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환 이후 홍콩 시민들은 쉼없이 싸웠다. 기회가 될 때마다 시민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민주주의를 축소하려던 중국과 홍콩 당국의 시도가 우산혁명을 만들었고, 지금 거리로 뛰어나온 100만의 시민을 낳았다. '반송중' 시위를 만든 중국과 홍콩의 역사를 들여다 보자.
민주주의를 이식하라
홍콩의 국회격인 입법회가 처음 생긴 게 1850년이고, 1884년 민간인인 직능단체 대표가 의원에 선출될 수 있게 됐다. 1991년까지 홍콩 입법회는 100% 간접선거였다. 친영단체 위주로 구성된 입법회는 1991년까지 정부 입법안에 대한 논쟁 자체가 거의 없었다.
1984년 홍콩 반환협정이후 영국은 홍콩에 민주주의를 이식하기로 결정한다. 홍콩의 민주주의는 영국시절 내내 보장되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인도부터 중동, 아프리카까지 영국이 물러난 후 디바이드 앤 룰이 불러온 피의 역사가 홍콩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반복될지도 모르는 불길한 징후였다.
그렇게 1997년, 홍콩 반환을 6년 앞두고 총 60석 중 18석이 주민투표에 의해 선출됐다. '중국 반환 후 50년간 현행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을 홍콩의 마지막 총독 크리스토퍼 패튼 반환이 악용한 것이었지만, 홍콩 시민들은 더 넓어진 민주주의에 환호했다.
당연히 중국은 반발했다. 반환 직후, 중국은 1995년에 설립된 의회를 해산해 2년 임기의 임시 입법원을 만들고, 선거제도를 패튼의 1994년안보다 대폭 후퇴시킨다. 홍콩 사람들 입장에서는 영국이 준걸 중국이 뺏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결과였다.
영국이 떠나가며 분열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도입한 민주주의였다고 의심하기에 충분했지만, 홍콩 시민들로서는 처음 맛본 주인의식, 그리고 홍콩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참 슬픈 사연이긴 하지만 말이다.
2003년. 홍콩과 중국의 충돌 1 : 국가안전법 사태
홍콩이 반환되고 6년 후인 2003년, 홍콩 시민사회와 베이징 사이에 첫번째 대회전이 벌어진다. 우리에게 홍콩판 국가보안법 사태라고 알려진 홍콩 기본법 23조 개정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전세계가 테러방지법을 제정하는 데 열을 올릴 무렵이다.
중국도 당시 테러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장 위구르 지역을 합법적으로 조지기 위해서. 전세계적인 반 이슬람 정서와 공포가 팽배하던 그 시절, 명분은 충분했다.
홍콩 기본법은 영국과 중국이 합의한, 중국반환 이후 50년을 보장하는 일종의 헌법개념이다. 해당 법의 23조는 홍콩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광범위한 금지사항이 기록된 조항이다.
원래의 홍콩 기본법 23조는 이렇다.
<홍콩특별행정구는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여 국가를 배반하고 국가를 분열시키며 반동을 선동하고 중앙인민정부를 전복하며 국가기밀을 절취하는 행위를 금지하여야 하며 외국의 정치 조직 또는 단체가 홍콩특별행정구에서 정치 활동을 진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홍콩특별행정구의 정치 조직 또는 단체가 외국의 정치 조직 또는 단체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금지하여야 한다.>
이 부분에 중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하려고 했다.
<국가기밀 누설의 금지, 국가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조직결성의 금지, 국가 전복을 위한 광범위한 선동의 금지, 반란 선동의 금지>
그리고 후속 입법으로 이를 어겼을 경우, 국가 전복, 혹은 전복의 범죄제안의 경우 최대 종신형, 선동을 했을 경우 최대 7년.
