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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데이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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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8일, 홍콩에 사는 찬콩카이(陳同佳)는 여자친구 푼히우윙(潘曉穎)과 함께 발렌타인데이를 기념해 타이완으로 커플여행을 떠났다. 한창 좋을 연애 7개월 커플의 여행이었지만 그 여행은 비극으로 끝났다.

 

찬콩카이의 주장에 의하면 2월 17일, 귀국을 하루 앞두고 푼과 싸웠다고 한다. 싸움의 발단은 푼의 임신이었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전 남자친구였고, 푼이 그와의 섹스 비디오를 찬에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격분한 찬은 푼의 머리를 벽에 찧고는, 목을 졸랐다. 푼은 목뼈가 부러져 사망한다. 이후 그는 푼의 시신을 여행가방에 넣고 타이완 지하철 주웨이역(竹圍站) 근처 공원의 수풀에 여행가방을 버렸다(참고로 임신에 대한 부분은 찬이 변호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다. 타이완 경찰 당국은 발견한 푼의 시신을 부검했고, 임신 여부에 대해서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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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은 푼의 소지품 중 아이폰 6, 디지털 카메라, 홍콩 상하이 은행의 ATM카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타이완에 버렸다. 찬은 푼의 카드를 이용해 타이완에서 약 20000 타이완 달러를 인출, 자신의 옷을 구입했고, 홍콩으로 돌아온 후 이틀 동안 약 HK$19200를 인출했다.

 

2018년 3월 13일, 찬은 홍콩당국에 의해 살인혐의로 긴급 체포된다. 같은 날 푼의 시신이 타이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살인사건처럼 보였으나, 사건은 이후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홍콩에서 살인죄는 종신형에 해당하는 범죄였지만, 사건이 타이완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법원은 난감해한다. 한국은 속인주의를 채택, 한국인이 해외에서 벌인 범죄라해도 한국에서 처벌할 수가 있지만(그래서 니들이 대마초 허용국가에서 대마를 빨아도 한국 검찰은 니들을 처벌할수 있는거지) , 아직까지는 영미법 국가에 속하는 홍콩은 속지주의를 채택, 자국 밖에서 한 행위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범인을 범죄를 저지른 국가, 즉 타이완에 인도해 타이완에서 살인죄로 재판을 받게 해야하는데,

 

이런 젠장. 홍콩은 아직까지 타이완과 범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다.

 

결국 재판은 찬콩카이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살인죄에 대해서는 홍콩 당국의 관할권 없음으로 재판조차 열리지 못했고, 살해한 여자친구의 신용카드 등을 챙기고 돈을 인출한 협의에 절도죄, 그리고 돈세탁 방지법 위반 혐의만 적용돼 징역 29개월이 확정했다.

 

 

문제의 송환법

 

홍콩 당국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홍콩 정부는 이 사건에서 볼 수 있듯 현재 홍콩의 법률, 즉 Cap. 503이라 불리는 범법자에 대한 인도 조례(Fugitive Offenders Ordinance)의 빈틈을 메꿔야한다는 입장이다.

 

1997년 맺어진 홍콩의 송환법에선 중국(마카오와 타이완도 포함)과 부속 지역을 제외한다고 되어있다. 홍콩 행정부는 이번 사건이 타이완에서 발생했고, 찬콩카이를 타이완으로 인도하기 위해선 '중국과 그 부속 지역 제외'된 법률의 해당 문장을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법률이 개정될 경우, 중국정부의 요청 후 약간의 요식절차를 거치면 인신이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는 점이다. 물론 푼히우윙의 사례에서 보듯, 법의 허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중국의 입장에 선 언론과 홍콩 정부는 이 행위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억울한 이의 한을 풀어준다는 관점에서 봐달라며 읍소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태는 문장 하나를 넣고 빼고 정도의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1997년 이후 벌어지는 중국과 홍콩 시민 간 연이은 싸움의 산물로 바라보는 것이 보다 본질에 가깝다고 본다.

