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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재운

내레이션: 김명곤

음악: 김재옥

촬영: 하성창

전체 관람가 / Color / 100분

 

밀짚모자를 쓴 노인이 자전거에 손녀를 태운 채 봉하마을 숲을 달린다. 뒤이어 보름달 아래 쥐불놀이를 하는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처음에는 두 이미지를 연결시킨 이유가 뭔지 몰랐다. 쥐불놀이를 하는 의미가 뭔지를 잊은 내 탓이다. 김명곤 배우의 친절한 내레이션이 민속놀이이기 전에 잡초를 태워 농사 망치는 해충이나 쥐를 서식할 수 없게 만드는 노력이었다고 말해 준다. 작품 시간대가 50년대로 이동하자 비로소 쥐불놀이 소년은 재연 배우였고, 어렸을 적 노무현 전 대통령을 표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쥐불놀이를 하고 도랑치고 가재 잡던 어린 시절에서 대통령 퇴임 후 모습을 연결시키며 친환경적 삶을 고민했던 행보. 대한민국 대통령 중 최초로 고향에 다시 터전을 잡은 이유. 환경 복원에 힘쓰다 어느새 농업 활동까지 매진했던 것. 작품은 이 모두가 운명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노무현을 떠올릴 때 '운명'은 비극적 정조를 형성하는 단어였다. <물의 기억>은 그 비극성을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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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 역시 꾸준히 이야기 해왔다. 송철호 울산시장이 TBS 라디오 프로그램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 국회의원 선거에 함께 출마해 보자고 얘기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송철호 시장이 100% 떨어질 거라고 만류하자 노무현은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전세계인들에게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이것밖에 안 된다고 알리는 예시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출마해서 떨어지더라도 의미가 있다는 그의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어땠을까. 민주주의에 대해 여전히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퍼포먼스가 성공적으로 완성되지 않았을까. 국회의원 출마와 더불어 농업, 환경 복원 활동은 퇴임 후의 노무현이 한국 사회에 전하고자 했던 화두같다. 정치는 실현되지 못해 안타깝지만, 환경 활동은 바람대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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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내게 여러가지 방면에서 일깨움을 준 대통령이다. 그 중 하나가 경제가 일정 궤도에 올랐을 때, 경제를 위해 손상된 환경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점이다. 하필 다음 대통령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더니 경제를 죽이고, 이 과정에서 환경도 파괴했던 이명박이라 더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삶에 있어 정치가 중요함을 본격적으로 체감하는 시기였는데 그 때를 하필 이명박, 박근혜와 보내서 안타깝다. 그런 점에서 <물의 기억>은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어 참혹한 시기를 고고하게 버텨낸 봉하마을에 대한 찬사처럼 보인다. 다른 배우가 연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멀리서 영혼처럼 등장하기도 하고, 생전의 그를 촬영한 영상도 나온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농사와 환경에 굉장히 깊게 몰두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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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김명곤 배우의 내레이션이 다소 적응하기 힘들 수 있다. 대한민국의 한 시골 마을을 찍었을 뿐인데 내레이션만 들으면 BBC의 <아름다운 지구>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물의 기억> 제작팀은 그 보기 힘들다는 벼꽃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찍었다며 자부하지만, 이 방면에 무심하거나 무지하면 벼꽃 보기가 귀한지도 잘 모른다(내 얘기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웅장하게 표현하려 하나 싶은 셈이다. 다행히 작품은 그 웅장함을 빨리 납득시킨다. 모르고 보더라도 친환경을 추구하는 봉하마을과 논밭을 포착한 영상미는 압도적이다. 작품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들어오며 순환하는 물 속에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생명들이 숨쉬며 살고 있음을 보여주다 한 번씩 드론 촬영으로 상기시킨다. 지금까지 찍었던 생명들은 모두 우리가 오고 가며 흔하게 볼 수 있는 논밭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누구보다 낮은 풍경에서 작은 미생물들의 삶과 죽음을 깊은 시선으로 찍어내고 있다.

 

<물의 기억>은 생물과 공존하는 삶이 어째서 중요한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내레이션은 과학이라기 보다 문학적이어서영상이 지닌 감흥을 배가시켜 주는 정도다. 작품은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자연 속 수많은 생명들이 활개를 쳐야, 우리가 먹거나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가장 아름답게 생명력을 뽐낼 수 있다는 점을 시각적으로 일깨워 준다. 작품에서 한 번도 언급되진 않지만, 그래서인지 이명박의 4대강이 정반대 예시로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토건부패발전의 선두주자였던 이명박 정부와 그 관계자들은 물이 살아있는지를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물 보면 기분 나쁘냐'고 물어대며 보이는 모습에만 신경썼으니 알 리가 없다. 살고 싶다면 살아있는 것을 먹어야 하고, 생명의 근원인 물은 가둬두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봉하마을이 이렇게 변화할 수 있도록 지휘한 노무현이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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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보고 기분 나쁘냐고 말하며 4대강을 옹호했던 조원철 교수는 요새 뭐하고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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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보니 <물의 기억>에서 어색한 순간은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연출을 맡은 진재운 감독이 자연 환경 쪽에 특화됐다는 말이기도 한데, 나름대로 그의 모습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넣으려 했던 시도가 엇박자 났다고 해야겠다. 작품은 애초에 노무현 인물탐구보다 그가 만든 결과물을 조망하는 쪽이며, 내레이션에서도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다. 그런데 위에서 얘기했듯 가끔 작품에서 슬그머니 뒷쪽, 원경에서 영혼처럼 등장하는 노무현의 모습이 있다. 분량도 얼마 되지 않는데, 이런 연출은 등장할 때마다 순간순간 몰입을 깨서 웃음이 나오게 만든다. 석정현 작가가 그린 2014년작, <잊지 않겠습니다>의 뻔한 반복이라고 해야할까. <물의 기억>은 한 인물을 신화화 시키려고 애쓰기보다, 죽은 화포천 살리기를 시작으로 봉하마을을 이 정도로 가꾼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접근 방식이 더 어울린다. 그게 더 임팩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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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란 인물은 스스로 신화화되기보다, 효과적인 콘텐츠가 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콘텐츠로서의 적용 범위가 한국 사회가 됐든, 아니면 진보 정치가 됐든 말이다. 그래서인지 <물의 기억>에서 노무현이 한층 애틋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허구로 만든 환영같을 볼 때가 아니라 그가 주민들과 함께 가꿔낸 봉하마을을 볼 때다. 작품은 의외의 방식으로 노무현을 다룬다. 단순히 생전 인터뷰를 짜집기하며 인물로서 그를 기억하는 '고여있는 방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치인이 오직 지지자들에 의해서 기억으로만 다뤄진다면 그건 실패했다는 얘기가 아닐까. 정치인이라면 나름의 철학이나 정책이 후대에도 영향력 있어야 할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 노무현을 다루는 영상매체들은 그런 지점을 다루는데 게으른 모습을 보여 왔다.

 

<물의 기억>은 기억으로 박제하기에는 노무현이라는, 혹은 노무현의 콘텐츠가 너무 쓸모있다고 말한다. 작품은 이를 현재에 맞춰 지속적으로 적용해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시가 친환경적으로 거듭난 봉하마을이다. 연출 부분에서 유치함이 좀 있긴 하지만 <물의 기억>은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다큐 중 <노무현입니다>와 더불어 가장 쓸 만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이런 작품을 보고 있으면 노무현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더 확고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