그 전의 홍콩 기본법 23조가 어떤 행위에 대한 처벌이었다면, 새로운 홍콩 기본법 23조는 단체의 결성이나 국가기밀누설, 선동금지 같은 모호한 단어들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3년 7월 1일, 홍콩 반환일을 기념해 홍콩 시민 50만명이 빅토리아 공원으로 모였다. 이번 범죄인인도협정 시위 때문에 100만, 200만이 우스워 보이지만, 당시 50만 집회는 홍콩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처음 겪는 시민들의 격렬한 반응에 홍콩 행정부는 전면적인 후퇴를 선언한다. 홍콩 기본법 23조 개정 관련 조치를 무기한 연장한다고 발표했고, 이 법을 추진한 안보장관은 사퇴해야 했다.
베이징은 난생 처음보는 시민들의 저항에 당혹해했고 이후에는 분노했다. 홍콩과 함께 마카오도 동시에 마카오 기본법 23조의 개정을 추진했는데, 마카오는 별 군말없이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당시 중국의 국가주석인 후진타오는 별 무리없이 추진된 마카오 기본법 23조 개정을 칭찬하며 홍콩에 대해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2004년. 중국의 역습 : 홍콩기본법 해석사태
다시 홍콩 기본법 54조로 가보자. 이 조항은 홍콩 특별행정구의 행정장관 선출과 관련된 조항이다.
<홍콩 특별행정구의 행정장관은 현지에서 선거 또는 협의에 의해 선출되며
(베이징의) 중앙인민 정부가 임명한다.>
2004년 이전까지는 54조를 해석할 때, 과거 영국시절의 총독격인 홍콩 행정장관을 홍콩 시민들의 선거 또는 협의에 의해 선출된다에 방점을 찍었다. 홍콩인이 홍콩을 지배한다는 항인치항의 원칙에 따라 중앙정부의 임명은 요식행위로 봤다. 하지만, 중국이 뜬금없이 전국인민대표자 회의의 상무위가 홍콩 행정 장관의 임명 및 홍콩 기본법의 개정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는 입장을 발표한다.
쉽게 말해 홍콩 입법회에서 홍콩 기본법의 개정을 추인한다 해도, 베이징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해당 개정안을 일방적으로 철회할 수 있고, 행정장관의 선출 또한 베이징의 의사에 따라 당선 무효화를 시킬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사건에 대해서 홍콩 시민사회는 격렬한 반대운동을 펼치지 못한다. 이때만 해도 불과 1년 전 국가안전법 개정 반대운동의 성공으로 인해 시민들이 요구하면 베이징도 어쩔 수 없을것이라는 순진함이 사회 전반을 감싸고 있었다.
사실 2003년 국가안전법 사태의 승리로 인해 홍콩 반환 직전 홍콩을 탈출했던 홍콩인들도 다시 홍콩으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시민사회는 별일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더 강했다.
2012년. 홍콩과 중국의 충돌 2 : 국민교육 사태
국가안전법 사태를 보면서 중국은 홍콩 꼰대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교훈을 얻었다. 따라서 자라나는 홍콩의 신세대들이라도 친중국적인 아이들로 자라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방법은 당연히 교육. 이런 일에 교과서 건드리는 건 동서고금이 다 똑같다.
중국의 교육은 1989년 천안문 학살 전과 후로 나뉜다. 천안문 학살사건 당시 시위대의 주력은 베이징대 학생들을 비롯한 20대들이었고,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하는 것에 공산당 지도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은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소위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버리고 민족주의 교육으로 회귀한다. 요즘의 우리가 아는 한족이 아닌 중화민족이라는 개념부터, 더 나아가서는 동북공정같은 고대사 재해석 계획이 모두 이 시기에 입안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이후 동네 아저씨 취급을 받던 공자도 이때 사실상 복권된다.
홍콩 병합 직후부터 중국은 중국 표준어인 푸퉁화 교육을 확대하고 싶어했지만, 광둥어 기반인 데다 유일한 광둥어 계승자를 자처하는 홍콩 사람들은 영어교육의 확대라면 모를까 푸퉁화 교육의 확대를 내켜하진 않았다. 이건 지금도 이어지는데, 홍콩의 레스토랑에서 유창한 푸퉁화를 과시하는 건 좋은 서비스를 거부하겠다는 의사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JTBC가 전직 국회의원인 홍콩 민주계 인사와 현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푸퉁화를 사용했는데, 이거 좀 웃기는 짬뽕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뭐랄까? 60년 전쯤에 외신이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는 독립군 3지대 대장급과 인터뷰를 하는데 일본어로 인터뷰를 진행한 기분이랄까? 홍콩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에게 굳이 푸퉁화로 말은 건네는 건 넓은 의미에서 실례에 속한다.
