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편집부 주

 

1909년 10월 26일, 항일의병장이자 사상가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킵니다.  

 

사용된 권총은 벨기에 FN사가 제작한 "브라우닝 M1900"으로 이 총은 일본으로 넘겨져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이후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본 시리즈는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그 총의 행방 및 복원을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를 담은 프로젝트로 매주 연재 예정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하나의 확신이 생겼다. 

 

“일본 땅 어딘가에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262336(총번) 총이 있을 거다.”

 

처음에는 확률이 높은 ‘가능성’이었지만,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안중근 의사 의거 후 일제의 ‘조직적인’ 안중근 지우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0.

 

Untitled-3.jpg

 

'안중근 의사 기록 필름'이라고 해서 의거 직후에 끌려가는 영상을 한 번 쯤은 봤을 거다. 이 영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이토 히로부미와 회담을 하기로 한 러시아의 코코프체프는 신문물이었던 영사기로 이토와의 만남을 촬영했다. 만약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필름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선물로 건네졌을 터였다.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코코프체프의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선물이 되었어야 할 필름은 ‘의거 기록물’이 됐다. 필름은 의거 직후 일본 인사(외교관련 인사)가 재빨리 입수했다(돈을 주고 구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필름이 세상에 공개된 건 1995년이다. 일본의 한 방송사가 저격 장면을 제외한 25초 가량을 방영했다(국내 방송사도 2008-9년쯤 입수한 걸로 안다). 

 

01.jpg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도착했다

 

02.jpg

사열받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던 장면은 촬영되지 못했던 걸까? 아니다. 촬영됐고, 상영되기도 했다.

 

1910년 8월 14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러시아 촬영기사가 촬영한 이토 히로부미 저격장면 필름이 미국으로 건너왔고, 상영됐다고 한다(필름 두 통이 태평양을 건너와 상영이 됐지만 미국인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학계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기관이나 영상 관련단체가 필름을 입수해 보관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필름 뿐만이 아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에 두 아우에게 남긴 유언

 

숙명여대 뒷편에 있는 효창공원에 삼의사 묘역이 있다. 1946년 7월 9일 김구 선생이 만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소다(김구 선생도 3년 뒤에 이곳에 안장된다). 삼의사 묘의 옆에 보면 비석이 없는 무덤이 있는데 바로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찾을 수가 없다. 일본은 안 의사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싶어했다. 

 

“만일 허가해준다면 ‘동양평화론’ 한권을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추어줄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법원장이 대답하기를, 

 

“어찌 한 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

 

하므로 나는 감사하며 항소권을 포기했다. 

- 안중근 의사 옥중자서전 中

 

일본 법원장이 <동양평화론> 저술을 위한 시간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 검찰이나 사법부가 아니라 외무성이 재판 지휘를 담당했다.

 

실질적으로 안중근 의사를 사형한 건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였다.

 

Komura_Jutaro_in_1905.jpg

 

일본에게는 최고의 외교관이자 영웅이겠지만, 한민족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조선에 출병하자 ‘전쟁’을 외쳤던 그였다. 청일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지휘하는 제1군에 종군해 안동(安東) 민정장관이 됐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사후처리를 맡는다. 

 

하얼빈 의거를 했을 당시 제2차 가쓰라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조차지였기에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법원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러시아가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조차지에 일본 고관이 방문했다가 러시아 병사들 앞에서 사살 당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헌병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그날 밤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신병이 인도됐다. 바로 뤼순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첫 공판은 이듬해인 2월 7일에 시작되었다. 사형 언도가 내려진 건 고작 6회 공판 만이었다. 이때가 2월 14일. 한 달이 지난 3월 26일엔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됐다. 

 

주목해야 하는 건 사형 언도는 일본 사법부의 판단이 아니었다는 거다. 

 

1909년 12월 2일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 명의의 전문 하나가 관동법원으로 날아갔다. 안중근 의사를 사형시키란 전문이었다. 

 

한일병합을 앞둔 상황에서 안중근이란 인물은 일본에게 ‘부담’이었다(한반도에서는 안중근 의사 엽서가 불티나게 팔렸고 일본은 이 엽서의 발행과 판매를 금지시켰다). 외세의 압박 속에 민족독립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안중근을 끌어내려야 했다. 그렇기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몰래 암매장 했다. 

