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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파 대약진, 홍콩 6 입법회 선거 / 2016

 

우산혁명의 실패 이후 홍콩의 상황은 '압도적인 물리력을 내세운 중국의 반격과 이를 막아내는 시민사회의 방어'라고 있다.

 

홍콩 입법회의 자리는 70석. 이 중 직접 선출하는 자리가 35, 직능대표 선출 몫이 35석이다민주파가 기적적으 직선제로 선출하는 자리를 모두 석권한다 해도, 직능대표 의원들이 부분 중국이라 여소야대는 불가능하.

 

2016 9 있었던 홍콩의 6 입법회 선거의 투표율은 58%. 홍콩 반환 이후 최대로, 2012 53%보다 무려 5% 올랐다. 우산혁명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각성한 20~30 유권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일단 지역구, 범민주파가 이겼다. 가장 고소득, 고학력자가 몰려있는 홍콩섬의 경우 전체 6석 중 민주파가 4 차지했. 특히 홍콩 독립파로 불리는 데모시스토당의 네이선 로(羅冠聰)의 당선은 이변으로 평가된다이외에도 '우산혁명은 나약한 대중들이 비폭력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과격파 열혈공민의 쨍총타이 鄭松泰(푸퉁화 정쑹타이), 2047 이후 홍콩 독립에 대한 주민투표를 주장하는 청년신정의 야우와이칭 遊惠禎(푸퉁화 위후이전), 렁쫑항 梁頌恒(푸퉁화 쑹헝 기존의 민주파와는 궤를 달리하는(소 홍콩독립파) 청년 의원 4명이 탄생했다.

 

우산혁명 이후 홍콩 민족주의 낳은 결과물이었다직접선거로 뽑는 35석 중 18석을, 직능 대표 몫까지 환산하면 70석 중 27석을 민주파가 가져갔. 그리고 홍콩에선 1/3 의석 있으면 법안 거부권을 사용할 있다.

 

 

 

의원직 박탈 / 2017

 

사실 선거 전부터 시끄러웠다. 홍콩 정부가 모든 출마자에서홍콩은 중국의 일부라는 확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서명을 거부한 6명의 후보자 입후보 자격을 박탈당했다홍콩 정부는 이때부터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이 중국 지배 하의 홍콩을 부정한다면 엄단하겠다'고 엄포했다.

 

2016 6 입법회 개막일, 청년신정당의 청년위원인 야우와이칭과 렁쫑항이 의원서를 앞두고 어깨띠를 두른 채 나타난다. 어깨띠엔 'Hong Kong is not China'라고 적혀있었다. 몽콕 경기장에서 홍콩 국대 서포터즈가 외쳤던 바로 구호였다야우와이칭 입법원 회의장에서홍콩 이즈 차이나 아니라홍콩 이즈 지나라고 외쳐 파문을 일으킨다. 지나는 일제가 중국을 낮춰 부르던 멸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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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기본법 104조에 주요 관료, 의원, 판사는 취임 시 홍콩 기본법을 지키고, 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에 충성을 맹세, 서약해야 한다.’ 조항이 있다. 항을 어찌 해석할지를 두고 논쟁이 시작됐다.

 

국회의장격인 앤드루 렁은 이들 다시 선서를 하면 된다고 보는, 사태를 대수롭 않게 여기는 입장에 가까웠지만, 친중국파 의원들이 육탄전으로 이들의 재선서를 막았중국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는 2016 11의도적으로 선거문구를 바꾸거 불성실한 방식으로 선서하면 공직 자격을 손실시켜야 한다.’ 해석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삐딱한 자세를 취했던 다른 6명에 대한 의원직 자격 박탈 여부로 불이 옮겼다. 친중파 의원들이 앞선 두 명을 포함한 8명의 민주파 의원에게 '의원선서가 성실하지 않았다'고 공격했 문이다.

 

앞선 명의 의원이 의원자격이 있는지의 여부는 홍콩 법원에도 계류 중인 사건이었. 홍콩 법원의 판단이 나오기 전에 중국의 전국인민대표회의 나서며 중국이 홍콩의 내정에 간섭한 결과가 돼버렸다. 물론 의도적으로.

 

2017 7, 홍콩 법원은 적절한 의원선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명의 의원 외에 추가로 4명을 박탈했다. 의원선서 시 우산혁명을 상징하 우산을 펴거나 평소보다 느린 시조풍으로 또박또박 의원선서를 읽지 않은 행위를 죄명(?) 포함됐다.

