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이저 속의 마이너리거
2. 종합직과 일반직 그리고 화초에서 잡초로
3. 직장의 일그러진 엘리트들
4. 크게 나쁜 일은 혼자서 못한다, 크게 좋은 일처럼
5. 상처뿐인 승리
6. 리더의 자세와 사내 불륜이 미치는 영향
1.
어떤 일이든,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려면 일단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섣불리 입을 뗐다가는 "너나 잘하세요" 같은 소리 듣기 십상이다. 꼬마들도 아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절대로 저보다 못한 애들 말을 듣지 않는다. 줘 터지는 한이 있어도 저보다 나은 애들하고 놀려고 기를 쓴다. 그러니 우리는 알고 있다. 배울 게 없는 사람과 노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 없다는 걸.
조직에서도 그렇다. 남을 가르치려면, 그에 합당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아니, 자격이라기 보다 뭐가 됐든 남보다 나은 게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자리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아, 잠깐은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왕도 거지도 잠깐은 누구나 하니까.
2.
여태 조직생활을 하며 수많은 리더들을 봐 왔고, 이들을 통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건 바로, 실체가 없는 존재를 사람들이 귀신같이 알아본다는 거다. 제대로 된 실력 없이 자리를 꿰차고 오른 사람들 근처에는 사람들이 알아서 꼬이지 않는다. 그 사람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잠깐은 놀아줄 순 있겠다. 친구도 잠깐은 할 수 있으니까.
조직 내에 있는 이런 나쁜 리더들의 특징은 비슷하다. 그들은 제대로 함께 일해 본 적이 없기에, 실무를 모른다. 실무를 모르다 보니 의사결정 해야 할 자리에서 어쩔 줄 모르고, 일을 뭉개거나 밀어부치기만 한다. 일이 이렇게 되면 실무 회의 때 실무자들은 그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남의 말을 끝까지 듣는 법이 없다. 성질부터 내기 일쑤다. 그러고는 아랫사람을 감정적으로 괴롭힌다. 태도가 어쩌니 자세가 어쩌니 하며 말이다.
그래, 좋다. 어차피 남의 돈 버는 거, 치사한 거니까, 하며 그럭저럭 참아본다. 중요한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다. 이들은 꼭 한바탕 화를 낸 후, 함께 술을 한 잔 마시러 가자 한다. 이쯤 되면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뛰고 싶다.
낮에 시달린 것만으로도 충분해, 집으로 곧장 달려가 그냥 누워 있고 싶은데, 술을 마시자? 안 가면 삐진다. 억지로 자리에 가 앉으면 또 눈치 없이 술잔에 술을 꽉꽉 채워주며, 낮에 있었던 일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하고는 여태 자기가 어떻게 이 조직에 헌신해 왔는지 일장 연설한다. 밤 늦도록 말이다. 이런 일을 한 두 번 겪고 나면 다음 회의에서, 그가 봄 다음 계절은 겨울이라 해도 적극적으로 뜯어말리지 않고 침묵한다. 그러면 회의는 리더의 마음에 흡족한 채로 끝나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프로젝트의 운명은, 상상대로 되고 마는 거다.
여기까지도 양보하라면 하겠다. 이런 사람 부서에 한 두 명 있는 거, 그가 팀장이든 본부장이든 상관없다. 나머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런 사람에게 정보를 덜 주고 걸러내며 일하면 되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중간에 줄을 잘 서서 자꾸만 높은 데로 올라가는 데 있다. 그러면 크게 일을 망칠 기회가 생긴다.
일이 이 지경이 되면, 그때부터 조직의 운명은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날들이 시작된다. 겉에서 보기에 잎이 푸르면, 시커멓게 썩은 뿌리를 찾아낼 도리가 없다. 그러니 아무리 감사를 하고 윤리경영관련 캠페인을 해도 문제의 근원을 찾기 어렵다.
그러다 기어이 나무가 썩고, 여름 장마가 지나 나무가 쓰러지면 일을 이렇게 망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나서서 날씨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한다. 그러고 그들은 다시 다른 전답(계열사)에 가 자리를 잡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3.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는 위의 얘기와 결이 다르지만 같은 맥락의 사례라, 말하고 싶다. 우리 옆 팀에 있던 팀장과 그 바로 밑의 과장이 사귀기 시작했다. 둘 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일은 처음에 그쪽 팀장이 자기 애인에게 3년 내리 연속으로 고과 S를 주면서 시작됐다. 정말로 그의 애인이 압도적으로 일을 잘 했을 수 있다. 하지만 팀 내 평가는 달랐다. 게다가 인사고과라는 시스템이 한 팀에서 S가 한 명 나오면 반드시 C가 한 명 나와야 한다. 그러다 보니 말이 나기 시작했다. 이상하다고. 해당 팀장이 온갖 공적조서를 꾸며 그녀에게 S를 줬기 때문이다. 쭈욱. 계속.