 

(실제로 2016년 입법원(국회) 질의에 해당 법률 개정의사가 있냐는 질문이 나온 적이 있다. 이때만 해도 홍콩 행정부는 1997년 법률을 고수한다고 했다. 1997년 법에서 중국을 문구까지 삽입해 배제한 건 당시로서는 중국으로의 범죄인 인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이번 시위의 배경지식으로 홍콩의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간략하게 짚어보고, 내가 보고 겪고 있는 홍콩 시위 현장의 모습을 전달해보려 한다.

 

 

홍콩,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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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8월 29일 남중국해의 한 돌섬의 소유권이 중국에서 영국으로 넘어간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험난한 바위산이 대부분인 그 섬의 이름은 홍콩. 당시만 해도 산 아래 한뼘 땅에서 반농반어를 하던 주민들과 정치적 도망자들, 그리고 해적들이 모여살던 작은 섬이었다.

 

그땐 몰랐다. 이 곳이 천혜의 항구가 들어설 부지라는 것을.

 

홍콩섬은 소유권이 영구적으로 영국으로 넘어간 할양지였다. 마땅치 않던 영토는 1860년 카우롱 반도가 다시 할양되며 좀 넓어졌고, 1898년에는 현재 홍콩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신계지역이 99년간 조차됐다.

 

1842년 영국은 홍콩섬을 접수하자마자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당시 홍콩섬의 거주인구는 360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홍콩에 있는 역사 박물관을 가면 당시의 사진기록을 볼수 있는데, 3600명도 어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척박한, 그냥 돌섬이다.

 

영국은 현재의 셩완과 센트럴 지역에 병영을 설치하고 항구를 건설, 도시의 기틀을 잡아나간다.

 

19세기, 중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홍콩이 영국으로 할양되고 10년 후인 1851년에는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여 약 13년 동안 중국 남부를 지배했는데, 이 난리로 죽은 사람만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2천만, 이후에도 끊임없이 서구열강에 의한 중국 침략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발발한다. 영국령 홍콩은 혼란의 시기 대륙에서 밀려든 사람들의 그나마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홍콩의 인구는 중국 내부의 사정에 따라 풍선처럼 부풀었다 줄었다를 반복한다.

 

이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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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시기. 일종의 도피성 쉼터에 가까웠던 홍콩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에 갇혀버리며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그건. 갇혀버린 거다. 홍콩 인구가 중국 본토 상황에 따라 풍선처럼 부풀었다 줄었다는 반복했다는 건 아무도 홍콩을 거주지로 생각하지는 않았단 의미다. 그런데 홍콩 북쪽, 중국으로 향하는 문이 닫혀버렸다. 또 몇 년 내전이 끝나면 고향을 들어가겠거니 잠시 머물러 온 사람들은 꼼짝없이 홍콩에 갇혀버렸다.

 

아래는 1960~70년대 홍콩 거주민들의 출신지에 대한 인구센서스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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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홍콩 출생자들이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1961년만해도 홍콩 출생자들은 310만 인구 중 절반에 불과했다. 사실 이 통계에서 성인만 분류하면 홍콩 출신자의 숫자는 엄청나게 떨어진다.

 

말인 즉 홍콩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토박이들의 땅이 아닌 실향민들의 땅이었단 이야기다. 그저 잠시 피난왔다 갇혀버린 땅이다. 이들의 고향은 중국이다. 한국의 실향민들이 그렇듯 늘 그립지만, 다른 체제가 버티고 있어 불안한, 오지도 가지고 못하는 고향말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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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홍콩에 거주하는 사람중 홍콩에서 태어난 인구의 비중은 60.7%, 약 445만명 가량이다. 노인 인구의 상당수, 전체 인구의 29.3%는 중국에서 태어나 홍콩에 갇혀버린 이른바 실향민들이다.

 

홍콩의 법적지위는 1997년 이전까지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홍콩 사람들은 영국이 소유한 독립영토의 시민 BDTC였다. 영국 국적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영국인은 아니었다. 1997년 중국에 이양되고 나서 홍콩인들의 법적 지위는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특별 행정구의 일원이다.

