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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19. 화요일

귀부인












 

 

그녀와 합숙을 시작하고 내가 가장 많이 한 것은 잘 먹고 잘 자는 것이었다. 나도 내 몸이 이 정도로 저질인지 몰랐는데 제사를 지내고 영가들을 정리한 뒤로는 미친 듯이 잠이 왔다. 언니는 내가 그 동안 못 이룬 잠을 좀 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좋은 핑계인 것 같아’ 하고 푹 잘 잤다. 그렇게 자고 나니 매일 아침 느끼던 강한 두통이 사라져서 아침마다 홀린 듯이 커피를 내리는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남들이 잘 자고 일어났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짐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가를 실물처럼 보지 않더라도 뭔가 있는 느낌을 받았다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꽤 많다. 하지만 난 내가 본 것만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어떤지는 잘 몰랐었다. 언니와 나는 매일 수다 삼매경에 빠져서 남들과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해나갔다. 어느 날 언니가 물었다.



“그런데 너는 걔네들이 어떻게 보이냐?”



나? 내 경우에는 영가들이 몹시 선명하게 보이는 편이다. 윤곽선은 흐리고 두께감은 약하지만, 색도 선명하고 입고 있는 옷의 디테일 같은 것도 잘 보인다. 예를 들어 아, 황토빛의 등산화를 신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어릴 적엔 영가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까 무심결에 옆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그랬던 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사람이 학교 교실에 우두커니 서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다. 지금 같으면 앞뒤 정황을 따져 봤을 때 아 쟤는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알았을 텐데.


어릴 적부터 사람이 아무 장소에나 있는 것을 보았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지금도 뭐랄까 이상해야 하는 상황을 잘 캐치하지 못하는 편이다. 무뎌졌다고 해야 하나.


초등학교 시절에는 여름마다 아빠 차를 타고 바닷가로 피서를 가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도 바닷가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차가 한참 막혀 기어가다 시피 하고 있을 때였다. 창밖을 보니 산 중턱에서 여자 둘이 하얀 한복을 입고 막히는 차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왜 저 여자들은 한복을 입고 저러고 있냐’며 낙석방지를 위해 그물이 쳐 있는 산중턱을 가리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에 사람이 올라가서 앉아있을 공간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일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늘 친절한 우리 엄마가 대꾸도 안하셨기 때문이다.


중턱.jpg

이런 곳 중턱에 앉아 있었다.


대학생시절, 같은 과 동기오빠가 처음으로 면허를 따고 운전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 오빠는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싶은데 어설픈 운전 실력이 걱정된다며 나에게 예행연습을 제안했다. 장소는 야경이 멋지다는 북악산 스카이라운지였다(그렇다 내 데이트가 아니었다). 북악산은 무조건 야경이라며 저녁 무렵 넘어가서 찍어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야경을 보러 올라갔다. 북악산을 조심조심 달리고 있던 중, 차도를 따라 웬 군인 둘이 총을 들고 열심히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군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때라 ‘영화에서 보던 인민군 복장이네’ 했지만 전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심결에 오빠에게, 개념 없이,



“오빠 여기는 청와대가 가까워서 군인들이 지켜? 총 들고 막 다니네. 근데 그 인민군 옷 같던데”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 오빠, 갑자기 차를 붕 하고 밟아서 열심히 북악산을 빠져나갔다. 북악산을 내려와 시내로 나오자 하는 말이,



“너 무서워... 거기 군인이 왜 있어. 그리고 나는 아무도 못 봤거든?”



그것이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고 그제서야 알았다.

 

 

 군인.jpg

이런 군인들이었다면 훈훈하기라도 했을 텐데...



초등학교 시절과는 확연히 다르긴 하지만 지금도 가끔은 영가를 보고 멈칫하는 경우가 있다. 차를 타고 가다 보거나, 빠르게 움직일 때, 어두워서 시야가 약해졌을 때 그렇다. 원래 시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안경을 쓰지 않고 걸으면 더 구분이 안 간다. 언니 말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구분이 갈 거라고 하는데, 제사 이후로는 많은 영가를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잘 안보니 전보다 덜 피곤하고 편하다.


언니의 경우 실제 사람과 영가의 구분을 아주 어릴 때부터 잘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야길 들어보니, 언니는 보다 안보다 했던 나보다, 영가가 훨씬 더 많이(왕창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그런데 언니는 영가들이 컬러풀하게 보이진 않는단다. 흑백으로 보인다고? 나름의 문화충격이었다. 우연히 지나는 길에 ‘난 이렇게 보이는데?’ 하고 언니가 보는 엉가와 비슷한 사진을 찾아주었다. 흐릿하고 경계선이 애매한 모습이다.


아무튼 둘 다 공통적으로 질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보인다. 이해가 되려나 모르겠다. 확실한건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시퍼런 조명이거나 눈을 쨕 째리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러고 보면 표정을 제대로 본 적은 꿈에서가 아니면 없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본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


같은 학교를 졸업했고 나랑 비슷한 선배의 경우 나처럼 자세하게 보는 편이고 덩어리감이 느껴지지만 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다니던 여자애 영가의 머리가 양갈래 머리라는 것 등을 함께 보았지만, 아마도 나랑은 다른 장면을 본 것 같다. 불의의 사고로 일찍 죽은 선배가 학교를 돌아다니는걸 보고 들어와서 ‘누구 칼 맞은 사람 있었나?’ 하고 묻기도 했는데 그런걸 보면 칼 맞은 모습 같은 것도 보인다는 거지. 사실 나는 칼을 맞았다 던지 그렇게 험한 모습은 경우는 적었다.