 

주민의 선거로 선출된 의원 중 6명이 고작 의원선서 문제로 직을 박탈당했다. 이제 범민주파의 숫자는 14. 친중파의 일방적인 법안 가결을 막을 있는 1/3 선을 잃어버렸다친중국파가 독주할 있는 모든 환경이 갖춰졌다.

 

참고로 보궐선거는 불가능하다. 전국인민대표회의가 '선서를 하지 않으면 공직(의원직) 맡을 없고, 선서 무효로 인한 석은 보궐선거를 없다'고 박아버렸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선출권에 패널티를 적용하는 경우가 어디있냐는 항의가 나왔으나 국은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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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 항의, 보복, 납치, 납치

 

코즈웨이베이 서점의 쩐주였던 꽈이민호이는 스웨덴 국적자. 자국민이 백주 대낮에, 그것도 3국에서 납치되는데 가만히 있는 나라가 있을까. 스웨덴은 납치사건 초기부터 중국에 강경하게 어필했다중국은 난감해했지만, 나중에는 괘씸하게 생각했다. 이에 따라 이상한 보복 사건이 발생한다.

 

2018 9 2 새벽, 중국인 관광객 가족이 호텔에 들어가 투숙을 요구한. 이들은 9 2일에 숙박을 예약했고, 호텔의 체크인은 오후 두 시였다. 하지만 이 가족이 호텔에 들어간 시간은 9 2 새벽 1 . 호텔은 무려 13시간이나 이른 체크인을 거절했다(거기다 만실이었다). 해당 가족은 갈 곳이 없다며 호텔 로비에서 있게 해달라고 거칠게 항의하다 스웨덴 경찰에 의해 쫒겨났다

 

중국인 가족 중 아버지는 길바닥에 쓰러졌다. 엄마 경찰이 폭력을 휘두른 것처럼 연기하고, 아들은살인이다!’ 외쳤다

 

 

새벽이었다. 소음으로 인한 주민들의 민원이 잇따르자 스웨덴 경찰은 이들을 경찰차에 태워 외곽에 내다버린다

 

재미있는 사실은 누군가 장면을 찍었다. 가족은 셋이다. 가족 모두가 화면에 들어오니 가족은 아니다. 3 누군가가 찍었단 이야기다 장면이 정교하게 편집돼 중국에 유포된다. 1 3천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중국 네티즌들은 중국 주재 스웨덴 대사관을 방화하자고 했

 

9 16, 해당 사건이 발생하고 2주가 지나 스웨덴 중국 대사관이 성명을 내며 자국민을 학대한 스웨덴 정부에게 사과를 요구했스웨덴으로선 꽈이민호이 납치사건에 이어 적반하장 2연타를 당한 셈이다.

 

반중감정이 하늘을 찌를 때 스웨덴의  TV채널이 반격에 나섰다. 미국의 SNL 흡사한 포맷의 프로그램이 중국을 비꼬았중국인 관광객이 스웨덴에서 문화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역사적 물에서 함부로 똥을 누면 안된다’며 과거 루브르 박물관에서 노상방변을 하다 적발된 여행객의 행동을 언급한다.

 

중국은 즉각적으로 인종차별이라며 다시 한 번 사과를 촉구하고 나섰다중국의 네티즌들은 이케아, H&M, 볼보와 같은 스웨덴 업체에 대한 불매운동을 시작했. 언론통제로 꽈이민호이의 납치가 사건의 시작이라 것을 모르는 중국인들은 자국민이 억울하게 쫒겨났고 스웨덴이 자기들을 조롱했다는 단편적인 사실 밖에 알 수가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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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납치 사건은 이어졌다2018 12 화웨이 창업주의 딸이자 CFO였던 멍완저우가 미국정부의 요청으로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체포됐다미국의 대이란 제재를 피해 교역을 시도 혐의다멍완저우 체포 직후 중국 정부는 나다의 사업가 마이클 코브릭과 마이클 스페이버를 전격 체포한다중국 국가기밀을 수입해 넘긴 혐의, 쉽게 말해 간첩죄였다. 보복으로 보일만 한 일이다. 

 

서구는 홍콩의 '범죄인 인도협정 개정안'을 중국 정부가 서구의 기업인이나 정치인들을 홍콩에서 합법적으로 납치할 있는 종의 포석이라고 보고 있다(중국에서 법원판결은 재판을 위한 요식행위에 가까우니). 실제로 홍콩에 거주하는 서양인 커뮤니티에서는 마이클 코브릭과 마이클 스페이 사건을 포함한 연이은 납치사건에 대해 불안함을 호소하고 있다범죄인 인도협정이 통과된 뒤 상시적으로 납치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홍콩인 뿐 아니라 서양인들에게도 퍼져있다는 이야기다.

