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0주기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만 하자. 그때 노제를 보도한 기사인가 영상에, 다들 추모의 글만 올린 건 아니었다. 누군가가 아주 심하게 고인을 욕보이는 댓글을 달아놓았다. 순간 너무 화가 치밀어서, 반성하지 않으면 10년 동안 될 일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그 사람을 저주하는 글을 달았다. 주먹다짐 했던 분들도 많이 있을텐데 이 정도야 귀여운 수준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단지 나는 너무 진심이었고 그자가 망하길 온몸으로 바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런 상태였다.
그것이 진짜 저주라고 말하는 까닭은 내가 그렇게 믿어서이기도 하고, 그 순간의 느낌이 이전의 어떤 기도나 기복보다도 순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바로 그 다음에 ‘나 역시 10년 동안 될 일이 없겠구나’라는 깨달음이 퍼뜩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후회되거나 취소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치도 들지 않았다. 단지 이후 나의 10년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선동과 광풍에 휩쓸리기를 지독히 싫어하는 습성 탓에, 나는 인기몰이든 추모든 그 물결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래도 방관자에겐 방관자다운 짐이 따로 있을 것이다. 나에겐 그 저주가 그랬다. 내가 그 후 보낸 10년은 ‘될 일 하나 없었던’ 그런 세월만은 아니겠지만, 또한 얼마든지 그렇게도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단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낙인찍고, 지우기를 마다하고 지내온 시간일 뿐이다.
개인적인 이 ‘저주’의 경험은 아마 일반적으로는 ‘증오’라고 표현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증오에서 이제 해방되셨는가. 아니면 아직도 진행중이신가.
2009년의 중국 – 요원한 민주주의
당시에도 나는 중국 반응을 조사해 기사를 썼고, 10년 만에 같은 의뢰를 받았다. 당시 기사는 딴지 서버의 풍파를 뚫고 지금도 남아 있지만 일부를 여기에 인용해본다. (2009년 기사 원문 – 중국 언론에 비친 노무현 [링크])
필자가 일 때문에 중국 회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평소 연락을 주고 받던 담당자는 필자가 온 것을 보곤 이내 녹차 한 잔을 내왔다. 그러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야아, 너네 대단하던데? 이거 알아?”
그러면서 치익 칙 소리를 내며 모뎀을 켜곤 모니터의 화면을 내게 보여주었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탄핵소추 가결안이 통과된 것이다. 필자가 중국행 비행기를 타기 바로 전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순간 굉장히 쪽팔렸다. 찬반을 떠나 이런 일을 외국 사람과 마주한다는 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최대한 표정 감춰가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중국 담배 한 대를 권하면서(mild & smooth라고 담뱃갑에 써 있었지만 타르 함량이 14mg…) 담당자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뭐 어떻게 된 일이야? 노무현이 무슨 사건이라도 저질렀나?”
“그것보다는… 노무현 싫어하는 반대당 국회의원 수가 훨씬 많으니까… 거의 독자적으로 일을 벌인 거지.”
“실제로 탄핵되고 하야하거나 하진 않고?”
“그럴 가능성은 적어. 노무현 반대자들도 탄핵까지는 너무한 게 아니냐는 반응이 많거든.”
“호오… 그런데도 탄핵을? 그럼 쟤네들 어떻게 되는 거냐?”
“응? 어떻게 되느냐니?”
“탄핵 찬성한 국회의원들 말이야. 가만 두지는 않을 거 아냐? 총살 아니면 감방?”
낯빛을 보니 농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아니… 무슨 일을 당하진 않아. 국회의원 임기에는 지장이 없을 거야.”
이번엔 그쪽에서 내 낯빛을 보며 농담하는 건지를 살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음? 감방도 안 가고 의원직도 그냥 내버려둔다고? 니 추측 아냐?”
“뭐 그건 나 아니라도 누구나 그렇게 볼걸.”
