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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안중근의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링크)>, 프로젝트를 우선 진행하느라 <대망으로 바라본 전국시대 시리즈>가 많이 늦어졌다(기다리게 해서 미안!). 독자분들께 양해를 구하며 앞으로 동시 진행하도록 하겠다. 

 

거두절미하고, 다시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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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열보병(Line infantry)이란 말이 있다. 국내에는 라인배틀(Line Battle)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는데(좋게 말하면 신조어다, 좋게 말하면... 나쁘게 말하면? 국적 불명의 용어), 영화 <워털루>나 멜 깁슨 주연의 <패트리어트 : 늪 속의 여우>를 보면 전열보병의 전투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적군의 흰자위가 보일 때 방아쇠를 당겨라.”

 

빽빽하게 어깨를 맞댄 병사들이 2~3줄의 열을 만들고 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90미터 내외의 거리에 다가서면 서로를 향해 총을 당긴다(적군 장교끼리 신사도를 말하며, 먼저 발사하는 걸 권하기도 한다). 현대의 시선으로 보면, 치킨 게임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전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환경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식이었다.

 

2.

지난 회에 말했듯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테르시오가 나왔다면, 이 선형진은 어떻게 나온 걸까? 기병이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빽빽한 방진이 최선이 아니었던가? 우선 전장 환경이 바뀌었다. 공업 기술력의 발달로 대포가 경량화 됐고, 덤으로 정확도도 올라갔다. 대포의 집중 포격으로 방진 하나가 쓸려나가는 건 우습게 된 상황. 여기에 ‘총검’이 개발되면서(총에다가 ‘칼’을 꽂을 수 있게 됐다!) 굳이 창병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됐다. 여기에 총 자체도 성능이 향상됐다. 이전까지는 화승총(Matchlock)을 썼는데, 부싯돌로 격발하는 플리트락(Flintlock) 머스킷이 등장하게 됐다. 덕분에 분당 2~3발을 쏠 수 있게 됐다. 즉, 2~3열만 있으면 교대로 사격이 가능한 거다.

 

방진과 선형진의 차이는 엄청나다. 방진의 경우는 기병으로부터의 전투에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게 ‘압박’이 극단까지 치달은 진형이다. 이 방진으로 겨우 막던 기병을 선형진으로 가능할까? 시대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자, 문제는 이들 전열보병의 전투 방식이다. 적군의 흰자위가 보일 때까지 다가가 방아쇠를 당기는 ‘멍청한 짓’을 한 이유가 뭘까?

 

우선 이들이 산개해서 다니지 않는 이유를 먼저 말해야겠다. 간단하다. 흩어지면 죽기 때문이다. 포병의 집중포화를 피해 방진에서 벗어났지만, 만약 기병들이 돌격해 온다면? 그래서 ‘제식훈련’이 중요하게 대두된 거다. 그럼, 이들이 적 가까이 가서 일제 사격을 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정리할 수 있다. 바로 당시 머스킷 성능의 한계와 돈이다.

 

머스킷 성능의 한계를 말할 때 예를 들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바로 Buck and Ball이란 장전 방식이 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워싱턴은 머스킷의 성능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이니까(당시 일반적인 교전거리는 90미터 내외였다) 총안에 큰 탄환 하나랑 작은 탄환 여러발을 쑤셔 넣어 쏘라고 명령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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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명중률 떨어지는 거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이자.”란 생각이었다. 물론, 이건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은 병사들의 사격 실력이다. 머스킷이 아무리 성능이 떨어진다 해도, 그래도 ‘총’이다. 훈련만 제대로 시킨다면 200미터 떨어진 목표물도 명중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머스킷에 들어가는 모든 게 돈이었다. 화약 가격은 지금의 ‘총알’ 가격과는 비교가 안 되게 비쌌다. 화승 방식이든 수석식 방식이든 이 격발 기구 자체가 비쌌다(부싯돌은 30번 정도 쓰면 갈아줘야 했다). 이런 총을 두고 제대로 사격 연습을 할 수 있었던 나라는 유럽에서는 영국 정도가 다였다.

 

결정적으로 이 당시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유럽은 총력전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국민개병제와 민족주의가 결합하게 됐고, 국가는 모든 걸 다 털어 넣기 시작했다.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부는 국민을 통제하고, 징병하고, 훈련시켜 전장에 내보낼 수 있게 됐다(그 결과 국민교육과 표준어가 등장하게 된다).

 

중세 유럽의 기사계급의 몰락은 겉으로 보면 ‘화약무기’의 등장으로 기사의 기창돌격 효용성이 사라져서 그런 걸로 보이지만, 기병은 계속해서 진화했고, 화약 무기가 퍼진 이후에도 얼마간 기사는 존재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가 등장했을 때는 이 갑옷이 총알을 튕겨 내기도 했다. 즉, 얼마간은 기사의 효용성이 유지됐다는 거다. 그럼에도 기사가 몰락한 건 ‘국가’란 개념. 그러니까 중앙집권화 된 국가의 등장 때문이다. 시스템이 바뀐 거였다. 기사와 영지만으로는 이런 군대와 맞서 싸울 수 없게 된 거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땠을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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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의 ‘진’을 보면, 방진이라고 보기엔 너무 느슨하다. 장창을 든 아시가루(足軽 : 경보병)가 몰려 다녔지만, 이들은 자기들끼리 창을 들고 내리쳤다(찌르거나 휘두른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리 찍는 걸 반복했다). 조총을 든 총병이 있었지만, 이들도 밀집 대형으로 일제히 발사하는 것 대신 개별 목표물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유럽의 전열보병들이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밀집대형을 유지 한 채 화망을 구성한 것과는 달랐다).