 

이번 집회에는 홍콩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첫 번째 100 집회, 그리고 200 집회에서 홍콩의 주요 외국계 기업은 직원들의 재택근무를 허용했다. 집회 나가라는 이야기다. 영국, 런던에 이어 홍콩을 세계 3 예술도시로 만드는데 기여한 외국계 갤러리들이 집회가 있을 때마다 휴업을 하며, 갤러리 큐레이터들이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홍콩인의 문제가 아니라 홍콩에 사는 모든 인간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천안문 학살 기념관에서

 

이제 슬슬 오늘을 야기할 때다2019 6 초에 홍콩에 있었다. 6 2 홍콩에 입국했는데, 이미 홍콩 전역이 술렁이고 있었다. 범죄인 인도협정 개정안 처리가 발등의 불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6 4일이 천안문 학살 30주년이 되는 날이라 홍콩 중문대를 비롯해 주요 대학은 천안문 학살 관련 시를 하고 있었다. 여행책 취재 때문에 초이홍 지역의 아파트를 가야했었는데, 지하철역 지하도에 학생들이 포스터를 붙이고 있었다

 

‘6 4 천안문 학살 30주년 기념 집회

‘6 9 반송중

 

범죄인 인도협정 반대 집회에 대한 내용이었다베드타운에 가까운 초이홍 지역에 집회를 알리는 전단작업을 하고 전단지 눠주다니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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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걸어봤다. 3~2 정도의 청소년이라고 했다.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집회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질문이다

 

그러자 홍콩의 청소년은 '분노'를 이야기했다.

 

"화가 나서 이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저도 그래요. 기자시라면서요. 한국에 써주세요. 저희 1987 함께 관람했어."

 

집회와 시위는 문제의식보다는 광범위한 분노가 동력이 된다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시위는 언제나 분노가 두려움을 이길 크게 발화된다 싸움이 이길지는 모르겠으나 오래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6월 4일, 하루를 반으로 쪼갰다어차피 집회는 오후 8시부터 시작이라 오후에 몽콕에 새로 생긴 '천안문 학살 기념관'에 취재 갔다. 원래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침사추이에 있었지만, 카우롱반 한복판에 있는 일종의 반중기념관을 중국이 가만둘 리 없다이름을 밝힐 없는압력에 건물주가 버티질 못하고 2년 만에 퇴거를 요청, 4년간 장소 구해 문을 열지 못하다 올해 용기있는 몽콕의 건물주를 만나 재개장했다.

 

여기에 있는 게 맞 싶을 정도로 허름한 건물이었다. 1 경비 신분증과 함께 방명록 서명을 요청했다니네 이거 중국으로 보내냐? 한국인인데 큰일이네’ 눙을 쳤더니 그럴 리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방문객패찰을 건네줬다

 

조그만 전시관이었다기념관 내부에는 내외신 기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천안문 학살 사망자 몇 명의 인적사항이 눈에 띄었다.

 

우샹동 吴向. 1968 8 13 , 베이징 공인대학 3학년 재학중 천안문 민주화 위에 참여. 6 3 진압 당시 목에 총상을 입고 6 4 사망. 생전의 그가 베이징 이화위엔(颐和园)에서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에서 흔히 없는 장발로 70~80년대 통기타를 메고 다니던 한국 학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유리 진열장에는 학적부, 수첩 같은 개인용품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마네킹 하나가 그가 어디쯤에 총상을 입었는지 보여주었다80년대 후반 언젠가 1980 광주의 참혹했던 사진을 기분이다

 

이 날 집회 포스터로 눈길이 갔다. 유명한 탱크맨 사진 위로 붉은 글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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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잊지 않을 것이다

 

1989 천안문 학살 사건 현장을 보도한 홍콩기자 64명의 인터뷰집 목이기도 하.

 

담당자와 이번 집회의 성격과 전망에 대해 마디를 나누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습도 94%, 29안경과 카메라 렌즈에 습기가 밀려 들어왔다.

 

 

 

중국인 K

 

이름은 모른다. 그냥 K 부르기로 마음 먹었다천안문 학살 기념관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오래된 건물이라 비좁은 엘레베이터엔 나와 일행인 춘봉, 그리고 명의 관람객이 있었다K가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기자야?"

