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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정책을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보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벌써 10년이 됩니다(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러 태평로에 나간 기억이 생생하네요). 딴지일보 편집부의 악덕이 가득한 청탁 탓에(편집부는 국제관계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 ... 아, 참고로 저는 한국인이 아니라서요)이것 저것 여러 글을 적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공정거래법으로 제법 밥을 먹고 사는 입장이다보니 오늘은 그 얘기를 하려 합니다.

 

서거 10주기를 맞이하며 생각나는 대목은 사람마다 다양하겠지만 필자에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참여정부의 확고한 경제개혁 의지이기 때문이지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런 디테일한 정책들에서 저는 그의 생각을 가장 잘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1. 노무현 대통령의 4.2 시정연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한 지 두 달도 채 안 된 4월 2일에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했지요. 국정 전반에 걸쳐 여러 대목이 나오는 가운데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이라는 큰 틀 안에서 공정거래법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합니다. 

 

"지배구조의 개선도 필요합니다. 지금과 같은 불합리한 지배구조로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어렵습니다. 비효율적인 투자를 유발하고 종국에는 경제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사외이사제도'의 내실화를 기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공정한 거래관행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시장지배력이 남용되거나 약자와 이해관계자의 권익이 부당하게 침해되어서는 안됩니다. '부당내부거래'를 지속적으로 시정해 나가겠습니다." - (제238회 임시국회 국정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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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리고 어떻게 보면 아직도) 한국 기업사회가 안고 있던 공정거래법상 핵심 문제가 깔끔하게 적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책 기조는 같은 해 10월에 마련된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에서 좀 더 구체화된 정책 플랜으로 나타나게 됐고 실무상 주도적 역할을 맡은 게 바로 공정거래위원회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비관료 출신이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창립 멤버였던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을 임명한 점은 참여정부의 개혁의지가 진지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지요.

 

(강철규 위원장의 뒤를 이은 권오승 위원장 역시 비공무원 출신이었죠. 바람을 타서 들려오는 소문으론, 권오승 위원장은 당시 내 생각대로 공정거래정책을 펼치게 해 준다 - 이리저리 참견하지 않는다 - 면 임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답니다. 해서 권오승 위원장 시대의 공정거래법 운영은 그다지 개혁적이진 않습니다. 물론 권 위원장이 공정위원장으로서 미흡했다는 뜻이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의지를 덜 체현했다는 의미입니다. 권오승 위원장도 나름 흥미로운 법 운용을 보였지요. 단, 이 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노선을 더 뚜렷이, 구체적으로 정책에 반영시킨 강철규 위원장 시대만 언급하도록 할게요)

 

 

 

2. 노무현 대통령의 시장개혁을 구체화한 '로드맵'

 

기업간에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면 소비자는 질이 좋은 상품・서비스를 합리적 가격으로 누릴 수 있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경제적 효율성 제고가 기대된다는 게 교과서에 나와 있는 설명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게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로드맵이 지적한 바에 의하면 참여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는 ①기업내부 견제 시스템(제도 및 운영), ②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 ③외부 견제 시스템의 실제 작동수준이었습니다.

 

기업 내부의 운용체제나 돈의 흐름, 기업집단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거래 상황 등이 불투명하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검증을 안 받고 있으면 실체가 어떤지 무관하게 어떤 부실이나 부정이 숨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사고, 기업에 대한 평가를 부당하게 낮출 수가 있지요.