그는 하아 하며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단하군. 한국 정치는 진짜 대단해. 자기를 탄핵하겠다는 놈들을 그냥 놔두다니. 중국에서라면 어림 없지. 저런 건 다 총살이야. 최소한 숙청이지. 다시는 베이징에 발도 들이지 못한다고.”
그러면서 그는 중국 정치 얘기를 한동안 늘어놓았다.
“중국 입장에선 아주 부러운 일이야. 너네는 모르겠지. 난감하고 쪽팔리다고? 그건 이해하겠어. 하지만 중국에선 저런 기회 자체를 가져볼 수가 없어. 사람이 많아서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우리는 직접 선거로 지도자를 뽑아본 적이 없거든. 전부 중앙 정부의 안배에 따라 조직되지. 전인대(全人大)위원도, 지방 정부 관리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한국처럼 탄핵 같은 일은 생길래야 생길 수도 없고, 그런 조짐이 있다면 즉시 숙청된다고.”
“그거야 나라 사정에 따라 다른 면도 있는 거잖아? 말한대로 중국에서 직접 선거를 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면도 있긴 해. 하지만 그게 ‘중앙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정치를 합리화시킬 순 없고, 무엇보다 우리도 저렇게 해보고 싶은데 기회 자체가 주어질 수 없다는 게 씁쓸한 거지. 정치 비판을 해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사회… 아직 중국에선 그래본 적이 없단 말이야.”
당시 중국 언론에서는 그 죽음이 억울한 일이었는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었다. 공권력의 판단을 거스르지 않는 중국 언론의 특성상 한국 검찰의 브리핑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의문이 있다 한들 외국에서 당시의 첨예한 사안을 심층적으로 파고들 힘도 이유도 없었다.
중국에서 가장 관심있었던 사항은 ‘전임자조차 사법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 노태우의 경우는 단죄의 명분이 쿠데타와 학살이었기 때문에 그럴만도 했다. 그러나 2009년의 사안은 뇌물 수수였다. 그것도 중국인의 입장에선 ‘경찰서장 뇌물보다도 적을’ 액수를 놓고서 그랬다는 게 흥미거리였다. 이는 한국이 가진 민주정치와 사법 시스템이 중국에 비해 매우 엄격하다는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중국에서는 사소하거나 묵살되는 사안이 당사자의 자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수치심을 아는 사람’으로 귀결되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왜곡이며 가혹한 평가다. 위의 일화를 먼저 소개한 이유는 그래서였다. 노무현의 업적은 민주적인 사회가 어떤 것인가를 경험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고, 이를 경험하지 못한 중국인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는 쉽지 않다. 사실 우리가 이 의미를 체감하게 된 것도 이후의 10년 덕이 컸지만.
2019년의 중국 – 여전히, 혹은 더욱 요원한 민주주의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에서 노무현은 어떤 의미일까.
10년 전에 비해, 지금은 중국 반응을 소개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다양한 매체가 생기고 접근성이 더 좋아졌으며, 댓글도 많이들 달고 있지만, ‘우리와 다른 객관적 시각’을 소개한다는 면에서 중국 매체는 퇴행했고 가치가 떨어졌다. 오로지 정부 방침에 부합하는 시각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블로그, 댓글 같은 영역도 같이 퇴보의 길을 걸었다. 예전에는 꽤 품위있는 장문의 댓글이 많은 편이었다(위에 링크된 이전 기사에서도 번역해놓은 글이 하나 있다). 기사나 인터뷰와 달리 신뢰성은 좀 떨어지더라도 일반인의 느낌과 시각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작부터 욕설과 조롱이다. 그게 아니면 일방적인 추종,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범벅된 국뽕의 향연이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고 하고, 우리부터도 그꼴이니 지적할 자격이 없지만서도, 중국에 우리와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탄압이고, 비민주성이다. 욕설이든 찬양이든 중국 댓글에 천안문이 언급되는 경우는 전무하다. 10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좀 더 심해졌다. 예컨대 ‘곰돌이 푸’를 중국에서 ‘维尼’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에 어떤 성씨를 결합해 웹 상에 게시하거나 검색한다면 큰일난다. 외국인이라도 관련 정보가 중국 당국의 리스트에 오르고 백도어를 통해 감시대상이 될 수 있으니 장난으로라도 해선 안된다. 중국인들의 경우엔 더욱 심하다. 중국 당국의 노선과 지침에 반하는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리바바 회장인 마윈이나 배우 판빙빙 등등 수많은 사례 근거가 있다.