 

"응. 정기자는 아니고 책도 쓰고 글도 쓰고 하는 사람이야."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는 젊은 친구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건물 입구에서 마디 더 했다

 

"홍콩 사람들 결기가 대단하네."

 

"그러게. 선전(深圳, 중국 광둥성에 있는 산업도시)에서는 없는 풍경이야."

 

"선중국?"

 

"응, 선전에서 왔어."

 

"중국인이라고? 중국인이 여기에이걸 지지해?"

 

"지지해. 이따가 빅토리아 공원 촛불 집회에도 나갈 거야."

 

당황스러웠다. 공안인가

 

"참,  '광주'도 가봤어."

 

"광주? 광저우(广州)?"

 

"아니 한국의 광주(光州)1980년에..."

 

"한국 광주? 아니, 망월동을 갔다고?"

 

"맞아 망월동! 작년에 갔었어."

 

K 우리 나이로 19세였다. 얼마 전 중국의 수능인 가오카오(高考)를 봤다고

 

홍콩의 6.4 천안문 학살 기념관에서 한국의 광주 망월동을 다녀온 중국 3 만날 확률 대체 % 될까. 순간 친구 사진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초 지나지 않아 입 밖으로 내서는 안되는 말이라는  깨달았. 신원을 노출하면 안 된다K 저녁에 있을 빅토리아 공원 집회에서 다시 있으면 보자고 하고 헤어졌.

 

걸어서 몽콕을 통해 숙소가 있는 침사추이로 왔다. 오후 5시 경이었다. 조금 빅토리아 공원으로 가면 된다.

 

 

 

2011년, 청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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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위는 텔레그램을 통한 점조직 시위에 깝다. 신원이 노출될 경우 중국에서 불이익을 줄까봐 SNS 사진도 올린다. 우산혁명 이후 홍콩 사람들이 사는 법이 이렇다 보니 외국인 입장에서는 집회 소식을 접하기가 어려웠다아는 건코즈웨이베이 빅토리아 공원 오후 8’.

 

지하철은 정상운행할까? 경찰이 막는다면 어디부터 막을까? 정보가 필요했기에 TV를 틀었다. 홍콩의 뉴스 채널은 이미 빅토리아 공원에 있었다. 무대를 설치하며 집회 준비 하는 사람들이 보였. 인터뷰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얼굴을 노출했고, 어떤 사람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블러 처리가 됐다. 개인이 원하는 만큼 신원을 공개하는 건가 생각하며 하단의 자막을 봤다.

 

이선생 李先生 (42) / 광저우 廣州

 

중국 사람이다!

 

중국에서 인터뷰이들은 모두 얼굴에 블러 처리를 했다. 얼굴을 노출하거나 마스크를 써서 눈이라도 노출한 사람들은 홍콩인이었다. 6건의 인터뷰 중 중국에서 사람이 둘이었다(산술적으로 시위대의 33% 중국인이란 이야기는 아닐 거다. 방송국 입장에서도 중국에서 사람의 인터뷰가 보도가치가 높았을 테니 이리 배치를 했겠지). 놀라웠다. 중국인이 홍콩 시위 참여한다니.

 

문득 2011년의 만남이 떠올랐다쓰촨성 청뚜(成都)에서 지우자이커우(九寨口)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표를 끊었는 앞에 지프가 서있었다. 의심병 환자인 나는 기사에게 정말 버스가 대체된 게 맞는 지 물었다.

 

"맞아요. 우리도 버스를 예약했는데, 손님이 없어서 지프로 바꼈다더라구요."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중국인 부부가 영어로 이렇게 말해줬다.

 

혼자 온 외국인이라 운전사 옆자리에 앉을 있었다. 아까 부부는 뒤에 앉았다청뚜에서 지우자이커우까지는 460km, 지프로 7시간을 가야하는 길이다. 둘은 칠 전 결혼한 신혼부부로 지우자이커우까지 신혼여행길이라고 했다

 

두어 시간 달렸나? 지프 오른쪽으로 강이 범람한 듯한 폐허가 펼쳐졌다. 2008 원촨 대지진으로 매몰된 곳이라는 이정표가 드문드문 보이는, 그대로 폐허였다.

 

"너 미스 Ms Guo 알아?"

 

알 리가 없없다.

 

"중국 홍십자회(중국은 적십자라고 한다) 대표였어. 원촨 대지진 때 전국에서 걷힌 구호성금을 유용한 사람이야. 그래서 보다시피 지금도 이런 꼴이지."