 

이와 더불어 극히 낮은 지분율밖에 보유하지 못한 일가가 기업집단 전체를 지배하며 툭하면 사익편취를 위한 꼼수로 이용되는 구조는 기업 입장에서는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하고, 기업이나 기업집단에 대한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윈인이기도 하지요. 한국 대기업들이 실력보다 낮게 평가되는 경향, 소위 말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된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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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실 인식 아래, 참여정부 공정위가 로드맵에서 정책의 축으로 삼은 대목은 3가지였습니다. 우선 기업집단 소유∙지배구조 개선, 두 번째로 투명 책임 경영의 강화, 그리고 시장경쟁 제고입니다. 허나 목표 세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강철규 위원장은 처음에 임기 3년을 다 채운 위원장인 만큼 평가도 괜찮았지요. 퇴임 당시 보도를 살펴보면 부정적 평가가 없지는 않지만 긍정 평가가 대세였습니다. 밀가루, 통신, 시멘트 등 업계에서 관례가 되던 담합(카르텔) 적발이라든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의한 메신저 끼워팔기 사건 적발 등. 

 

그런데 참여정부 강철규 위원장 시절에 이루어진 성과로 거론되는 대목은 크게 보도가 되면서도 언듯 이해가 안 가는 내용도 있어요. 간접적인 방식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의지를 짙게 반영한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시절, 공정거래법 개정 내용이자 일반 보도를 통해서는 와닿기 어려운 내용을 아주 간략하게 되돌아봄으로써 고인에 대한 추모의 뜻을 담으려고 합니다.

 

 

 

3. 출자총액제한제도 개정과 남북융화까지 계산한 정책

 

출자총액제한제도(줄여서 출총제로 불러지지요)는 현행 공정거래법에는 없는 규제이지만 재벌 일가에 의한 과도한 그룹 확장이나 사익편취를 막는 효과가 기대되었어요(현행 공정거래법을 보면 제10조가 '삭제'로 표시되어 있지요. 그게 바로 출총제 관련 규정이었습니다). 대략 어떤 규제냐 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대규모 기업집단 S가 그룹 확장을 꾀하며 계열회사인 a사가 새로 b사를 설립하거나 c사를 인수합병한다고 칩시다(b, c 둘 다 국내회사). 이때 a사의 출자총액이 일정한 수준을 넘으면 b사 설립이나 c사 인수합병이 금지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출자총액제한 기준이 순자산의 40%이고 a사의 순자산이 1조원일 경우 a사는 4,000억원을 넘는 금액을 다른 국내회사에 출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a사가 b사를 설립하면서 3,000억원을 투자했다면, c사에 대한 투자는 1,000억원으로 제한되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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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을 좀 더 들여다봅시다

 

 

그런데 이 출총제에는 기준을 넘어도 다른 국내회사에 출자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이 몇 개 있었어요. 참여정부 공정위는 그 예외규정을 보완했습니다.

 

우선 회사의 투명한 의사결정 및 경영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이사와 이사회, 주주총회 등에 관해 감시∙견제장치를 갖춘 회사가 출총제 적용을 면하게 됐지요(10조 7항 4호 신설). 그런데 출총제 적용의 예외를 신설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출총제를 완화하는 것입니다.

 

얼칫 보면 참여정부의 개혁노선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즉, 위와 같은 개정 규정을 마련하는 동시에 개정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개정 전 법에 규정되던 자산총액과 재무구조 뿐만 아니라 계열회사의 수나 소유지배구조까지 감안해 계열회사 수가 적거나 소유구조가 단순한 기업집단, 소유와 지배간 괴리가 작은 기업집단을 출총제 규제에서 제외하도록 한 것이지요(10조 1항 관련).

 

또 하나 중요한 출총제 예외 규정으로, 종전에는 지주회사에만 인정되던 예외를 자회사와 사업관련손자회사(자회사에 의해 지배받고 그 자회사와 사업내용 면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손자회사)까지 확장한 겁니다(10조 7항 2호 개정). 이 개정이 왜 중요하냐면, 예를 들어 한 기업집단 안에서 a사 → b사 → c사 → d사로 연결되는 출자가 있는 데다 d사가 a사로 출자함으로써 이른바 순환출자가 형성돼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d사의 a사에 대한 출자 관계를 끊으면 위 출자 관계는 a사를 기점으로 한 단순한 구조(a사, b사, c사가 각각 지주회사, 자회사, 손자회사인 꼴)로 바꿀 수 있지요. 이때 만약에 b사(자회사), c사(손자회사)가 출총제 규제를 받게 되면 공정위가 추진하려는 기업집단 소유∙지배구조 단순화의 걸림돌이 되는 거지요. 이 법개정은 그런 걸림돌을 떼내주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 법개정과 동시에 지주회사 체제로 유도하려는 일련의 개정이 이루어진 점을 더불어 감안하면 전체적으로는 참여정부 공정위가 기업집단에 대해 '투명성이 있고 단순한 소유지배 구조를 갖추도록 해라(그리고 웬만하면 지배구조가 심플한 지주회사 체제로 변신해라)'라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라 할 수 있어요.

