 

첫째, 일본 내의 문제.

둘째, 한국의 유치 전략.

 

이라고   있다. 하나씩 설명하겠다.

 

우선 일본 내의 사정에 대해 설명해야겠는데, 1971 당시 한국을 방문한 일본 관광객 숫자는 겨우(?) 9 6천명 수준이었는데, 1972년이 되면 21 7천여명으로   이상 폭증하게 된다. 이는 순전히 일본의 문제였는데,  당시 일본의 주요 해외 나들이 대상 국가는 ‘대만이었다. 같은 일제 식민지를 겪었지만, 대만의 경우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본에 우호적이었다(수많은 일본 문화가 거리낌 없이 대만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들 일본 관광객들은 대만의 문화와 정취를 느끼려고 갔을까? 아니다. 이들이 원했던 여행의 진짜 목적은 성매매였다. 이미, 대만의 성매매 산업은 월남전 특수를 통해 일취월장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1972 일본과 중국이 외교 정상화를  거다.  결과 일본 내국인들이 섹스 관광을  곳을 잃어버린 거였다. 그리고  대체재로 등장한  한국이었다.

 

1971 9만명 수준이었던 일본 관광객은 1972 21 , 1973년에는 47  수준으로 가파르게 상승했고, 70년대가 끝나가는 1979년이 되면 65  수준이 된다.

 

11.png

 

(한국에 입국한 일본 관광객이  매춘을 위해 입국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의 85% 아내나 애인 없이 홀로  남자 관광객들이었다. 실제로 일본 여행사에서는 ‘한국 기생 파티 관광단 모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관광객을 모집했다.)

 

일본 관광객의 목적이 성매매 있었다는  한국 정부 쪽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  하다.”

 

1973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이 도쿄에 가서 했던 말이다. 같은  리영희 선생도 기고문을 통해 이를 인정했다.

 

 나라가 해마다 수십, 수백만 명의 외국인을 끌어들이려는 목표로 관광 한국을 자랑하는 동안, 말하기는 다소 쑥스러운 일이지만 일본인에 의한 밤의 수요가 느는 바람에 농촌 소녀는 서울 외곽으로 몰려들고, 외곽의 여성은 중심가로, 중앙 지대의 여성은 호텔로 모인다는 호텔 사람들의 설명이다.”

 

<여성동아> 1973 7 호에 실린 글이다. 실제로 1973 한국을 방문한 전체 관광객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70% 달했다. 오늘날 중국 관광객들이 한국을 찾는 것과 비교할 만하다(원조 ‘한류라고 해야 할까?).

 

restmb_allidxmake.jpeg

 

외화획득에 목숨을 걸었던 박정희 정권에게 관광산업은 정권 초기부터 중점적으로 육성하려 했던 산업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는 제대로 된 관광 자원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있는  뭘까?

 

겉으로 성매매를 규제하는 나라였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명백히 성매매 권장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일본인들에게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의 존재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의 숙박업소(최소한 호텔급)에서 체류했다. 성매매를 하기 위해 호텔을 들락거리는 여성들을 단속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당장 호텔 출입을 막기만 하더라도 이들의 움직임을 차단할  있고,    나아가 이들을 체포하거나 성을 매수한 일본인들도 구속하거나 추방할  있었다.  떠나서  시기 한국은 ‘통금 있었다.

 

 12시가 되면 허가받지 않은 이들은 야간통행을   없었다(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를 시켰다.  이전 이승만 정부나 미군정 시기에는  10, 8시부터 통금이었다). 성매매 여성들은 통금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막지 않았다. 아니, 적극적으로 이들을 비호했다. 관광사업 진흥법에 근거해 ‘국제관광협회 만들었고(국제관광협회는 오늘날의 한국관광협회로 이름을 바꿨다), 국제관광협회는 협회 내에 ‘요정과라는  만들어 적극적으로 기생관광에 관한 실무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당장 문제가 됐던  ‘접대여성들의 신분 문제와 통금문제였다. 접대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윤락행위등방지법 위반 대상이었다. 게다가 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시간대에는 ‘통금 걸려 있었다. 정부는 외화획득이란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에게 ‘접객원 증명서 발부했는데,  증명서는  자체로 국가를 위해 몸을 파는 애국자의 증명이었다. , 윤락행위등방지법에서 벗어나 몸을 팔아도 된다는 허가증이  줬다. 아울러 이들이 호텔을 드나들  있는 패스포트가 됐으며, 통금 시간에도 움직일  있는 ‘마패  줬다.

 

 

1321926229_7000816981_20111128.jpeg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