그러니 언론 기사나 칼럼을 통하기보다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찾아보는 편이 나을 터다.
더우반(豆瓣)은 책, 음악, 영화 등 문화 작품들의 소개와 평점, 네티즌 평론을 다루는 사이트다. 딱히 국적을 가리지도 않는다. 위에서 보듯 <변호인>은 9.2의 높은 평점을 받고 있는데, 정확할는지 모르나 한국영화 평점순위로는 2위로 검색된다(1위는 <도가니>). 이 사이트에서는 평론(장문) / 소감(단문) 식으로 글을 남길 수 있고, 언제부턴가 ‘화젯거리’ 기능도 생겨 작품과 연관된 화제를 던지고 댓글로 토론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앞서 중국 기사의 댓글 수준이 퇴행했다고 지적했는데, 이 사이트는 그렇지 않다. 옹호든 비판이든 최소한의 합리성을 가지며, 일반적인 논의 수준 자체가 상당히 높다. 중국 신작 영화에 대한 언론 반응은 호평 일색이라 가치가 떨어지지만, 더우반에선 충분히 수긍할 정도의 품질 좋은 반응을 찾기 쉽다.
따라서 <변호인>을 구해볼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실제 모델이 누군지는 상식이고, 디테일한 배경지식까지 알고 있다. 총 7만4천 여 소감문 중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소감문들은 이런 거다. (별 5개가 10점 만점)
별 5 / 한국의 전(前) 대통령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한국 영화관에 앉아 정의가 무엇이고 민주와 자유가 무엇인지 한국인의 호소를 들었다. 언젠가 중국에서 이처럼 정치인을 마음껏 논할 수 있는 영화가 상영된다면, 그러면 민주주의가 온 것이리라.
별 5 / 현실을 바꾼 영화. 부산지방법원은 2014년 2월 13일 ‘부림사건’ 제2심 판결을 진행해 5명의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 판결로부터 33년만의 일이다. “국민이 못산다고 법의 보호도 민주주의도 못 누린다는 건 동의할 수 없다.” –송우석
별 5 / 만약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나는 기립박수를 쳤겠으나, 살아 생전에 중국 영화관에서 이런 영화를 볼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자기비하로부터 광분까지 이르는 심리상태로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이웃나라를 업신여길 때… 우리가 그 모든 어둠과 죄악의 인습을 당연하게만 받아들일 때… 우리가 그 행위의 동조자가 될 때… 우리는 눈감고 보지 못한 척 했지만, 사실 이미 30년은 뒤떨어져 있었던 것이고, 그 차이는 더욱 커져갔던 것이다…
별 5 / 한 편의 영화가, 보고 난 후, 사람들에게 사고의 공간과 시간을 더욱 확장시킨다면, 영화의 영향력은 더욱 크고 가치가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은 더욱 깊고 넓어지는 것이다. <변호인>이라… 내 생각엔 말이지, 내 머리가 백발이 되었을 때라도, 발딛고 있는 이 땅이 변했든 아니든 간에 송우석이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했던 그 이유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나의 아이들, 그리고 그대의 아이들이, 이런 황당한 시대에 살게 하고 싶지 않구나.
<변호인>에 별1 (2점) 이하의 낮은 평점을 준 사람은 전체의 0.1%밖에 안되지만, 굳이 ‘인위적 밸런스’를 위해 소개하자면 ‘주인공의 변화가 갑작스럽다’ ‘구성이 느슨하다’ ‘선동적이다’는 반응이 있었다.