 

기업집단 내 지배구조를 바꾸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정부가 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 후에도 지주회사 체제로의 그룹 재편은 잇따랐고 이제 웬만한 대규모 기업집단들은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고 지주회사 체제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흐름이고 이 흐름을 조성함에 있어서 참여정부 공정위가 한 역할은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출총제와 관련해서는 하나 더 재미있는 예외 규정이 마련되었어요. 출총제의 대상이 되는 출자 상대방은 국내회사여야 하는데(10조 1항 참조) 참여정부 공정위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의해 협력사업자로 승인된 회사로서 일정한 기준을 충족시킨 회사를 출총제가 적용되는 국내회사로 보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 개정은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융화를 지향하는 자세가 명확히 나타난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고인을 추모한다는 의미에서는 더 강조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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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융∙보험사의 의결권 행사 한도 축소

 

참여정부 공정위에 의한 법개정으로 금융∙보험회사의 의결권 행사 한도를 축소시킨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대규모기업집단 소속 금융∙보험회사는 일반 계열사(비 금융∙보험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더라도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지요(11조 1항 참조). 일단 금융회사를 통해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는 일을 막으려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규정 역시 다양한 예외 규정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일반 계열사의 임원 선임이나 해임 등 일정한 사항을 주주총회에서 의결할 때에는 그 일반 계열사의 발행주식 총수의 30%까지 금융∙보험회사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그 한도를 점차적으로 15%로 하향조정하도록 했습니다. 금융∙보험회사가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좁아지게 된 것으로 재벌 규제로서는 엄격화된 셈이지요.

 

이런 흐름 역시 참여정부 공정위의 개혁 의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대기업집단의 꼼수 오브 꼼수를 막아라 

마지막으로 대기업집단에 속하는 비상장회사가 '중요사항'을 공시하도록 한 것도 중요한 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사항에는 최대주주 및 주요주주의 주식보유현황이나 변동사항, 임원의 변동 등 회사의 소유지배구조와 관련된 것, 자산∙주식의 취득, 증여, 담보제공, 채무인수∙면제 등 회사의 재무구조에 중요한 변동을 초래하는 사항, 영업양도나 양수, 합병∙분할, 주식의 교환이나 이전 등 회사의 경영활동에 중요한 변동을 초래하는 사항 등이 포함됩니다.

 

재벌 일가가 비상장회사를 만들고 가족에게 운영시켜 놓고 일감몰아주기 등 부정한 수단을 이용해서 크게 키운 다음에 상장시키면 당초 투자한 액수를 훌쩍 넘는 거액의 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꼼수 오브 꼼수, 인류의 위대한 발명인 회사제도의 본디 취지를 왜곡하고 조롱하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참여정부 공정위는 이런 꼼수를 조금이라도 억제하기 위해 비상장회사에 관한 중요사항을 공개시켜서 회사가 재벌일가에 의한 부당한 사익편취의 수단이 되는 것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참여정부의 정책들이 모두 바람직했고 성공적이었다고는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전대통령이 꿈꾸며 실제로 이뤄내려고 했던 세상은 시장경제라는 관점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시장경제 조성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공정거래법을 연구하는 외국인인 제 입장에서, 한국이 그 씨앗을 소중히 여겨 계속 틔우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 모습이 돌아가신 '바보 대통령'을 기리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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