아무튼, 베이징은 이왕 이리 된 거 교육을 한번 장악해 보자고 나선다. 그래서 나온 게 홍콩의 국민교육 사태다.
2012년 행정장관 렁춘잉에 의해 추진된 국민교육안은 쉽게 말해 유신시절 한국에서 시행된 국민윤리교육 강화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초등학교에 국민윤리 과목을 신설해 2012~2014년도까지 시범과목으로 운영하고 2015년부터 의무교육에 편입시키겠다는 게 핵심이었다. 초등생 교육을 잡겠다가 핵심이다.
참고로 CNN의 탐사보도에 의하면 홍콩이 만들려던 국민교육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간다.
‘공산당만을 인정하는 중국의 단일정당 제도가 가장 진보적이며, 사심이 없고, 인민의 단합을 촉진한다.’
‘미국과 같은 복수정당제 국가들은 치열한 당내경쟁이나 일삼으며 이기적 행동을 하기 때문에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2000년, 미국 플로리다 주의 해괴한 모양의 투표용지 때문에(구글에 플로리다 나비 기표용지로 검색하면 관련 내용이 나온다) 일부 유권자들이 조지 부시에게 잘못 기표하는 일이 벌어졌다. 중국언론은 서구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아예 보도를 안할 것 같지만,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엄청나게 보도한다. 이때 TV에선 밤낮으로 미국의 혼란한 상황을 보여줬다. 서구식 투표라는 게 이런식으로 사회적 혼란만 제공할 뿐이라는 메시지를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거다. 중국은 홍콩에서 이런식의 교육을 하려했다.
홍콩시민들은 다시 결집한다. 국민교육에 반대하는 민간대연맹, 국민교육을 우려하는 학부모 모임이 결성된다. 이때 가장 주목할 점은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의 선봉에 섰다는 점이다. 바로 이후 우산혁명시기까지 가장 강력한 투쟁력을 선보였던 학민사조(學民思潮 Scholarism)도 이 시기 조슈아 웡(Joshua Wong 黃之鋒)에 의해 탄생한다.
등교거부, 해킹공격, 그리고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곧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젊은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고 시위에 합세했다. 행정장관 렁춘잉은 국민교육의 의무교육화 폐지, 국민교육 과목 선정은 학교장의 재량에 맡긴다고 선언하며 대대적인 후퇴를 선언한다. 한국의 교학사 역사 교과서 사태마냥, 국민교육을 교과목으로 선택한 학교는 10%미만. 이 또한 국민교육을 교과목으로 채택한 학교장들이 모여 채택은 하되 중국의 어두운 면 또한 아이들에게 똑바로 가르치겠다고 선언하며 마지막 일격을 날린다.
이렇게 홍콩 시민사회는 국가 안전법에 이어 2연승을 거둔다.
2014년. 홍콩과 중국의 충돌 3 : 우산혁명
영국 식민지시절 총독의 역할을 하는 게 행정장관이다. 총독과 행정장관은 비슷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유일한 차이점은 선출 방식이다. 총독은 임명제였지만, 행정장관은 간접선거로나마 투표로 선출한다. 1984년 영국과 중국은 행정장관을 가까운 시일내에 직선제로 선출한다는 선에서 합의했고, 이 합의는 홍콩 기본법 45조에 반영되어 있다.
-홍콩 기본법 45조-
홍콩 특별행정구의 장관은 현지에서 선거 또는 협의에 의하여 선출되며 중앙정부가 임명한다. 행정장관의 선출 방법은 최종적으로 광범위한 대표성이 있는 지명위원회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천거한 후 보통선거의 방식으로 선출하는 걸 목표로 한다.
사정상 간선제로 뽑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직선제로 뽑아야 한다. 문제는 그 시점이 언제냐는 거다.
