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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고조되는 1930년대 중반까지의 유럽 정세와 군비경쟁(향후의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한정했을 경우)을 생각할 때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이 독일을 바라보는 두 강국, 즉, 프랑스와 영국의 입장 차이다. 이 입장차이가 독일의 부활과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프랑스와 영국이 공통된 철학을 바탕으로 對 독일 외교에서 확고한 연대나 보조를 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설사 전쟁이 발발했다 하더라도 조기에 끝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이자 승전국인 프랑스와 영국의 시각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하나씩 살펴보자.



① 프랑스의 입장


프랑스에게 독일은 한마디로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멀리 보면 보불전쟁의 치욕이 기다리고 있고, 가까이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의 억울한 승리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명목상 ‘세계대전’이지만 주전장은 프랑스 영토였다. 제1차 세계대전 내내 프랑스 땅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대전 기간 내내 프랑스 땅이 점령된 상태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아무 잘못 없는(독일이 전쟁을 시작했으니) 프랑스 젊은이 150만 명이 죽었다. 기억하기도 싫은 악몽으로 프랑스의 세대 하나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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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일어났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격렬했던 전투였던 베르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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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마른 전투


프랑스는 이런 결과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160억 프랑이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마지노선을 건설한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독일은 불편한 이웃이 아니라 ‘위험한 이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갖가지 조약과 외교적 안전장치를 마련 해 독일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 놓았지만, 그래도 두려웠다. 독일은 언제든 야수성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위험한 국가이며, 야수성을 현실로 표출할 실력을 갖춘 나라다. 거기다 히틀러라는 ‘위험인물’이 프랑스가 만든 ‘안전장치’를 하나둘씩 해체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② 영국의 입장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독일에 우호적(?)이었다. 아니, 동정이라고 해야 할까? 1920년대 내내 영국은 독일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프랑스의 지나친 경계심에 대해 비난했다. 이미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손발이 다 묶인 상태였고, 여기서 더 압박을 가한다면 독일은 영영 수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국제정치적으로나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올바르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가 말하는 독일에 대한 강력한 압박과 견제는 동맹국들의 ‘출혈’을 전제로 했다. 프랑스의 경우는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영국의 경우는 도버해협 밖이다. 독일을 바라보는 시선에 온도차가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프랑스가 자기 피와 돈으로 독일을 압박하면 이해하겠지만, 우리의 피를 강제로 끌고 들어가는 게 싫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동맹이라고 해도 남의 나라 전쟁터에 영국의 젊은이들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괜히 독일을 자극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 보다는 이성적으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가면서 타협하는 게 좋다는 판단이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당연한 독일의 요구를 묵살해 외교적으로 안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게 오히려 전쟁을 부채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쥐도 막판까지 몰리면 고양이를 물지 않는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군사상의 문제도 결합돼 있다.


첫째, 독일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


1930년대 영국은 독일의 전력(戰力)을 과대평가했다(1935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 선언을 할 때). 영국은 독일을 기계화된 육군과 강력한 공군을 가진 나라로 여겼기 때문에 독일과 가급적 전쟁을 피하고 싶어 했다.


둘째, 섬나라 영국의 필연적 한계? 아니면 강 건너 불끄기의 심정


영국은 섬나라였기에 해군은 강대했지만, 상대적으로 육군이 적었다. 아울러 전통적으로 모병제를 택했기에 병력수가 적었다. 물론 영국은 부자였고 인구수도 풍부했다(영연방 국가가 폼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단기간에 본토에서만 200만, 영연방 국가를 포함한다면 500만의 병력을 끌어 모을 수 있지만, 이를 훈련시키고 장비를 갖추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증명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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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대규모 모병 활동을 통해 프랑스군에 필적하는 군대를 갖기도 하였다.

영국은 솜 전투에서 1차 세계대전 역사상 최초로 전투를 주도했다.

사진은 솜 전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영국의 Mk I 전차.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영국은 3개 군단으로 구성된 영국 원정군을 독일로 파견했는데, 그 수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군의 보조 전력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본격적인 전쟁경제체제로 변신하자 영국은 특유의 슬로우 스타터의 모습을 보였다.


즉, 전쟁이 나면 프랑스의 앞마당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는 어쨌든 전쟁을 막는 쪽으로 외교력과 군사력을 집중했다(마지노선과 같은). 반면 영국의 경우, 급한 대로 일부 병력을 보내 프랑스를 돕다가, 실컷 프랑스와 독일이 싸우고 있을 때 동원령을 발령해 병력을 최대한으로 모아 프랑스를 지원하면 독일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집 앞마당에서 불난 것도 아니니까 급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로서는 얄미울 수밖에 없지만, 영국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전략을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그대로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독일을 압박하는 조약의 굴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국은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적 족쇄를 채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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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의 핵심은 이렇다.


