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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계엔 이런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10~12살 때 응원했던 팀을 평생 응원하게 된다.”

 

전설의 레전드 시절의 맨유를 이끌었던 축구계의 거물, 데이비드 길 CEO는 이런 말을 남겼다. 

 

“어린 시절에 형성된 이미지는 평생을 가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맨유의 이미지를 형성시키는 데 주력했다.”

 

대강 퉁쳐서 말하자면, 취향은 어릴 때 만들어지고,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오리도 아닌데 각인 같은 걸 할 리가 있나 싶으면서도, 축구와 야구라는, 우리 인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갉아먹을 줄 아는 두 스포츠계 마케팅에 두루 통용되는 말이라고 하니, 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유서 깊은 시간 도둑인 축구와 야구가 그러하니, 신흥 시간 도둑인 게임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넥슨은 다람쥐를 뿌려라!! 

 

태어나 처음 한 컴퓨터 게임이 갤러그였는지 페르시아 왕자였는지 포켓몬스터 골드였는지 삼국지3였는지 가물가물하지만, 태어나서 가장 즐겁게 한 게임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바람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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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고전게임을 넘어서 고물게임으로 놀림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당시 <바람의 나라>의 인기는 대단했다. 아직도 갓겜으로 칭송받는 스타1과 더불어 피씨방 투톱이었는데, 특히나 우리 동네에선 스타 잘하는 것보다 바람 레벨 높은 걸 더 많이 쳐줬다.

 

목도를 들고 초보자 사냥터에서 “넥슨은 다람쥐를 뿌려라!!”고 외치고 다녔던 일, 처음 화염주를 배우고 동동주 한 트럭을 사 쥐굴을 쓸고 다녔던 일, 쥐굴에서 뱀굴로 가는 통로를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 맨날 당하기만 하던 소환빵을 직접 해본 날, 가이드북을 사서 닭도록 읽고 60시간 쿠폰을 등록했던 일, 처음으로 “호박 다 판다"를 외쳤던 날 등등.

 

추억팔이를 하자면 날밤은 거뜬히 깔 수 있을 정도다. 나뿐만 아니라 그 시절 <바람의 나라>를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테다. <바람의 나라>라는 게임이 주는 애잔함, 애틋함, 그리움, 아쉬움, 원망 같은 복잡미묘한 감정이라는 게 있으니 말이다. 

 

그런 <바람의 나라>를 모바일 버전으로 출시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부푼 마음을 달래며 6일간 진행하는 클로즈베타 테스트에 참여했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라?

 

"바람 모바일? 에바쎄바 같은데..."

 

처음 <바람의 나라>를 모바일로 만든다고 했을 때, 이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바람의 나라>가 어떤 게임인가.

 

 - 1996년 4월 출시

 

 - 국내 최장수 온라인 게임 

 

 - 세계에서 가장 오래 서비스 중인 MMORPG

 

23년. 무려 23년 전에 만든 게임이다. 96년도에 태어난 아이들이 군인 아저씨가 됐고, 대학교를 졸업해 취업 준비를 하는 마당에 96년에 만든 게임이라니. 그때가 어떤 시절인가. 윈도우 95가 겨우 출시됐고(그마저도 뻑하면 튕김), 요즘 아이들은 절대 모를 도스(DOS)를 꽤나 빈번하게 이용하던 시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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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윈도우는 그래픽 기반이고 도스는 텍스트 기반의 운영체제이다. 세상 제일 무식하게 표현하자면, 마우스가 있고 그걸로 뭘 클릭할 수 있으면 윈도우, 키보드로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는 건 도스다.

 

문제는, <바람의 나라>는 상당히 도스의 향기가 짙게 나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빅뱅 이론>을 본 사람이라면 너드들이 둘러앉아 TRPG(Table-talk role-playing game) 하던 모습을 떠올려보자. 마스터와 전사, 도적, 마법사 등으로 역할을 나눈 뒤 게임이 시작된다.

 

마스터: 자, 여러분은 지금 던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가자: 입장하겠습니다.

 

마스터: 이런! 주술사의 눈앞에 고블린이 나타났습니다! 

 

참가자: 파이어볼!! 

 

이렇게, 상상력을 총동원해 입을 털어 진행하는 게임이 TRPG이다.