홍콩의 시민세력은 5대 행정장관이 취임하는 2017년, 즉 홍콩 반환 20년을 그 시점으로 봤다. (주: 일부의 주장에 의하면 2017년 직선제가 중국측의 난색으로 문서화만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영중간 합의된 내용이라고 한다) 중국의 국무원과 당시의 홍콩 행정장관도 직선제 요구에 화답하는 분위기가 이어지며 초기에는 기대감도 꽤 높았다.
2014년 8월 3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상무위는 다음과 같은 선거안을 발표한다.
-중국 국무원이 1200명의 후보추천위원을 선출한다.
-이 1200명이 홍콩을 사랑하는, 애국적인 인사 중 2~3명의 후보를 추천한다.
-홍콩 시민들은 이렇게 추천된 2~3명의 후보 중 한 사람을 뽑는다.
직접 선거권은 인정하겠지만, 후보는 우리가 골라준다는 의미였다. 대통령 선거를 하는데, 기호 1번 이명박, 기호 2번 박근혜, 기호 3번 황교안 중 한 명을 뽑을 권리를 주겠다는 발표를 한 셈이다.
이미 두 번의 승리를 맛 본 홍콩 시민사회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다. 8월 31일, 수백 명이 항의시위를 시작했고, 9월 22일 홍콩의 24개 주요 대학들이 동행 휴학 선언, 여기에 고등학생 조직인 조슈아 웡의 학민사조가 결합했다.
초반의 시위는 미미했다. 시위자는 불어나고 있었지만, 폭발적이진 않았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행정장관 런춘잉이 9월 28일 강경진압을 지시한다. 참고로 당시의 행정장관 렁춘잉은 2003년 국가안전법 23조 사태 때는 입법원 의원이었는데, 거의 유일하게 강경진압론을 주장하며 홍콩에서는 왕따였지만 베이징에서는 차기로 점을 찍어둔 인물이다.
이미 전 날 죠수아 웡이 경찰에 체포되며 시위가 점차 격렬해지던 시점이었다. 약 3만 명의 시위대를 향해 홍콩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고 이를 우산으로 막는 이미지가 전세계에서 타전된다. 이른바 우산혁명이라 불리는 반정부 시위의 시작이었다. 각종 SNS, 유튜브를 통해 전세계에 중계된 당시의 상황에 가장 먼저 분노한 건 홍콩 시민들이었다. 9월 30일부터 중국의 국경절인 10월 1일로 이어지는 1박 2일 집회에 약 30만의 인파가 결집한다. 강경진압으로 인해 시위인원은 열 배로 튀어버렸다.
홍콩은 매년 네 번의 대대적인 불꽃놀이를 한다. 바로 반환일인 7월 1일, 중국 국가 창건일인 10월 1일, 그리고 음력 설날과 매년 12월 31일이다. 2004년에도 반환일의 축하 분위기를 시위로 끝장내더니 2014년에는 국경일 연휴의 불꽃놀이를 날려버렸다.
강경진압이 외려 화를 키우자 베이징은 시간 끌기에 들어간다. 주요 언론들이 시위 장기화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성장률 몇 %가 감소하면 실직자 숫자는 얼마가 늘어난다는 기사를 써내기 시작했고, 실제로 여행업처럼 단기 충격에 약한 영역에서 실직이 시작됐다.
초반에 들불처럼 타오르던 시위대는 점점 지치기 시작했고, 홍콩 당국은 이들과 시민들을 분리시켜 나갔다. 12월 3일 우산혁명을 이끌던 지식인들이 경찰에 자수해 버렸다. 조슈아 웡 등 고등학생 그룹이 반발했지만, 12월 5일 마지막 시위 천막이 철거되며 우산혁명은 시민사회의 패배로 끝이났다.
우산혁명이 바꾼 것들
오랜기간 홍콩에서 경찰은 포돌이, 진짜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했다. 홍콩 시민들에게 경찰은 할로윈 같은 행사가 있을때 그 행사를 앞두고 교통을 정리해주고, 안전선을 설치하며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아저씨’에 가까웠다.