 

 "홍콩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어쩌다 와서 살게 됐는데, 딱히 영국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다."

 

 "홍콩에서 태어났지만, 딱히 영국인도 아니었고, 중국인도 아니다.”

 

라 말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홍콩이다.

 

직업상 홍콩 사람들과 만날 일이 많다. 우산혁명 이전엔 그들에게 종종 물어봤었다. 넌 홍콩인이야? 홍콩 차이니즈야? 차이니즈야?

 

넌 한국인이야라는 질문에 그런가? 라며 골똘히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홍콩인들은 하나같이 약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 외국인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라는 난감함과 대외적으로 나는 누구라고 말해야 하지? 라는 짧은 혼란이 존재한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나서는 그래도 어찌 정붙이고 잘 살아볼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시즌에는 온갖 미디어에서 대대적으로 틀어낸 국뽕으로 스스로를 차이니즈라고 여기는 홍콩인이 더 많았다.

 

2019년 서베이에 의하면 홍콩의 젊은층 중,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여기는 홍콩인은 3%에 불과하다.

 

언젠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잠시 머물려던 땅에 본의 아니게 눌러앉아 버린 할아버지와 부모 세대, 그리고 홍콩에서 태어나 어떻게든 이 곳에서 살아야 하는 젊은 층의 생각은 홍콩이라는 땅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상당히 다르다. 중요한건 두 계층 모두 자신이 딛고 생활을 이어가는 땅의 법적지위가 항상 불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콩 반환협정

 

브리티시 홍콩은 영원할 줄 알았다. 비록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에 잠시 점령당하긴 했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난 뒤 수많은 열강들이 중국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취하하고 떠나갈 때도, 영국은 남았다. 홍콩섬과 카우롱반도는 조차지가 아니라 할양지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때까지만해도 홍콩 정도를 지킬 수 있다고 봤다.

 

1998년은 현재 홍콩의 80%에 해당하는 신계지역의 99년 조차가 끝나는 시점이다. 당시 영국이 홍콩섬과 카우롱반도는 할양의 형식을 취해놓고 유독 신계만 99년 조차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분분하다.

 

초기에 영국은 시간을 벌고자 했다. 신계지역의 조차기간을 15년가량 연장하기 위해 중국당국과 협상에 나서고 했지만 공산당 정부는 일언지하에 거절. 중국으로서는 아편전쟁 이후 아직도 회수하지 못한 유일한 두 식민지의 회수야말로 21세기를 앞두고 중국의 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종의 신호라고 봤기 때문이다.

 

영국으로서는 그렇지않아도 식량부터 전기까지 모두 중국에서 사오는 판에, 현재 홍콩의 80%에 해당하는 땅을 떼어준 상태로 자그마한 카우롱 반도(카우롱 반도와 신계의 경계는 몽콕 북쪽에 있는 바운더리 로드 Boundary Road를 기준으로 한다)와 홍콩섬만 소유한 상태에서는 존립이 어렵다고 봤다. 당장 그 많은 인구의식수부터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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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홍콩 전체를 돌려받아 체면치례를 하고 싶고, 영국도 홍콩섬과 카우롱반도 만으로는 식민지 유지가 어려운 상황. 이때 덩샤오핑이 기상천외한 제안을 한다.

 

즉, 중국이 홍콩을 이양받긴 하지만, 영국이 만든 기틀을 50년간 보장하는 고도의 자치를 시행하겠다고 나선 거다.

 

이게 요즘 언론에 종종 나오는 일국양제라는 거다. 하나의 국가지만 두 개의 체제를 제한적으로나마 용인하겠다는.

 

1984년, 일국양제를 핵심으로 하는 홍콩 반환협정이 체결됐다. 홍콩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협정발표 당일, 모든 수퍼마켓의 생필품이 동이난다. 1997년 반환이 확정되었고, 앞으로 13년이나 남았지만, 불안했다.