 

3 7천억의 성금 중 8천억 원 빼고는 집행내역이 불투명하다는 기사를 기억이 있어 아는 체를 했다.

 

"신문에서 봤어. 사람이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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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통했다. 이윽고 휴게소가 나왔고 부부는 나에게 삶은 옥수수를 권했다. 남편이 말을 걸었다.

 

"한국은 좋겠다. 프리덤 컨츄리잖아."

 

K 만난 것 만큼 그때도 놀랐다. 사람을 떠보지 조심해야 하나? 생각하며 말했다.

 

"아니야 딱히... 예전엔 그랬을지 모르는데, 지금은 아니야. 보수적인 정권이 들어섰거."

 

당시는 MB시절이자, 미국산 수입 소고기 반대시위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이었.

 

" 중국 사람들은 원래 정치 이야기  안하던데 너희는 다르다.  그런 각을 하는 거야?"

 

부부가 말했다.

 

"홍콩 가봤어?"

 

"응. 가봤어. 어쩌다보니 매년 . 일을 하거든."

 

"거긴 다르더라고. 정부를 비판할 있었어."

 

넌지시 물었다.

 

"니네 VPN(흔히 말하는 IP우회) 쓰?"

 

"응."

 

"트위터 하니? 팔로우 할래?"

 

그들 부부와는 차에서 내내 떠들었다. 영어는 편했다. 기사와 뒤에  승객 그저 사람이었다. 종종 한국인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물어왔고 그들 부부는 적당히 러댔다. 젊은 여성이 장똥쥔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게 누군가 한참 생각한 외에는 매끄러웠다광저우에 사는 그들은 두 시간 기차를 타고 몇 번 홍콩 여행에 가봤다고 했다그들은 중국의 국가주석 장쩌민을 척살하자는 류의 과격한 파룬궁의 구호가 신선했다 한다. 그래도 되는 사회를 처음 봤던 거

 

지프가 지우자이커우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그들이 1989년의 천안문 사건도 어느 정 인지하고 있다는 있었다. 더이상 대화는 위험하다 판단했고, 그들 호텔로, 나는 도미토리로 향했다그들은 잠시 트위터 친구였으나 만리방화벽(중국의 인터넷 감시·검열 시스템) 빡빡해진 지금은 연락이 끊어졌다

 

2011년의 신혼부부도, 2019 6월의 K 특이한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TV 보면서 그들이 중국에서 아주 극소수는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를 막는 중국의 만리방화벽을 보며 항상 저리 민감하게 굴까 생각했었는데, 혹시 여행을 계기로 현실에 눈을 뜨는 중국인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그리 막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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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공원, 2019 6 4

 

미적대다 8시가  돼서야 MTR(홍콩 지하철) 탔다. 내가 머무는 침사추이에서 코즈웨이베이를 기 위해선 애드머럴티 역에서 환승해야 한다. 애드머럴티에서 내렸을 때 홍콩의 출퇴근 시간 때에도 없는 인파를 만났다. 즈웨이베이로 가는 아일랜드 플랫폼은 사람으로 가득찼다

 

두근거렸다 인파가 모두 코즈웨이베이로 가는 사람들인가?

 

다음 역인 완차이는 상업가와 베드타운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여기 얼마나 내리는지 보면 판가름이 나겠다 싶었는데, 내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빅토리아 공원으로 향하는 코즈웨이베이역 E출구는 빠져나갈 수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정말 느리게 역을 빠져나왔다

 

도로의 양쪽에는 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홍콩 독립파 몇몇 정당의 깃발 아래서는 연설이 이어졌다. 코즈웨이베이역 E출구에서 빅토리아 공원으로 가는 300미터 남짓의 도로는 그대로 해방구.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웃음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집회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베이징의 어머니들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처, 천안문 학살 당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중국의 만행을 알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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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의 구호였다언론은 18만 명이 모였다고 보도했다. 우산혁명 이후, 매년 줄어만 가던 중 간만에 제법 모인 날이었다

 

습도 94%, 29도에 촛불은 정말 살인적으로 더웠다그럼에도 촛불을 사람들은 6 9 다시 만날 것을 결의했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 모일 거라고 그들은 확신했다.

 

이렇게 103만(6월 9일), 200만(6월 16일)이 모이는 홍콩 역사상 최대의 운동이자, 범죄인 송환반대 운동의 서막이 펼쳐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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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홍콩 취재를 갑니다6 들어 두 번째 취재가 됐네요그리하여 4편이 있을 예정입니다.

 

 

 

 

 

가이드북 깎는 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