9월 30일 최루탄을 발포하고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을 보면서 홍콩 시민들이 격분했던 건 바로 배신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중국에 반환이 되었고, 중국세상이라지만 시민들을 향해 몽둥이를 든 경찰에 대한 충격이었다.
우산혁명 전만 해도 중국이 보장한 50년, 즉 2047년이 지나더라도 으례 홍콩의 자유는 자동연장 될 거라 생각했던 시민들은 일국양제가 얼마나 허울뿐인 말장난인지를 깨달았다.
홍콩에서 태어나 2047년에도 사회의 주역이 돼야하는 중고등학생들은 우산혁명을 거치며 우리 홍콩이라는 의식. 한마디로 홍콩 민족주의와 조우하게 되고 일부는 홍콩의 독립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반중감정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한다.
중국은 대대적인 반동을 감행한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막아도 먹고 노는 이야기 뿐이던 인스타 만큼은 허용했던 중국은 우산혁명 직후 인스타그램을 막는다. 그리고 뒤이어 어지간한 검색어들은 모두 차단되기에 이른다. 홍콩의 소식이 본토로 전해지는 걸 막기에 급급했다.
2015년. 행정장관 직선제 표결
우산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이제 홍콩 입법회는 중국의 의견을 십분 반영한 개정안을 통과시키면 된다. 홍콩 기본법에 의하면 행정장관 선출의 방법을 바꾸기 위해 해당의원의 2/3이 찬성을 해야 가능하다. 당시 홍콩 입법회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총 70명의 정원 중, 직접 선출이 35명, 간접선거 선출이 35명이다. 당시 입법회는 2012년 홍콩 선거의 결과물인데, 직접선출 인원 중 민주파가 18석, 베이징이 17석, 간접선거 선출인원 중 민주파가 9석, 베이징이 26석을 가져갔다. 하여 총 70석 중, 민주파 27석, 베이징 43석. 홍콩 기본법 개정을 위한 일종의 개헌안 통과를 위해서는 46석이 필요하다. 베이징으로서는 3석이 부족한 상태였다.
사실 민주파라고는 하지만 무려 7개가 되는 정당이 난립하던 상황이라 베이징은 바른미래당 정도를 잘 작업하면 개헌안 가결이 가능하다고 봤다. 문제는 우산혁명의 와중에 7개 정당이 거의 하나처럼 움직이는 상황이 도래해버린 것. 즉, 개헌안 통과 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2015년 6월 19일 표결이 시작됐다. 홍콩 기본법 75조에 의하면 법안 표결을 위해서는 과반 이상의 의원이 참석해야 한다. 불리한 상황에서 베이징파 의원들은 일제히 회의 불참을 선언했다. 아예 표결자체를 무산시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반란이 일어났다. 과반에서 한 명이 넘는 36명이 표결에 참여했다. 즉 베이징파 의원들 중 일부가 표결에 참석해서 굳이 베이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하여 재석의원 36명 중, 찬성 8명, 반대 28명으로 베이징 안이 부결된다. 베이징파 의원들 중 9명이 소위 당론을 거부하고 투표에 참여했고,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반대표를 던졌다. 이들이 왜 이랬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연락을 못받았다.’, ‘나와보니 우리편이 하나도 없어서 이상하긴 했는데, 그래도 나왔으니 투표했다’부터, ‘어쨌건 내 의사를 표명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좌우당간 베이징 만세!!’까지 온갖 이유가 나왔다. 이렇게 홍콩은 그들이 싸운 이유에 대한 결과를 기록으로 남겼다. 홍콩 입법회는 베이징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2015년. 반중감정은 축구로 표출된다
홍콩 기본법에 의하면 홍콩은 중국의 일부지만 IOC나 FIFA, WTO같은 국제기구에 Hong Kong China라는 이름으로 가입이 가능하다. 하여 하나의 중국을 바라는 중국의 입장과 달리 월드컵에도 중국, 마카오, 홍콩, 타이완 등 4개 지역이 각각의 회원국 지위를 가지고 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우산혁명 이후 반중감정이 최대치로 올라간 상태에서 홍콩과 중국이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같은 C조를 배정받았다.