이 선배의 경우 반대로 멀쩡한 얼굴의 영가를 본 일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았다고 한다. 오래 동안 알고 지냈지만 서로 어떻게 보이는지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선배는 남들이 보는 영가들도 다 그렇게 험악한 얼굴인줄 알았다고 한다. 학생시절 선배가 잠시 머물렀던 자취방이 있는데, 거길 가면 밤마다 영가들이 파티를 벌이고, 떠들고, 그렇게 시끄럽게 했다. 학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우르르 그 집에 놀러갔다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집에서 잠을 잔 많은 인원 가운데 시끄럽다며 잠을 못 잔건 선배와 나 둘뿐이었다. 이거 참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니가 아는 다른 모씨의 경우 우리처럼 형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본다고 했다. 나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어스름한 연기처럼 보인다니 역시 사람마다 다른가보다. 하지만 그 분은 연기처럼 보아도 성별이나 대충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등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하긴 나도 내 뒤에 있는 영가를 느끼더라도 대충 나이와 성별 등이 짐작이 되니 비슷한 느낌인 것 같다.


또 다른 경우는 언니가 아는 스님의 경우는 나처럼 아주 정확하게 본다고 한다. 살아 있는 우리처럼 색도 보이고 물건을 들고 있으면 그것도 자세히 보인다. 그분은 심지어 보따리를 안고 있는 영가를 보면 그 보따리 안에 뭐가 있는지도 풀어보라며 구경도 하신 단다. 하핫~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ㅎㅎㅎ


할머니.jpg

아 딱 이 느낌인데!


또 어떤 사람들 눈에는 색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색이 휙휙 도는 장면을 본적이 있긴 하다. 나는 색이 들어간 연기처럼 보였는데 그 분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몸이 아픈 사람 속이 시퍼렇거나 연보라 빛으로 보이는 건 봤는데 그런 거랑 비슷하지 않으려나. 그건 아마도 오로라와 같은 느낌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도 성별이나 나이같은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이건 다른 사람도 다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가까운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대충 짐작 된다 하더라. 내 경우 언제인지 창문을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종종 있는데(우리 집 3층이었는데) 분명 성인 남자라고 느껴졌다. 중년의 남성 정도? 어떤 감각이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


얼마간 동거를 하다 보니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하나 발견되었다. 집안에 가전제품이 잘 되다가 갑자기 망가지면 본인이 뭘 어쩐 게 아닌데도 왜인지 서로 미안해하는 것이다. 이 집에도 여느 집처럼 가전제품들이 많이 있다. 전자렌지, 청소기, PC, 세탁기, 매일 들고 다니는 휴대폰 등등.. 누군가 갑자기 기계작동이 안된다며 ‘이거 갑자기 왜 이러지?’ 라고 말하면 언니도 나도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방을 빠져나간다. 속으로 나 때문인가 하고 찔려서 그런 것이다.


언니와 나는 살면서 온갖 가전제품이 망가지는 경험을 했다. 잘 되다가도 나만 지나가면 멀쩡하던 애들이 망가진다. 더 짜증나는 것은, 그 기계가 남에 손에 가면 멀쩡하게 잘 된다는 것이다. 살면서 내가 버린 MP3가 몇 개이던가. A/S를 받으러 가면 맨날 문제가 없다고 한다. 옜다, 너나 써라~ 하고 동생을 주면 아무 문제없이 잘만 썼다. PC는 밥 먹듯이 블루 스크린이 떠서 수리점으로, 컴퓨터를 잘 아는 친구에게로 넘겨졌지만 돈을 쳐들여서 업그레이드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늘 ‘우리 집에선 하루 종일 켜놔도 잘 되던데’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영가를 보는 사람들은 전자기파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하는 어설픈 가설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어느 여름날 언니와 나는 갑자기 멀쩡하던 청소기가 켜지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충전도 다시 해보고 코드도 바꾸어 보고 위치도 바꾸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켜지지 않기에 청소기를 들고 동네에 있는 수리센터로 향했다. 하지만 역시나 수리기사가 청소기를 확인하려고 스위치를 누른 순간 붕 하고 잘 돌아갔다. 역시 멀쩡한 거였구나. 언니와 나는 뻘쭘 해져서 청소기를 안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멋쩍어서 서로 웃기만 했다.


다리미.jpg

문제의 그 청소기 되시겠다.

그리고 지금도 안 되고 있다 ㅋㅋㅋ

 

 

언니와 나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며 재미나게 살고 있다.


혹시 비슷한 경험 있으신 분? 또는 위의 이야기와 다른 방식으로 영가를 보시는 분?

 

궁금하니 제보 바랍니다.

 

 

 

 

 


 

 

 귀부인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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