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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노란색, 작은 양초, 노란 리본, 혹은 '세월호'가 '좌파의 상징'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만약 내가 '세월호' 관련 문구가 새겨진 옷을 입고 노란 리본을 달고 손에 양초라도 쥐고 광화문으로 나선다면, '폭력 시위꾼'으로 몰려 직사로 쏘아대는 물대포를 맞아도 할 말 없는 대한민국.


위에 열거한 아이템들이 어딜 봐서 위협적인지, 빨갱이스러운지 알 수 없으나, ‘세월호’라는 단어만 내뱉어도 득달같이 달려드는 고만고만한 사람들도 있다. 상관없다. 난 그들의 생각도 존중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세월호'는 '좌빨'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극'이다. 어떤 사람은 '음모론'으로, 어떤 사람은 '사건'으로 기억할 것이다.


각자가 보고 싶은 대로 세월호를 보는 것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세월호’를 ‘좌파’라거나 ‘불쌍한 사람’ 정도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판단 내리는 것이 별로 반갑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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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 한 친구가 내게 '건너 건너 아는 유가족'을 이야기했었다. 세월호로 아이를 잃었지만, 그 부모는 보상금을 계산하며 행복해한다고 했다. 그래서 되물었다.



“300명이 넘는 희생자가 있고, 가족이 서너 명이라고 대충 계산해보면 유가족이 천여 명이다. 그중 몇 사람이 행복해하면 나머지 구백 명이 넘는 유가족도 행복해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물론 실제로 그 유가족이 행복해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건너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까.


이런 내 질문이 그 친구를 비난한 거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나는 비난이 아닌 '내 선택을 위한 질문'을 했을 뿐이었다. 백분율로 따져도 소숫점으로 내려가고, 사사오입하면 제로인 숫자를 들이밀며 '그러니 유가족들이 싫다'라고 말하는 정도의 친구라면 심각하게 친분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 눈으로 본다면, 유가족은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슬픔에 젖은 표정을 지으며 온몸으로 '유가족'임을 표현해야 할까. 내가 어느 날 불행한 일을 당해도 '그래도 돈을 받았으니 다행으로 알아라'라고 이야기하지 않을까. 불행을 딛고 일어서려고 할 때, 혹여 농담이라도 한다면... 그 친구는 내게 ‘그러고도 사람이냐’라고 하지 않을까.


내 질문에 친구는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에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대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물어보고 있는데, 회피기술만 늘려주고 있는 듯하다.


여하튼 '세월호'를 각자의 생각으로 덧칠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두고, 나는 내가 아는 '세월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처음 '나는 안산에 가야겠구나'라고 생각했던 1년 6개월 전, 막 알게 되었던 친구 삐삐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모두가 잊고 싶어 할 때 갈 거다."



그리고 2014년 가을 무렵, 슬슬 '세월호, 이제 지겹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웃자란 콩나물처럼 고개를 디밀고 올라오기 시작할 때, 삐삐와 안산으로 향했다.


1년 전 나와 삐삐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73년생 모임'이라는 모임에 가입되어 있었다. 몇 번인가 모임에 대해 글을 올리기도 했었지만, '죽어도 안산 이야기는 못 쓰겠다'라고 삐삐에게 이야기하곤 했었다.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비극적인 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1년 전,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슬픔에 젖은 유가족의 근황' 정도 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말을 내가 하지 않아도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내가 한마디 더 한들, 위의 '건너 건너 아는 유가족' 이야기를 하던 내 친구와 다를 게 뭐가 있었을까.


나는 1년하고도 1개월을 지난 후에야 '이제 좀 할 말이 있다'라는 생각을 했다. 각자의 기억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 '잊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조금씩 생기는 지금, '자주 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위해서.


간혹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잘못된 게 아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어느 누구도 한 가지 일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고. 그 안에 머물고 잠겨 있는 사람은 '망각'을 거부한 사람들뿐이다. 망각할 수 없는 사람들. 죽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니 조금 떨어져 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시간을 내고 있을 뿐이다. 겨우 반나절, 안산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뿐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행동에 대해 ‘착한 일’이라거나, ‘자원봉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누군가 나를 소개할 때 ‘안산에 자원봉사 가는 사람’으로 소개하기라도 하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사람들이 등산을 가거나 PC방에 가듯, 내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안산에 자원봉사 다니는 사람이 목격한 유가족 이야기’를 기대하신다면 미련 없이 백스페이스를 눌러주시기 바란다.



몇 개월 전, 한 엄마가 내게 ‘어떻게 자원봉사 다닐 생각을 했느냐’라며 ‘난 이미 널 칭찬해 줄 준비가 됐단다’ 모드로 들어섰을 때, 나는 내가 ‘왜 여길 와야만 했는지’를 설명했었다. 무려 30분 동안,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었고, 그게 내가 가야하는 길이라는 걸 알았고, 우리 엄마가 시켜서 왔다(사실 이 얘기는 매우 길다)라고 설명해야 했다.