축구 더럽게 못하지만 탑 시드는 중국. 그 외에 카타르, 홍콩, 몰디브, 부탄이 같은 조였다. 참고로 홍콩 축구는 월드컵 본선 진출은 커녕 1956년 아시안컵 3위, 동아시안컵 4위가 국제대회에서 내세울만한 성적의 전부다. 한마디로 축구 못한다. 중국입장에서도 C조는 꽤 쉬워보였다. 솔직히 변변한 평지 하나 없는 산기슭의 부탄이나 자그마한 섬나라 몰디브가 축구를 잘한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냥 카타르 잡고 조 1위로 올라가자 정도가 소박한 목표였다.
하지만 홍콩의 생각은 달랐다. 2014년 우산혁명 실패 이후, 중국-홍콩 축구경기는 1950년대 한-일전 모드였다. 지면 모두 현해탄에 빠져 죽어야하는… 당시 홍콩의 감독은 한국 출신 김판곤이었다. 중국국대에게 공한증이 추가로 장착됐다.
예선 초반 홍콩은 부탄을 7:0로 대파하고 몰디브도 2:0으로 이기며 조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3차전은 중국과 선전에서. 어웨이 경기였다. 김판곤 감독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수없으나 홍콩은 무조건 비기는 방향으로 전술을 전개한다. 홍콩팀은 아예 하프라인을 넘는 일조차 손에 꼽을 정도로 전원 수비전략을 쓰고, 중국은 아시아팀 답게 골결정력 부족을 자랑하며 비겨버린다.
이쯤에서 순위를 살펴보자면,
1위 홍콩 2승 1무
2위 카타르 2승
3위 중국 1승 1무
난리가 났다. 이대로 이어지면 중국의 예선탈락이 보이는 상황. 이날 내내 중국 축구팬들의 홍콩 저주가 인터넷을 도배했지만, 비긴 홍콩은 사실상의 승리자처럼 굴었다. 홍콩 전역에서 건배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뒷다리라도 잡은 게 어디냔 말이다.
2015년 11월 17일, 예선 8차전에서 홍콩과 중국은 다시 격돌한다. 이번엔 홍콩의 홈경기. 바로 홍콩 국대팀 전용경기장인 몽콕 축구장에서 경기가 벌어졌다. 홍콩의 국대 서포터들은 이날 중국 국가가 올라올 때 엄청난 아유를, 그리고 경기 중간중간 홍콩은 중국이 아니다(香港不是中國)라는 구호를 외쳤다.
홍콩은 다시 한번 전의를 불태웠고, 홍콩 국대 경기를 튼 란콰이펑의 스포츠 바에는 너도나도 맥주잔을 들고 몰려들었다. 그리고 또 비겼다. 중국의 허당끼를 간파한 홍콩이 1차전과 달리 공격적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승자는 없었다. 중국은 홍콩의 야유에 경악했고, 중국 네티즌들의 홍콩 증오도 극에 달했다. 홍콩 행정부는 이 일을 계기로 국가와 국기에 대한 모독을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기에 이른다.
최종순위는 카타르 1위, 중국 2위, 홍콩이 3위로 결국 중국이 3차 예선에 올라가긴 한다. 하지만 홍콩이 만든 2무는 중국의 축구굴기에 지옥구경을 시켜주기엔 충분했다. 홍콩의 영자신문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CMP)는 이날 경기를 ‘골없는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2015년. 코즈웨이베이 서점 납치사건
홍콩은 중화권의 몇 안 되는 사상의 용광로다. 중국에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다. 한족이 절대 다수이자 기득권을 이루고 있는 싱가포르는 나쁘게 말하면 ‘잘사는 중국’일뿐,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하기 어렵다. 타이완은 중화권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이긴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수복되지 않은 적성국이라 중국인들이 엄한 짓을 하기는 좀 어렵다.
홍콩은 중국과 지하철로 연결된다. 카우롱반도에 있는 홍함역에서 전철을 타고 로후 역에서 내린 후, 육로로 접경을 넘으면중국 선전시. 선전 지하철 선전역을 만날 수 있다. 요즘은 웨스트 카우롱 역에서 고속철을 타면 20분이면 갈 수 있다. 비록 통행증을 별도로 발급 받아야 하지만 중국사람들에게도 홍콩은 일단 가깝다.
