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1945 광복과 동시에 한국에는 ‘유사 군대 넘쳐났다. 순화된 표현으로,

 

사설 군사단체

 

라고 해야 할까? 자주국방과 주권확보라는 명분 아래, 군대를 표방하는 수많은 사설 군사단체가 생겨났다. ‘조선 국군 준비대라는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해방 정국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군대란 이름을 사칭했고, 일종의 유행이 됐다.  결과 1945 11월이 되면 이런 사설 군사단체는 60여개가 넘어가게 됐다.

 

아직 정부가 들어서지 않은 불안정한 상황. 게다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상태였기에 이런 사설 군사단체의 등장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군정은 용단을 내렸다.

 

공인되지 않은 사설 군사단체들은 사회 안정을 위협한다!”

 

어쩌라구요?”

 

어쩌긴  어째? 무조건 해산 !”

 

사설 군사단체의 해산과 동시에 미군정은 공인된 ‘군대 만들기 위한 예비작업에 들어갔다.

 

1946 1 15 태릉의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에서 1연대 A중대(채병덕이 중대장을 맡게 된다) 창설된다. 남조선 국방경비대의 창설이다.

 

55.jpeg

 

미군정은  도별로 1 연대씩의 병력을 배치하기로 결정하고, 서둘러 병력들을 끌어모아 훈련시키고,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1946 6월이 되면 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군대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좌익 인사들이 대거 국방경비대로 들어가면서 경찰과의 무장충돌도 많았다. 어찌어찌 해방 직후의 혼란이 잦아들 때인 1948 8 15, 조선경비대를 ‘육군으로 개칭했는데,  얼마 뒤인 1948 10 19일에 여수·순천사건이 터지게 된다.  와중에 ‘국군 조직법 만들어지고, 국방부 산하에 육군본부를 두면서 오늘날의 국군 형태가 완성된다.

 

그러나  군대는 태어나자마자 엄청난 시련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6.25 한국 전쟁이다. 전쟁 직전 한국군의  병력 수는 9 5천명 수준이었지만, 1953 7 27일이 되면 58  수준이 된다.

 

엄청난 성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한국군은 1953 7 27 이후 변화 없이 멈춰  있었다. 단세포 생물처럼 끊임없는 세포분열만 하다고 해야 할까? 2019 현재 38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야 이게 당연한 걸로 알지만, 완편 보병 사단 16개에 기계화 보병사단 5개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그리 흔치 않다.

 

(15 군단, 88 사단, 72 여단을 가진 북한이란 ‘괴물 상대해야 하므로 어쩔  없이 우리도 몸집을 키워야 했지만,   떨어져서 보면... 이건 정말 ‘괴물이다.  작은 나라에서  정도 상비군이라니...)

 

2038552861_62079725_hi0k7516.jpg

 

판이 무승부가  후 장기판 상차림을 다시 하고 67년 동안 노려보는 모습

 

6.25 끝난  한국군과 북한군은 다음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6.25 때의 전략전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차림을 하고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다. 졸을 움직이지도, 포를 궁으로 옮기지도, 차길을 열어 진격로를 확보하지도 않았다. 그저 6.25 때의 모습 그대로 병력을 배치하고, 그냥 노려만 보고 있다. 그렇다고  사이 전략전술에 대한 연구를  것도 아니다. 그저, 병력을 배치하고,  하던 대로 훈련하고 있다.

 

비약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가? 지난 60여년  한국군의 전략전술은 변하지 않았다. 이건 병력 배치만 봐도   있다.

 

휴전선 지역에 GOP 철책 사단을 고정으로 배치해 놓았다. 장기판의 졸과 같은 존재들이다. 이들은 전쟁이 터질 경우 최초로 적을 막아낸다.  철책사단 후방 10~15킬로미터 지역에 예비사단들이 배치돼 있다. 이들은 전쟁이 터지면 1 방어선을 만들어서 버틴다(흔히 말하는 메이커 사단들이다. 이들 후방으로 다시 2방어선을  동원사단들이 배치  있다.

 

장기판의 기물과 똑같은 배치다.

 

34071530_989776844532264_965156104340242432_n.jpg

 

놀라운  이들은 한국 전쟁 이후 거의 미동도 없이 주둔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부대창설이나, 고급지휘관이 월북해 부대가 통째로 해체되지 않는 한). 주둔지에서 벗어나지 않고, 거기서 , 가을에는 진지공사를 하고, 비상사태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에 대해서만 죽어라 훈련한다.  과장을 섞어 말해보겠다.

 

한국군은 6.25 이후 주둔지를 옮긴 적이 없다.”

 

주둔지를 옮긴 적이 없다는  문제가 될까?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된다. 포병들에게 물어보자. 사격제원을  외우지 않았나? 진지변환 장소도  외우지 않았나? 보병들에게 물어보자 , 가을이면 진지공사 하지 않았나?