요약하자면, 칭찬 듣자고 하는 일도 아니고 칭찬이 고파서 글을 올리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아는 한도 내의 이야기 외에는 할 수가 없다. 내가 본 것들과 겪은 것들을 내 시각에서 설명하고… 내가 느낀 느낌을 당신이 가져가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유가족, 그 중에서도 엄마들과 일주일에 하루씩 함께 있었다. 1년 동안 엄마들의 상처는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거리로 내몰렸고, 피켓을 들었고, 머리를 깎았다.


그렇게 조금씩, '엄마'라는 이름의 투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엄마들은 자식을 지키지 못한 이유로 더 많은 것을 지켜야만 한다. 광화문을 지키고, 안산 분향소를 지키고, 공방을 지키고, 아이의 영정을 지키고 있다.


나와 삐삐는 그런 '엄마'를 지키고 싶었다. 말 그대로 '엄마'라는 단어를 지키고 싶었다. 시장에서 만나는 엄마를. 수다스러운 엄마를. 잔소리하는 엄마를. 뭐 좋은 거 있음 하나라도 억척스레 더 주머니에 챙겨 넣는 엄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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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의 엄마들은 분향소 한켠에 '엄마의 이야기 공방'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간을 꾸몄다



내 직업은 3D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세월호 이전에는 그랬다.


세월호 이후에는 '아로마테라피스트'가 되었다. 이름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쉽게 말해 '천연화장품 만드는 사람'이다. 엄밀히 말해 '아로마테라피'와 '천연화장품'이 같은 건 아니지만... 그건 뭐 대충 넘어가자.


중요한 것은, 매주 금요일, 엄마들과 온갖 잡스러운 생활용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주방 세제부터 샴푸, 비누 등 각종 화장품과 생활용품을 만들어내고 서로 나누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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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러워라



'잡스러운 것'이라곤 하지만 꽤 복잡하기 때문에, 늘 시장바닥처럼 와글와글하다. 누가 뭘 더 넣었네, 덜 넣었네, 내가 더 많네, 네가 많네 하는 엄마들의 수다는 언제나 유쾌하다. 나는 ‘적당히 가져가시라’라고 통사정을 하고, 엄마들은 ‘안돼, 서명받는 친구들 나눠 줄거다’라거나 ‘피켓 드느라 못 온 엄마들 줘야된다’라며 꾸역꾸역 가방에 집어넣는다.


아마도 엄마들은 ‘천연화장품 쌤이 그만 가져가랬는데, 내가 너 줄라고 못 들은 척 했다’라고 생색내며 자신이 만든 것을 건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해 받는 사람은 ‘이 엄마가 나를 위해 약탈(?)해오셨다’라며 기뻐할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나는 겨우 일주일에 한번 가서 시장의 노점상 아줌마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뺏기는 역할’은 재료를 지원해주고 있는 복지시설 ‘우리함께’(안산 복지관 네트워크)이다. 이미 어느 정도 약탈당할 예상을 하며 준비하고 있으므로 걱정은 없으나, 이곳은 꼭 눈여겨 봐주시기 바란다. 토끼굴 같은 공간에 토끼 같은 귀염귀염한 사회복지사들이 포진하고 있는데, 언젠가 따로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활기 넘치는 복지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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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년 전 개소식 때의 우리함께. 매번 사진을 찍는다면서도 잊어버려서 페이스북에서 퍼왔다



약탈당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도, 생색은 내가 낼 수 있다. 그저 ‘이러심 안 되는데’라며 적당히 리액션을 취하면 꽤 많은 사람이 즐거움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이즈음에서, ‘공짜’라는 것에 열광하는 엄마들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매우 많은 사람이 그런 시각들을 가지려고 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는데, 나는 내 재능을 주고 ‘우리함께’는 재료를 준다. 엄마들은 그것을 만들고, 나는 ‘위안’을 얻어온다.


내가 그것을 얻어와야 당신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위안을 얻지 않겠는가. 엄마들이 뼈아픈 고통을 지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며 새로운 일을 찾는 이야기는 분명 당신에게 위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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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과 비누를 만들고 있다. 항상 넉넉히 만들어야 한다

피켓을 드느라 못 오시는 엄마들 대신 같은 반 엄마들이 챙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2014년 4월 16일의 참사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유가족들은 모두 슬퍼하고만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조금 멀어질 수 있길 바란다. 그 날의 고통을 지나 엄마들이 하고 있는 것을 보아주시기를. ‘슬픔’이라는 것을 서로 강요하며 가라앉지 말기를.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전하며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슬픔은 세월호로 시작되었지만, 대한민국의 슬픔은 세월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슬퍼만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짓지는 말자. 시간이 되는 대로 조금씩 정리해서 올려드리겠다.







 가로나


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