중국의 관료입장에서도 홍콩을 들락거리는 건 그냥 쇼핑 다녀온 걸로 간주된다. 보따리상도 많다. 중국에서 불량 분유라도 나오면 가장 먼저 홍콩 슈퍼마켓의 분유가 동난다. 보따리상들이 왕창 사서 선전으로 가져가고, 선전에서 중국 전역으로 판매된다. 홍콩-선전 국경은 어지간해서는 짐 검사가 없다.
홍콩의 서점엔 온갖 책이 다 있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다양한 종수를 자랑하는 곳이 홍콩이다. 중국 공산당의 비밀문건이 기한이 다 돼 해제되면 가장 먼저 ‘폭로! 비밀 해제 문건으로 바라본 중국 공산당의 추악한 실태’같은 제목으로 팔리는 데가 홍콩이다. 마오저뚱에 의해 민족혼이라고 불렸던 루쉰과 그의 젊은 연인이 주고받은 편지가 출판된 것도 홍콩이고,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현직 고위관료의 폭로같은 게 가능한 곳도 홍콩이다. 무엇보다 홍콩은 아직까지는 공산당을 마음껏 깔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중국 윈난성의 공산당 관료라고 생각해보자. 지금은 중국에서 매 10년마다 벌어지는 권력 교체기다. 후진타오 다음은 시진핑이 집권을 할 예정인데, 뭔가 다른 때와 느낌이 다르다. 유학 보낸 아들놈 말은 충칭의 서기와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는데,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중국 내에선 알 길이 없다. 음 뭔가 고급 정보를 접해서 줄을 대놔야 남은 10년 더 편히 살 텐데 말이다.
이때 당신의 선택은? 최소한 선택지 중 하나는 홍콩행이다. 홍콩에는 공산당과 관련된 찌라시부터 꽤 신빙성있는 고급 정보까지 모든 게 유통되기 때문이다. 지금 언급하는 코즈웨이베이 서점 납치사건 이전만 해도 가판에서도 이런 류의 책은 흔히 구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런 책은 홍콩 사람들이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산다. 중국 기업체, 관료, 공산당원, 혹은 이 글을 쓰는 나처럼 쓸데없이 관심 많은 사람.
코즈웨이베이에 서점이 하나 있다. 이름도 코즈웨이베이 서점이다. 1994년 오픈한 이 서점은 중국이 싫어할 만한 책만 모아서 파는 곳이다. 80년대 한국에도 많았던, 사회과학서점 같은 곳인데, 차이가 있다면 중국을 까기 위해서라면 옐로우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거랄까?
2015년 10월, 서점 관계자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참고로 이곳은 출판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출판사 사장이자 서점 점장인 람윙키(林榮基)는 당시 본격 시진핑 아랫도리 탐구서적 ‘시진핑과 여섯명의 여인’이라는 책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중이었다. 10월 17일, 서점의 대주주이자 스웨덴 국적자인 꽈이만호이(桂民海)가 태국의 파타야에서 실종된다.10월 24일에는 람윙키(林栄基)가, 10월 26일에는 서점의 대주주 루이보(呂波), 서점 경리인 쩡지핑(張志平)이, 마지막으로 12월 30일에는 점주인 레이보(李波)가 실종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은 없는 이 사건에 대해 홍콩 사람들은 경악했다. 범인들은 아마도 두 가지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내막 폭로 책을 내는 출판인들에 대한 확실한 경고
두 번째는 책의 소스를 제공하는 공산당 내부의 밀고자들을 향한 경고
꽈이만호이는 국적은 스웨덴 사람이고 거주지는 독일이다. 코즈웨이베이 서점이 경영난에 허덕이자 자금을 댄 이른바 엔젤 투자가다. 만주족 출신으로 1985년 베이징대 역사학부를 졸업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태국 파타야의 자신의 리조트 맨션에서 사라졌다. 이후 BBC의 탐사보도에 의하면 꽈이만호이의 실종 후 4명의 중국인이 맨션 관리실에 그의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고 그의 집에서 컴퓨터를 가져갔다. 관리인에게 그들은 꽈이만호이의 친구라며 꽈이만호이는 현재 캄보디아에서 도박을 하고 있는데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람윙키는 홍콩인이다. 10월 23일 자신의 컴퓨터에 접속한 기록 이후로 아예 증발했다. 람윙키의 아내는 남편이 실종되고 12일이 지난 11월 5일 홍콩 경찰에 실종신고를 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실종신고 몇 시간 후 람윙키로부터 전화가 와 ‘실종이 아니니 실종신고를 철회해 달라’는 내용의 전화를 남겼다고 한다. 경찰은 홍콩 출입국 관리소에 람윙키의 출입 기록 조회를 요청했는데, 출입국 관리소가 이를 거절한다.