①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양도할 것, 모든 식민지를 포기할 것.
② 라인강 이서(以西) 지역 전부와 라인강 동쪽 60킬로미터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하고 병력배치를 금지
③ 육군의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한다.
④ 전차, 전투기(를 포함한 항공 전력 전부) 등 최신 무기의 보유를 일체 금지한다.
⑤ 해군의 병력은 1만 5천, 군함은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 노후 배수량 1만 톤 이하의 전함 6척으로 제한한다. 잠수함도 금지
⑥ 사관학교 폐지 참모본부폐지.
⑦ 20년 안에 1,320억 마르크를 금 기준으로 배상할 것


①항의 알자스-로렌 지방의 양도는 프랑스, 독일이 전쟁의 판도에 따로 오갔던 지역이니 이해를 할 수 있지만, ②항의 경우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라인란트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는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와 벨기에 같은 국가에게는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였다. 만약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킨다면?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아예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못하게 함으로써 전쟁을 꿈도 못 꾸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③~⑥항까지는 말 그대로 독일군대를 없애겠다는 의도 자체를 드러낸 조항이다. 국내 치안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도 안 되는 10만 병력에 탱크와 전투기와 같은 병기 자체는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독일군을 반쪽짜리로 만들었다. 사관학교와 참모본부의 폐지는 장교의 육성, 그리고 각 군의 지휘체계 자체를 분쇄시키겠다는 의도였다.


마지막 조항인 ⑦항이 가장 많이 알려진 조항으로, 패전국 독일을 아예 일어서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기준으로 매년 20억불씩 지불하고, 수출에 대해 26%씩 세금을 부과했다. 이 덕분에 마르크화는 폭락하고 독일 경제는 완전히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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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평. 뒤돌아 우는 아이가 독일이다.


문제는 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각국의 시각이었다. 같은 연합국이지만 영국과 미국은 베르사유 조학을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영국 대표단으로 참여한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인(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이 조약체결을 보면서,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다.”


라는 말을 남긴다. 이 말은 베르사유 조약 체결 과정을 본 후 곧바로 사표를 던지고 쓴 책인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 나와 있다.


이 배상금 문제를 단순히 ‘돈’으로만 바라보지 말길 바란다. 당시 배상금 문제에는 가장 예민했던 건 프랑스였는데, 여기에는 돈을 떠나 프랑스의 영국에 대한 악감정도(‘빈정 상함’이란 표현이 적확할 것 같다) 포함 돼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최대의 피해국인 프랑스는 전쟁 당시 전비조달 때문에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때 손을 내민 게 영국이었는데, 영국은 착실히 돈놀이를 하며 프랑스로부터 이자를 뜯어냈다. 그런 영국이 독일이 불쌍하다며 배상금을 탕감해 줬다. 이걸 보는 프랑스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선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이야기를 100년 전으로 돌려보자.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이 이길 수 있었던 건 영국은행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전비조달을 위해 만들어진 영국은행은 영국의 전쟁을 위해 혹은 영국의 이익이 걸린 전쟁을 지원(각국에 차관을 제공하는 방식으로)했다. 만약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미증유의 대전쟁이 아니라 나폴레옹 시대의 전쟁만 계속 벌어졌다면(최대 규모 62만 정도의 병력이 회전을 벌이는 정도?), 영국이 구축한 ‘전비조달 시스템’은 무난히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이제껏 인류가 상상해 왔던 전쟁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대전쟁이었다. 아무리 완벽하게 구축한 전비조달 시스템이라고 해도 한계가 분명했다. 미국이 등장하면서 겨우겨우 파국을 모면했던 게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경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차 세계대전으로 돈을 벌었다. 전비가 필요했던 동맹국들에게 차관을 빌려주고 착실하게 이자를 받아냈다. 여기서 문제는 당시 영국의 행태를 보는 프랑스인의 시선이었다. 누군가를 피를 흘리는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돈놀이를 하는 영국의 모습이 좋게 보였을까?


미국의 경우도 너무 가혹한 처사라며 독일에 대한 동정론을 펼쳤다. 반면 프랑스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당시 프랑스 총리이자 베르사유 강화회의 의장이었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독일에게 너무 관대한 협정을 맺었다며 실각했고,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인 포슈 장군은,


“세상에 이런 평화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단지 20년간의 휴전 협정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 오해할까봐 말하지만 그의 주장은 너무나 관대한 협정이라는 뜻에서 말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프랑스와 단순한(?) 참전국인 영국과 미국의 시각이 이렇게 달랐다.


이런 시각 차이는 이후 독일에 대한 입장의 변화로 이어진다. 까놓고 말해서 베르사유 조약 체제 하에서 독일은,


벌거벗겨진 채로 조리돌림 당하는 창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전쟁을 일으키기는커녕, 국가 내부의 소요사태도 진정시킬 수 없는 10만이란 병력, 전후 경제회복을 불가능케 하는 막대한 배상금은 독일인들에게 비상식적인(!) 선택을 강요케 했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 패전했어도 독일이었다.