 

 

노랑새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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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전세계는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그들이 해방시켜야할 인민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다. 중국밖의 많은 나라에서야 중국의 야만적인 만행 정도였지만, 8년후 중국의 일부가 되야하는 홍콩사람들이 천안문 학살사건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다시 생필품 사재기가 발생했고, 1989년을 기점으로 1997년까지 홍콩 사회 전역은 이민열풍에 휩싸인다(뭐 그리고 홍콩의 이씨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은 이때 나온 급매물을 모두 사들여 홍콩 제일의 재벌이 되기도 했다).

 

홍콩 시민들은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다. 능력 있는 사람이야 캐나다나 호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홍콩은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하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공원에서는 연일 중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그 사이 홍콩의 민주세력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탈출한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을 탈출시키는 이른바 노랑새 작전 Operation Yellow Bird 작전에 투입됐다.

 

베이징은 6.4의 대학살 이후, 전열을 정비하고 이른바 천안문 시위의 주모자로 알려진 21명의 반혁명 책동자들의 명단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벌였다. 이 21명은 당시 항쟁의 지도부였던 베이징 학생 자치 연맹의 간부들이었다. 당시 중국 국영방송의 화면을 보면 시시때때로 이들의 얼굴이 방영된다.

 

결과적으로 핵심주모자 21명 중 7명이 중국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그 외에 약 800명의 중국 반체제 인사들이 홍콩을 거쳐 제 3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1989년의 홍콩은 중국의 야만에 붙어있는 마지막 숨구멍 같은 역할을 했다(참고:참고로 천안문 학살 사건의 사망자, 혹은 이후 검거 열풍 속에서 비공식적으로 처형된 사람들의 숫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후일 회고담에 의하면 노랑새 작전에는 미국의 CIA와 영국의 MI6까지 개입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작전중 3명의 홍콩 활동가가 중국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타임 리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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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세기말의 상징이 되었다. 지금 40대 정도 된 분들이라면 당시 홍콩영화의 시간 집착을 기억할 것이다.

 

왕가위(광둥어:웡까와이)는 그 시대의 홍콩을 가장 잘 표현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중경삼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에 등장한 경찰 223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통조림에 집착한다. 그는 연인으로부터 일방적 이별통보를 받은 사람이다. 사실 홍콩은 영국의 일원이 되겠다 한적도, 중국의 일원이 되겠다 한적도 없다.

 

이 영화는 1994년에 개봉했다. 중국이 홍콩으로 반환되기 3년전이다.

 

앞서, 천안문 학살이 벌어지고 넉달 후 영웅본색 3가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대히트작이었던 1, 2와는 전혀 다른 전개로 인해 혹평을 받았지만, 홍콩 사람들 입장에서 영화 속 배경인 패망하기 직전의 베트남, 그리고 그곳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강한 감정이입을 불러일으켰다.

 

밀리고 밀려 베트남까지 흘러들어온 화교 가족들의 이야기다. 이제 남베트남도 망해버리면 어디로 가야하는냐는 절규는 홍콩인의 가슴을 울렸다. 참고로 홍콩은 1970년 때 꽤 많은 베트남 보트피플을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홍콩 사람들은 탈출했다. 천안문 학살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인 1990년 약 62000명의 사람들이 이민가방을 쌌다. 당시 인구의 1%가 한 해 사이 빠져나간 셈이다. 이 숫자는 1994년까지 유지되고 중국 반환 이후 잠잠해졌다. 2014년 우산혁명의 실패 이후 다시 느는 추세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가까운 타이완으로 간다. 휴. 타이완.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중국에 반환됐다.

2047년 7월 1일까지,

홍콩인에 의한 지배 항인치항(港人治港)

영국이 만들 사회 시스템 유지할 것을 약속한 일국양제(一國兩制)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적인 사회건설을 약속한 고도자치(高度自冶)

를 약속받은 채 말이다.

 

 

설명이 길었다. 다음 글에선 우산혁명과 이번 시위를 참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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