11월 6일, 외신이 이 사건을 관심있게 보도하자, 람윙키는 언론사에도 전화를 해 자신이 무사함을 알린다. 같은 시기, 꽈이민호이도 독일에 있는 부인에게 자신은 무사하고, 곧 돌아가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전화를 하고 바로 끊는다. 쩡지핑은 부인이 있던 중국의 동관에서 수십 명의 남자들에 의해 연행된다. 대주주 루이보 역시 중국의 선전에 있는 아내를 방문했다가 집에서 연행된다.
마지막으로 실종된 레이보는 영국 국적자인데, 서점 관계자들이 실종되다 보니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렸다고 한다. 매사에 조심했던 그도 12월 30일 실종된다. 아내가 다음날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이튿날인 1월 1일 친필 팩스를 보낸다. 팩스에는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고 세간에 알려지면 안되는 문제기 때문에 실종신고를 철회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2016년 1월 꽈이민호이가 불현듯 중국 티비에 등장했다. 티비에 등장한 꽈이민호이는 2003년 중국의 닝보(宁波)에서 음주운전을 하다 여학생 하나를 치여 죽였는데,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다 견디지 못하고 하필 그 즈음에 자수를 해서 중국에 있다고 밝힌다.
영국 국적자 레이보도 티비에 등장한다. 자발적으로 온 것이니 내 선택을 존중해 달라는 영상을 녹화해 틀었다. 영국 외무부는 자국민이 중국에 납치된 상황에서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중국쪽은 "레이보가 영국 국적자인 건 사실이나 혈연적으로 중국인이니 우리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희대의 개소리를 한다.
레이보는 출입국 기록이 없는 상태, 중국은 중국 국내법 위반이라 체포했다고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듯, 홍콩과 중국은 범죄인 인도협정 자체가 없는 관계다. 즉 납치를 했단 말이다.
참고로, 점장 람윙키는 8개월간 구속된 이후 석방됐다. 현재 납치사건에 대해서 유일하게 증언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데, 선전을 방문했다 구속돼 수갑과 눈 가리개를 한 상태에서 기차에 탑승, 닝보까지 끌려갔다고 한다. 8개월 간 그는 자살 방지를 위해 칫솔질을 할 때도 감시인원이 따라붙는 분위기에서 24시간 감시를 당했다. 그가 머물던 실내도 자살방지를 위해 모든 모서리에 플라스틱 스폰지가 감싸져 있었다고.
2019년 4월 27일 람윙키는 타이완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람윙키는 홍콩 정부가 범죄인 인도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려 하기 때문에 망명을 신청한 것이라 밝혔다.
이 사건이 홍콩에 끼친 영향이 바로 요즘 우리가 보고 있는 홍콩이다. "홍콩인, 스웨던 국적자, 영국 국적자가 중국 정부에 의해 백주대낮에 홍콩, 그리고 해외에서 납치를 당했다. 그런데 이걸 합법화 하겠다고? 이게 뭔 개소리야"가 현재 홍콩 사람들의 심정이다.
집회,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는 커녕 인신의 자유가 잠식되어 가고 있고, 이제는 불법도 아닌 법의 이름으로 그게 자행될 거라는 광범위한 공포. 그리고, 중국이 지키려는 그 거창한 안전이 고작 푸우 닮은 중국 최고 지도자의 사생활 폭로 따위라는 사실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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