 

간단하다. 대한민국 군대  대다수는 전쟁이 터지면, 방어를 하기로 작정하고 주둔지 주변을 손금 보듯이 꿰뚫고 있다. 이건 당연히 좋은 일이다. 그런데,  주둔지를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우리부대는 주둔지를 벗어난 기동을   적이 거의 없다. 거의 대부분 전쟁이 터지면 주둔지 근방에서 방어전투를 벌이는 교리이다. 카운터펀치라   있는 7기동군단의 경우에도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치고 올라가는 경우다.

 

장기판에 놓여진 말들이 저마다 맡은 구역을 지키고 앉아있는 거다.  무서운  이들이 외부의 증원이나 합동작전 대신 해당구역에서 죽으나 사나 버티는 걸로만 교리가  있다는 거다.

 

걸프전을 통해 증명됐고, 이후  세계 군대가 쫓아가는 방향성의 핵심은

 

기동

 

이다. 움직여야 산다. 물론, 한국군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있다.

 

북한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쩔  없다. 미군이 증원  때까지 버텨야 한다. 이게 그 동안 한국군이 취할  있는 가장 확실한 전략이었다.”

 

기동전이 좋다는  누구나  안다. 그런데, 기동전을 하려면 하다 못해 차량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차량에 유류비, 운영비까지 이걸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지금이야 살만해 졌으니까 장갑차도 사고, 탱크도 개발했지만 30  전만 해도 믿을  있는  보병의   뿐이었다. 보병들을 가지고 기동전을   없으니까 이들로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이렇게  거다.”

 

국방부를 포방부라고 놀리는데, 이것도  말이 있다. 돈만 많이 주면, 우리도 미군처럼 공군 전력 빵빵하게 채우고, CAS(근접화력지원) 돌리면 된다. 그런데 돈이 없잖은가? 가성비 가장 좋은 화력지원이 포다. 그러니 포에다 몰빵한  아닌가?”

 

기본적으로 한국 지형은 산악지형이라고 보면 된다. 기동이 제한된다. 물론, 6.25  북한군이 탱크로 밀고 내려온  사실이다.  덕분에 한국군은 한동안 탱크 트라우마에 걸린적도 있지만... 전사를 연구해 보면, 6.25 당시의 기갑전은 거의 대부분 3~4 단위. , 소대 단위의 전투였다. 대규모 회전을 벌일만한 지형이 많이 없다.  넓다 싶으면, 논밭이라 탱크가 기동하기가 어렵다. 이러다 보니 움직이는 것에  소극적이다.”

 

까놓고 말해서 탱크랑 155미리 자주포   하나 고르라면...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한국 지형에서 기동전이나 탱크 기동이 그렇게 쉬운  아니다.   트였다 싶으면 논밭 아니면 시가지다. 시가전에서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탱크는  그대로 밥이다 . 싸고, 튼튼하고, 화력 빵빵한 포로 밀어붙이는  장땡이다.”

 

한국군의 상황이 이해가 가는가?

 

7165VS177C5FVFM69L6Z.jpg

 

그 동안 한국에서 기동전을 생각하지 못한 이유는 크게  가지 정도로 생각할  있는데,

 

첫째,

둘째, 지형

 

이라고   있다. 돈의 경우는  동안의 한국 경제 상황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우리가  정도로     얼마  됐다. 불과 40  전까지만 하더라도 군인들이 먹을  걱정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비용이 들어가는 기계화 부대의 편성은 어려웠다. 우리나라가 포병화력에 목숨을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성비가 최고이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기갑웨이브를 막아내기 위해 한정된 자원으로   있는 방법을 찾던  해답이 나온  ‘포병이었던 거다.

 

지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동전이 제한 상황에서 대규모 병력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구나 돈도 없다.  경우 생각해   있는  주요 거점을 확보한  화력으로 밀어내는 거였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미군의 증원군이 온다. 여기에 확신을 심어준  6.25이다.

 

6.25 전쟁 당시 맥아더의 후임으로 들어온 리지웨이 장군은 대규모 중공군의 남하를 막아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병력 대신 화력이었다. 인해전술을 화력의 집중으로 극복해  거다. 산악지형인 한국 지형의 특성상 감제고지(瞰制高地 :  활동을 살펴볼  있는 고지) 획득하면, 이후에는 화력 지원으로 감제고지 주변을 확보할  있다. , 거점 지역만 확보  놓으면  뒤는 압도적 화력으로 밟아 버리고, 차근차근 땅따먹기가 가능하다는 거다.

 

이런 제약과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오늘날의 대한민국 육군이 만들어  거다.

 

까놓고 말해서 국방부를 탓할  없다. 상황과 환경 속에서 가장 확실한 답을 찾았던 거다. 문제는  답을 다시 들여다 봐야 한다는 거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같다. 줄어드는 인구, 점증되는 주변국의 압박, 고비용 저효율의  체제 앞에서 한국군은 변화의 방향을 모색해야... 아니, 변신을 강요받게 된다.

 

 시작은 김대중 정부  부터였다.

 

 

PR-1998-0664-00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