 

일단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당시 일본에는 ‘기병돌격’의 위협으로부터 일정 부분 자유로웠다는 대목이다. 조총병들은 느슨한 형태로 열을 지었고, 그나마도 개별 목표물을 향해 쐈다. 이 대목은 일본의 독특한 논공행상에서 찾아봐야 하는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잘 나와 있듯이 이들의 전과는 전투 후에 들고 온 ‘적의 목’으로 판가름 났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이들은 개별 목표물을 조준 사격했다.

 

여기에 시스템적인 한계도 작용했다. 바로 ‘화약 가격’이다. 유럽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화약 가격은 비쌌다. 특히나 문제가 됐던 게 ‘초석’가격이다(화약의 주재료는 질산칼륨인데, 초석의 주성분이 질산칼륨이다. 흑색 화약은 질산칼륨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자연산 초석은 중국, 인도, 칠레 등에서만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고, 천하인으로 등극하고 시행했던 정책 중 눈여겨 봐야 할 것이 무역과 통상을 독점한 거였다. 사카이, 하카다, 나가사키 등의 무역항과 오사카, 후시미 등의 대도시를 직할령으로 편입시키고, 금광과 은광을 장악했다(당시 히데요시는 은이 국제 통화 화폐로 사용되는 걸 확인하고는 이를 확보하려 열을 올린다. 그리곤 금화와 은화를 주조한다).

 

이 은을 통해 후추와 백단, 중국의 비단 등을 수입했는데 이런 소비재보다 더 중요했던 게 바로 초석과 납의 수입이었다. 이 당시 초석과 납은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은을 풀어서 이를 있는 대로 다 사들였다. 조총을 쏘기 위해 히데요시는 은을 채굴해 팔았던 거였다.

 

원료를 수입하다 보니 화약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보니 화망을 구성한답시고, 총알을 낭비(?!)하는 것 보다는 조준 사격 하는 걸 선호하게 됐다. 이러다 보니 이들은 화망 대신 조준 사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기창돌격이 있었다면 일본 조총병들도 유럽 병사들처럼 빽빽이 모여서 총을 쐈겠지만, 기병의 기창돌격 같은 건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기에 이들은 상대적으로 느슨할 수 있었다. 굳이 화망을 구성할 이유도 위험을 감내할 이유도 없었다(화승총은 기본적으로 ‘불’을 다룬다. 불과 화약이 만나면 터진다. 이런 상황에서 빽빽하게 밀집대형을 짜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 플린트락 머스킷이 나왔기에 화망 구성이 용이했던 거다).

 

굉장히 신기한 건, 일본이란 나라가 천하통일을 한 상황이 상당히 애매모호했다는 거다. 앞에서 유럽의 경우를 설명했듯이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봉건제 하의 영주들이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몰락했던 것과 달리, 일본은 어정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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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의 다이묘들은 봉건영주다. 전국시대의 전투는 기사계급(사무라이)의 전투에서 서서히 중앙집권화 된 ‘총력전’형태로 바뀌어 갔다. 아시가루가 전장의 주역이 됐다. 더이상 사무라이 몇몇의 무용으로 전장의 판도가 바뀌는 상황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걸 제일 먼저 간파하고 몸으로 실천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유력 다이묘들은 재정을 확대하고, 중앙집권화를 통해 병력을 길렀다. 그리고 그 나머지 다이묘들은 숨죽인 채 어디에 붙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실제로 전국시대에 활발히 전투에 뛰어든 세력은 몇 안 된다. 싸우더라도 몇 만을 모은 대회전이 아니라 국경 근처에서의 ‘분쟁’정도다. 전쟁을 하기에는 전쟁의 사이즈가 너무 커져버렸고, 이걸 뒷받침할 재정이 없으면 망하는 거였기에 전쟁을 하고 싶어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정쩡하게 전국시대가 끝이 났다. 에도 막부가 만들어지고 나서의 모습은 상당히 기괴한 형태의 권력 구조였다. 막부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 된 모습을 보였지만, 메이지 유신 때까지 다이묘들이 존재하는... 봉건제도 아니고, 중앙집권화 된 나라도 아닌 상당히 기묘한 정부 형태를 가지게 된 거다(다이묘들이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물론, 에도막부의 힘이 다이묘를 충분히 제어할 만 했지만).

 

결국 이 다이묘들이 다 없어진 건, 메이지 유신 전후로 판적봉환(版籍奉還 : 다이묘들의 지방권력을 중앙으로 반환하라는 것)이 이뤄진 다음에야 봉건제는 비로소 사라지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