 

엄마한테 등짝 맞기 딱 좋은 이런 원시적인(!) 형태의 게임을 천리안이니 나우누리니 하는 PC 통신에서도 이어 했었는데, 이를 머드 게임(MUD:Multi User Dungeon)이라고 불렀다. 방에 옹기종기 모여서 입을 터는 대신, 채팅방에서 "파이어볼!!"을 타이핑하며 놀았다는 것이다.

 

이 머드 게임에 살짝 그래픽을 얹어 만든 것이 그래픽 머드게임인 <바람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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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기엔 느껴지지 않지만, <바람의 나라>는 대부분의 행동을 키보드로 한다.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는, 상당히 도스적인 게임인 셈이다(물론 마우스도 사용할 수 있지만, 사실상 쓸 이유가 없다).

 

이동은 방향키를, 아이템을 구입할 때 NPC를 클릭하는 것이 아니라 "노란비서 줘"라고 외치고, 일반 공격 역시 스페이스바를, 마법과 아이템은 소문자 a부터 대문자 Z까지 지정해 놓고 쓰는 방식이었다. 사냥을 할 땐 모든 키보드를 활용해야 했고, 나를 포함 많은 아이들이 바람 1달만 빡세게 하면 영타를 모두 외우는 기적을 체험하곤 했었다.

 

예를 들어, 주술사가 첨사냥을 할 때, '방향키 + 마비 5, 저주 6, 중독 7, 첨 1, 공력증강 0, 체력 2, 동동주 u, 노란비서 z, 웅담 e'를 사용한다. 실제 사냥을 하면 이 키들을 죽도록 두들겨야 하는 것이다. 텍스트를 그대로 따면 대략 이렇게 나온다.

 

5, 엔터, 5엔터, 6, 엔터, 6엔터, 7, 엔터, 7엔터, 11111 uu uu 00 222 11111 22 11 000 uu 00 uu 0 ee ee uu ee uu 00 2222 111 

 

즉, <바람의 나라>는 키보드로 즐기는 게임이고, 바람의 즐거움이란 사냥하며 키보드 위를 날아다니는 손맛과 아바타 같은 캐릭터로 나누는 채팅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게임을, 모바일로 만들었다고??

 

 

6일간의 추억팔이

 

<바람의나라:연> 클로즈베타 테스트는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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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딩화면+ 브금에서 추억팔이행 급행열차를 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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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방향키, 오른쪽에 타격 및 스킬

일반적인 모바일 게임 인터페이스와 같다

 

요즘 트렌드에 맞게, 초반에 빠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조작법을 익히고 나면 금방 레벨5가 되어 있다. PC버전과 마찬가지로 레벨5에서 직업을 택할 수 있다. 예전엔 말 잡아타고 직접 직업 길드를 찾아가야 했는데, 클릭 몇 번으로 직업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게임을 하든 몸빵보단 딜, 근거리보단 원거리를 좋아해, 주술사를 골랐다. 사실 바람은 뭘 하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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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쇼미더머니를 보고 잔 탓에 아이디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케릭터는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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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 오르면 스킬 포인트를 받고

스킬창에서 바로 스킬을 배울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역시 자동사냥이다. 사냥터에서 자동으로 몹을 잡는 것뿐 아니라, 퀘스트를 클릭하면 자동으로 사냥터까지 이동하고 사냥도 알아서 해준다(단 보상은 직접 받아야 함). 자동사냥 클릭 후 아빠의 마음으로 케릭터를 바라보고 있으면, 예전 <바람의 나라> 매크로를 돌릴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나름의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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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쥐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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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를 모아 장비를 강화할 수 있다

구버전엔 없었지만 신버전에 있는 걸 그대로 가져온 듯

 

공식 카페를 염탐해보니 며칠 만에 레벨 99를 찍고 용무기까지 만들었다는 훼인들이 있었는데, 먹고 살기 빠듯한 나는 레벨 53 밖에 못 찍었다. 회사에서도 했다면 더 많이 올릴 수 있었겠지만, 근면-성실의 아이콘인 나답게 집에서만 했다. 집에서도 광렙보단 다양한 컨텐츠를 두루 즐기는 걸 좋아해서 돌아다니느라 렙업이 늦었는데, 하루만에 30~40까지 찍은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퀘스트만 쭉 따라가도 레벨업은 무척 쉬우니 진입장벽은 낮은 편이다.