중국인에게 현실의 노무현은, 그리 상징적인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반정부인사로 오랫동안 보도됐던 김대중을 더 많이 기억할 것이다. ‘지식in’ 비슷한 사이트에서 ‘왜 노무현이 존경을 받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도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물의 전형’이란 식이다. 그보다 더 많은 연관단어는 ‘자살’처럼 자극적인 어휘다. 일반적으로는 그 정도의 인식을 찾기 어렵다. 어쨌든 외국이니.
정작 우리가 알고 있는 노무현의 의미는 <변호인>을 통해 더 제대로 부각된다. 결국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되묻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와 중국에서 노무현이 상징하는 궁극적 의미다. 우리는 그 후의 현실을 통해 비합리와 비민주성으로 다시 회귀할 수 없음을 체감했다. 하지만 중국인은 그렇게 추억할 노스탤지어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을, 그리고 미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런 성찰을 북돋을 자국 작품이 나올 수 없다는 현실을 포함해서.
이런 내용은 자칫 ‘국뽕’으로 흐를 여지도 있다. 우리의 정치 현실은 여전히 문제가 많지만, 일본 정치의 후진성이나 중국의 탄압에 비교하면 느낌이 전혀 달라진다. 게다가 다른 나라를 더 찾아보면, 일본과 중국은 괜찮은 축에 속한다. 이렇게 한국의 위상에 어깨가 으쓱해지다 보면, 노무현은 한국을 빛낸 인물 중 하나로 바뀐다. 누군가에겐 BTS처럼, 누군가에겐 이재용처럼. 묘한 왜곡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의 반응은 초심을 돌아보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10년 동안 노무현은 추앙되기만 했던 게 아니다. 한편으론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도 되어 왔고, 참으로 끈질기게 이어지고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둘을 비교해 누가 더 낫다거나, 계승인가 극복인가를 생각하게도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이미지와 해석과 재평가가 그 위에 덧씌워졌고, 의견이 자유로운 민주사회에서 그건 당연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10년 전 우리가 그를 잃어버렸을 때의 초심은 무엇에 대한 상실감이었을까. 방관자처럼 있었던 나는 무엇 때문에 악플러에게 그토록 격분하고도 후회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10주기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현실을 개탄하는 중국인들의 소감에서, 나는 그 단순한 초심을 읽는다. 그는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그의 죽음은 현실로 이루어진 민주 사회의 상실을 뜻했다. 찾아보자면 노무현 정부의 행실에서 수많은 오류와 한계를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뜻했고 우리가 부여한 의미는 그 방향성에 있었다. 중국인들의 개탄은 그 방향성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현실에서 중국이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고 더 고도성장을 한들, 반대로 경제침체에 빠진들 여전히 민주와 자유를 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노무현이 한국 사회에 가져온 변화가 무엇이었는지, 10주기를 맞아 그를 여전히 기리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반추할 수 있다.
나는 그 덕에 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덕에 민주주의 사회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변호인>의 장문 평론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이 마지막 문장은 이후 다른 글에서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각색한 것으로, 송우석의 모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당시의 역사에 대해 나 역시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정의와 신념을 위해 끝까지 싸운 이런 사람을 두고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가니>에서 자주 인용되는 그 말처럼 말이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이 한 마디만 하고 싶다;
그들에겐 나라를 바꾸는 영화가 있고, 우리에겐 영화를 바꾸는 나라가 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을 그들은 갈망한다. 노무현은 바로 그 자리에 있다.
P.S.
<변호인>은 2013년 말 개봉한 영화다. 위의 소감이나 평론은 거의 2014년에 작성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의 관점도 뭔가 변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전엔 없었던 ‘화젯거리’ 기능이 더우반 사이트에 새로 추가되면서, 이 오래된(?) 영화에도 토론거리를 던져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봤자 총 3개다. 그 중 하나는 8개월 전 것인데,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주제 : <변호인>은 어떤 사회 문제를 반영하는가?
댓글 : 답변하려는 사람이 없다, 이게 바로 우리의 사회 문제다. (반복) 140자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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