 

일본이 안중근 의사가 의거에 사용한 M1900 권총을 어떻게 봤을까? M1900은 증거품으로 분류돼 일본 검찰에 넘어갔다. 재판이 끝난 뒤엔 일본 본토로 넘어간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진다. 

 

일본 측 주장에 의하면, 

 

“관동대지진 때 분실했다.”

 

1923년 9월 1일에 있었던 대지진, 뒤이은 사회적 혼란과 수습 과정에서 분실했다는 거다. 믿을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믿을 수 없다.

 

Untitled-1.jpg

 

 

 

1.

 

총번 710592

 

FN社에서 거의 마지막에 제작한 M1900이다. 이 총이 생산되고 얼마 뒤 M1900은 생산이 종료되고, 다음 버전인 M1910이 생산됐다.

 

프로젝트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를 위해서 전세계 총기 옥션과 브로커를 만나는 과정에서 얻은 가장 확실한 성과다. 

 

M1900은 생산시기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형으로 나눌 수 있다(총 성능 자체에는 별 차이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안중근 의사가 사용했던 20만 번 대 총기를 구하고 싶었지만, 상태가 괜찮은 20만 번대 총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FN社에서 보관하고 있는 M1900를 양도받는 방법도 고민해봤지만, 우리가 구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본 다음에 FN에 연락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온 사방을 뛰어다니면서 총을 찾았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뒤졌다.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동창, 사회 친구, 후배 등등 미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해결은 총과 전혀 상관이 없는 어떤 ‘인물’의 클릭 한 번으로 됐다. 

 

'황영호'는 환장형의 대학교 친구다. 

 

“야, 혹시 모르니까 네가 경매 입찰해봐.”

“그래? 나 총기 라이선스 없는데?”

“입찰은 상관없어. 일단 낙찰되면 딜러 붙이면 될 거야.”

“그래? 알았어.”

 

석 달이 지났다. 다른 곳에서 총기를 찾고 있을 때였다. 잊고 지내던 매물의 입찰이 종료됐다. 환장형은 말했다.

 

“영호야, 고생했다. 아무래도 미국 쪽에서 총 구하는 건 어려울 거 같고 다른 쪽에서...”

“응? 그 총? 샀는데?”

“...?!”

 

생각도 못했다.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그 흔한(?) 총기 라이선스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부탁하기 전까지는 총에 관심도 없었다. 구경이 뭔지, 슬라이드가 뭔지, FN社가 뭔지 전혀 지식이 없었다. 그냥 보내준 링크를 타고 들어가 총을 관찰한 것 뿐이다. 

 

“가격은 생각 말고, 그냥 눌러! 낙찰만 받으면 돼.”

 

툭 까놓고 말해서 별 기대는 없었다. ‘입찰 대기 총기’의 상태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경쟁이 치열할 거라 예상했다). 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잭팟이 터졌다. 

 

sss.jpg

 

초심자의 행운? 역시 물건의 임자는 따로 있다.  

 

 

 

 


 

 

 

필자 주

 

 

a1d785103dd5e880ffced28ac9d7093c.jpg

 

2018년 4월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를 다큐멘터리로 제작중입니다. 2020년 3월 공개 예정입니다. 펀딩 목표 금액 1천만원으로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하얼빈 의거 장면을 촬영하려 합니다. 

 

프로젝트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 펀딩(링크) 

 

안중근 의사의 사격장면 재현을 위한 물적 토대는 크게 3가지로, M1900 권총과 32ACP 탄, 그리고 발리스틱 젤라틴입니다. 총은 미국 총기 옥션에서 낙찰받아 현재 배송 프로세스를 밟는 중입니다. 펀딩은 32ACP 탄과 당시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십자가 흠집’이 있는 탄의 위력 실험을 위한 발리스틱 젤라틴 구매 비용, 그리고 촬영에 들어갈 기자재 대여와 인건비로 사용 예정입니다.

 

총기 사격 실험에 고속촬영 장비와 인력 지원이 필수적입니다. 아울러 고속촬영을 위한 조명 세팅에도 비용이 들어갑니다.

 

110년 전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가 어떤 악조건 속에서 의거에 성공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는지를 실물 총을 가지고 실험할 예정입니다.

 

현재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국내 재현 사격을 추진중이며, 만약 국내사격이 여건상 어렵다면 미국 현지에 섭외한 사격장에서 촬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