 

그외 이런저런 소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잘 살린 것: 구버전 느낌까지는 아니지만 바람 분위기를 잘 옮겼다. 브금과 효과음 살린 건 베리굿. 자동사냥 하면 무슨 재미? 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재밌다. 제작 시스템을 별로 안 좋아하고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자동사냥 하면서 제작할 수 있어 시간도 금방 가고 즐겁다. 레이드 시스템 신선하다

 

아쉬운 점: CBT여서 그런지 렉이 심하다. 자동사냥 퀄리티가 매우 후지다. 타겟팅이 왔다 갔다 하고, 공력증강을 타이밍에 맞게 못 하고 팔십세주를 축내고 있다(덕분에 팔십세주를 2~3천 개 사서 사냥하는 기괴한 게임이 됐다). 마법 딜레이 조정이 필요해 보인다. 저주를 7초마다 할 수 있으면 첨사냥을 어떻게 합니까. 밸런스 조질 과금 요소가 여기저기 보인다. 도착하기-잡기-점령하기-줍기로 반복되는 퀘스트가 지나치게 단순하다.

 

 

넥슨은 다람쥐를 뿌릴 수 있을까?

 

믿거국이란 말이 있다. 믿르는 산이란 뜻인데, 주로 국산 모바일 게임을 욕할 때 쓰인다. 국내 게임사들이 온라인으로 이름을 날린 게임의 유명세만 믿고 '별다른 고민 없이' 모바일로 이식해, 양산형 게임을 만들고 현질 유도만 덕지덕지 발라 놓은 걸 비꼰 것이다.

 

<바람의 나라:연>도 여기에 해당될까?

 

잘 모르겠다. 추억팔이에 흠뻑 젖어서 후하게 평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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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 제작, 즉시이동비서 등 현질을 유도하는 과금 요소가 곳곳에 폭탄처럼 도사리고 있어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예상보다'는 훨씬 재밌는 게임이었다. 물론 손바닥만 한 액정을 콕콕 누르는 방식에선 예전에 느꼈던 '키보드 위를 날아다니는 손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자동사냥으로 캐릭터가 성장해가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많은 유저들이 자동사냥에 아쉬움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본다. 모바일이라는 한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예전 게임이 유저가 참여해 직접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지금의 게임들은 만들어진 스토리를 즐기는 방식으로 기울었다. 나처럼 구닥다리는 아쉽지만 흐름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의 나라:연>의 문제는, 자동사냥보다 '구경만 하는 게임'이 되었다는 것에 있다. 자동사냥이 불가피한 선택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면, 예전의 재미, 즉 소통과 손맛을 보완해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바람의 나라:연>에선 그 점을 느낄 수 없었다. 말하자면, 구경하는 재미에 더해질 결정적 한 방이 있어야 하는데, 그 한 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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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도입된 전투력.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어떤 요소가 그 '한 방'이 될까?

 

용궁이나 중국, 도삭산, 북방대초원 같은 다양한 퀘스트일 수도 있고, 바람의 꽃이라는 공성전 혹은 고구려 부여 전쟁 같은 이벤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소통을 강조하기 위해 보이스톡 기능을 더할 가능성도 있다. 자동사냥이 개입할 수 없는 컨텐츠도 있어야 하고, 전투방식도 모바일에 맞게 더 다듬어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캐시템을 없애고 정액제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본다.

 

나와 같은 올드 유저들은 추억을 떠올리며 바람에 접속할 것이다. 그 유저들의 아쉬움을 상쇄시켜줄 '무언가'를 갖출 수 있느냐 없느냐가 이 게임의 성패를 가르게 될 것이고, 그것이 개발진 앞에 놓인 가장 큰 숙제이자 이번 클로즈베타 테스트의 소득일 테다.

 

어찌 됐건, <바람의 나라> 취향이 돼버린 나는, 낯설고도 반가운 게임 <바람의 나라:연>을 꽤나 즐겁게 플레이했다. 가장 구닥다리인 게임을 가장 세련되게 포장해야 하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만들기와 같은 이 도전이 성공해, 앞으로도 넥슨이 다람쥐를 뿌릴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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