그 후, 어쩐 일인지 그들은 단둘이서만 지방 출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남들 눈도 신경 쓰였던지, 자신들의 알리바이용으로 업무와 상관없는 팀원을 하나씩 끼워 출장갔고, 정작 출장지에 도착하면 데리고 간 팀원은 공장에 처박아 두고 밤마다 데이트를 하러 사라졌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해당 팀원들이 이 일에 대해 외부에 말하고 다녔고, 그러면서 사내에 스캔들이 퍼지게 되었다.
처음엔 설마했다. 아직도 남녀가 함께 출장을 간다고 저런 헛소리를 하다니! 하지만 이 일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내겐 이때부터 말 못 할 고민이 생겼다. 문제의 팀장과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뭐나 된다고 이들에게 충고를 한단 말인가. 상황에 대해 말해 주는 게 도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에게 밥을 먹자고 한 뒤, 용기내어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내에 이런 이런 얘기가 돌아요. 저는 솔직히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관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급적 두 분이서 출장 가는 건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공장 근처에서 두 분이 저녁에 밥 먹는 걸 봐도,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 하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팀장은 내 얘기를 잠자코 듣더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참 사람들 할 일 없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남 얘기나 하고 다니는구나" 하고는 숟가락을 놓았다.
4.
이후, 그들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일단 데이트 무대도 국내에서 해외로 옮긴 후,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당시 그들은 회사에서 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기에 그 팀장이 해외출장을 가야 하는 당위성을 만들어 위에 보고하면, 윗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그들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쯤에서 궁금할 거다. 출장을 승인해 주는 사람들이 바보냐고. 아니, 내가 보니 작정하고 속이면 별 수 없다. 부하직원의 은밀한 속 사정까지 알고 있는 임원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같은 팀 사람들이, 그들의 불륜이 사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알렸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분들이 있을 텐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팀원들은 당시 몹시 괴로워했다. 백 번 양보해서 조직 생활과 별개로 둘 다 가정이 있는 사람들인데 누구라도 섣불리 말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이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망했다. 차라리 여기까지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팀 프로젝트가 잘 안 된 이유에 대해 당시 참여했던 팀원 탓을 했다. 애초에 일을 열심히 하려는 의지도 잘 할 능력도 없었기에 그 프로젝트가 망했다고, 그런 애들하고는 천하의 스티브 잡스라도 뭘 못해 볼 거라 말하고 다녔고 그런 소리를 듣게 된 주임, 대리들은 이 사람들의 혹평에 사내에서 '같이 일하면 안 되는 애들' 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유연성이 있고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조직은 모르겠지만 관료주의에 물든 큰 조직에선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과 직접 소통하기 힘들다. 그러니 중간 관리자가 말하는대로 평가할 수 밖에. 능력있는 녀석들은 어떻게든 헤쳐나온다고? 물론, 정말로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대기업이란 조직 속에서 20년 째 있는 내 입장에선, 한 번 낙인이 찍히면 그 낙인을 지우기는 정말 힘들다 말하고 싶다.
결국, 그 팀의 팀원들은 한 곳에서 커리어를 지속적으로 쌓으며 일을 배우지 못하고, 여러 부서를 전전하며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도덕적으로 무결한 성인군자랑 일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 역시 모른다. 지금도 타인의 시선에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고, 먼 훗날 이 조직 안에서 어떤 식으로 어떻게 망가지게 될지.
다만 사생활, 특히 불륜이란 요소가 사내에 섞이기 시작하면, 특히 리더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러기 시작하면, 의도야 어쨌든 피해자가 생길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사실만큼은 말하고 싶다.
당사자에겐 사랑 때문에 힘든 날이 오는 정도겠지만, 직원들은 그 사랑 때문에 생계가 무너질지 모른다.
계속
필자 주
http://www.podbbang.com/ch/1770326
안녕하세요. 산만언니입니다.
저는 오랜세월 불행에 대해 남 다르게 고민했고, 우연히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말로 할 수 있는 걸 글로 다 하지 못해 <삼풍 생존자가 말합니다>라는 지난 연재글의 연장 선상에서 팟캐스트를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독특한 캐릭터성을 가진 친구들을 섭외해 녹음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패널들 모두 평범한 직장인이다보니, 내용에 대한 전문성도 떨어지고,또 제 밝은(?) 목소리 탓에 더러 '제 본의'를 오해 받곤 하지만, 나름 이를통해 성장하고 싶고, 전에 제가 글을 올리며 독자분들께 받았던 진심어린 위로와 감동에 보답하고자 기획한 팟캐스트니까,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들어봐 주세요. 나름의 컨텐츠들이 전부 감동과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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