독일 외교는 죽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 체제 하에서 신음하던 독일이지만, 그래도 독일은 독일이었다. 1922년 4월 16일, 독일은 이탈리아 라팔로에서 연합국에게 ‘빅엿’을 먹인다. ‘라팔로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라팔로 조약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히틀러 집권 전)과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우호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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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수상과 러시아 대표단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과 신생 사회주의 국가 소련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세계의 왕따


라는 점이었다. 독일은 지은 죄가 있어 그렇다 하지만, 소련은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자본주의 세계 한 가운데에 점처럼(그 점이 좀 커서 문제지만) 존재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자본주의 국가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소련은 없애야 할 숙적이었다.


이 두 왕따가 만났다. 두 국가로서는 아쉬울 게 없는 선택이었다. 수면 아래서 재군비를 해야 하는 독일에게 소련은 훌륭한 파트너였다. 독일은 독일 영토에서 실험할 수 없는 장비들을 소련에 가져가 실험할 수 있었고, 소련도 선진 기술과 교리를 전수받을 수 있었기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었다(제2차 세계대전의 독소 양군 전격전 지휘관들은 한솥밥을 먹던 사이였다). 경제협력을 위해서도 더없이 좋은 파트너였지만, 최고는 역시 외교적인 고립에서의 탈출이었다.


허울뿐이지만 그래도 전후 국제질서는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당시 상황에서 국제연맹 밖의 독일과 러시아가 같이 힘을 모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두 왕따가 모인 거라고 해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땅덩어리를 가진 국가와 한때 전 세계를 벌벌 떨게 한 국가가 뭉친 거라 무시할 수 없었다. 이 결합은 이후 서유럽의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하는 카드가 된다.


외교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이익’면에서도 라팔로 조약은 서유럽의 연합국들에게 ‘빅엿’을 먹였다. 당시 이 조약이 ‘제노바 회의’ 와중에 체결됐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대단했다.


북한의 예를 들어볼까 한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가 들어섰다. 소련의 붕괴와 신생 러시아의 등장 와중에 소련(혹은 러시아)의 경제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재정악화로 인한 의료복지의 악화였다. 소련시절에는 무상의료였지만, 경제상황이 최악이던 러시아에 들어선 의료사각지대가 넘쳐났다. 그 결과 러시아인의 평균수명이 10년이나 줄어들었다.


러시아는 팔 수 있는 모든 걸 팔고 소련 시절의 채권을 회수하려고 했다. 소련시절의 채권은 바로 ‘구상무역(일정기간 수출의 양을 균등하게 해 무역차액을 0으로 만들어 결제자금도 0이 됨)’의 회수였다. 냉전시대 소련의 구상무역이란 간단히 말해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무상지원과 같은 것(일종의 원조)으로,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부채였다. 그 당시 러시아는 북한에게 구상무역의 채권을 회수하겠다며 돈을 내놓으라고 했는데, 북한의 반응은 단호했다.


“러시아가 소련을 승계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기에 채무를 상환할 수 없다.”


증거가 없는 게 아니라 돈이 없는 것이었을 게다. 같은 의미로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소련이 들어섰을 때 서방세계는 러시아 제국에게 빌려준 채권을 회수하기 위한 방법을 짜내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게 독일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채무를 독일에게 받아내면 어떨까? 러시아도 제1차 세계대전 때 참전하긴 했잖아? 독일이 러시아(소련)에게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건 사실이니까 우리가 대신 받자.”


돈을 빌린 다음, “야, 내가 ○○이한테 돈 빌려준 게 있는데, 네가 그거 받으면 딱 맞아. 그럼 내 빚 없는 거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제노바 회의를 통해서 독일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체결된 라팔로 조약으로 이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당시 독일과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채무와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소련에 대한 배상금을 맞바꿔 채권채무를 상쇄시켜버렸다). 영국과 프랑스가 제대로 한방을 먹은 것이다.


정말 제대로 엿을 먹이겠다는 의도가 보인 것이, 라팔로는 제노바의 근교에 있는 도시다. 다시 말해 제노바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게 돈 받아낼 궁리를 하는 와중에 바로 옆 동네에서 소련과 조약을 맺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썩어도 준치, 패전했어도 독일이었다. 



첨언


원래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이야기 하다 잠깐 마지노선 이야기가 나와 흥에 겨워 2~3회 정도 가볍게 외전을 쓰려했는데, 쓰다 보니 ‘제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에 길게 늘어졌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돌아가겠다. 그래도 이 부분을 잘 살펴보면 ‘워싱턴 체제’ 말기, 그리고 그 이후 국제정세를 이해하는데(또한 이어지는 다른 시리즈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니까 화내지 말고 읽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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